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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
3월 주주총회 시즌이 열린다.
이번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이 얼마나 존재감을 보여줄지 시장은 주목한다.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시장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8%나 된다.
국민연금은 지난해부터 주주총회에서 반대 의결권 행사를 늘리고 있다.
국민연금은 올해 사상 처음으로 400여 주주총회의 안건에 대해 외부 컨설팅을 의뢰했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이 ‘거수기’ 역할에서 벗어나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특히 기업들의 배당확대에 국민연금이 앞장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동안 국민연금은 관치논란을 피하기 위해 의결권 행사를 제한했다.
그러나 지난해 말 국민연금의 배당의결권 행사는 경영참여 목적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자본시장법 시행령이 개정됐다. 국민연금이 더 적극적으로 기업의 배당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국민연금, 배당의결권 확대 의지 드러내다
국민연금공단은 26일 올해 첫 기금운용위원회를 열고 배당 의결권 확대방안을 논의했다. 국민연금공단은 3%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에 대해 배당 적정성을 판단하는 지침을 만들고 배당을 낮게 하는 기업을 중점 관리기업으로 지정해 주주제안을 행사하는 내용의 안건을 마련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상장기업들의 배당성향은 16%로 세계 평균 40%대에 크게 못 미친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그동안 기업들의 배당정책에 소극적이었다.
지난해 국민연금과 네덜란드공적연금이 기업에 배당관련 의결권을 행사한 내용을 살펴보면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정기주총에서 재무제표와 배당승인 안건 132건 가운데 고작 2건에 대해서만 반대의견을 냈다. 전체의 1.52%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국민연금과 규모가 비슷한 네덜란드공적연금은 국민연금이 반대한 2건을 포함해 모두 115건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했다. 반대의사를 표시한 경우가 87.12%나 된다.
국민연금이 더욱 적극적으로 배당확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154조를 개정했다. 개정시행령은 연기금의 배당 관련 의결권 행사가 경영에 참여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내용을 담았다. 국민연금이 배당 의결권을 확대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그러나 이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배당 의결권 확대 안건은 보류됐다. 운용위원 가운데 기업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국민연금이 마련한 잣대를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월권행위라며 강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재계 대표들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고 결국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해당 안건이 처리되지 못했다.
비록 이번 위원회에서 안건은 보류됐으나 국민연금은 배당과 관련해 목소리를 높여갈 것으로 보인다.
재계가 강하게 반발한 것 자체가 국민연금의 의지가 그만큼 확고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국민연금은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다음 기금운용위원회에서 해당 안건을 관철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배당 의결권 확대 안건이 통과되지 않았다고 해서 국민연금의 주주권 강화 방침 자체가 꺾인 것은 아니다”라며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를 위해 조사하는 기업이 늘었기 때문에 예년보다 적극적으로 의사결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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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 국민연금, 주주 무시하는 경영에 제동거나
단순히 배당의결권 행사만이 국민연금의 과제가 아니다. 국민연금은 주주총회를 앞두고 외부 자문기관에 기업들의 주요 안건 400건에 대한 의안분석을 의뢰해 진행하고 있다.
주요주주 입장에서 각종 안건들에 대한 분명한 의사를 표명하겠다는 뜻이다.
이런 전례없는 국민연금의 움직임에 기업들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의 지분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국내 최대기업 두 곳만 봐도 국민연금의 지분은 오너 일가를 앞선다. 삼성전자의 경우 국민연금은 지분 7.8%를 보유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등 오너 일가 지분은 4.7%밖에 되지 않는다. 현대자동차에서도 국민연금 지분(7%)은 정몽구 회장 일가(5.2%)보다 많다.
이밖에도 국민연금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30대 그룹 상장사 3곳 가운데 2곳에서 오너 일가보다 많은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려 한다면 오너 일가들에 대한 충분한 견제가 가능하다. 기업들이 국민연금의 눈치를 보는 이유다.
지난해 국민연금은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에 반대했다. 국민연금은 두 회사 지분을 5% 이상씩 보유하고 있는 주요주주였다.
두 회사가 합병을 추진해 주식 가치가 떨어지자 국민연금은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했다. 국민연금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자 다른 투자자들도 함께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했고 두 회사의 합병은 결국 철회됐다.
국민연금의 적극적 움직임이 사실상 합병을 막은 것으로 분석된다. 국민연금의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는 단순히 두 회사의 합병을 막았을 뿐 아니라 삼성그룹이 이재용 부회장 체제 전환을 위해 시도한 사업구조 개편에도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민연금은 2012년 한라공조의 상장폐지를 막은 적도 있다.
한라공조 대주주인 미국 비스테온사가 지분 95% 이상을 획득해 상장폐지를 추진했는데, 지분 7.82%를 보유한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공개매수에 응하지 않으면서 비스테온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국부유출을 우려한 국민연금이 최대주주를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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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왼쪽)과 방준혁 넷마블게임즈 의장 |
◆ 국민연금, 주주총회 캐스팅보트 적극 행사할까
국민연금은 지난해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한 안건 가운데 10.5%에 반대의견을 냈다.
지난해 국민연금의 투자 포트폴리오 가운데 국내 주식만 손해를 봤기 때문에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올해 더 적극적인 주주권한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의 향방을 가를 캐스팅보트를 쥐게 될 가능성도 높다.
이번 주주총회 가운데 엔씨소프트의 주주총회가 가장 주목을 받는다.
엔씨소프트는 최대주주 넥슨과 경영권을 놓고 마찰을 빚고 있다. 넥슨은 엔씨소프트 지분 15.08%를 보유하고 있는데 지난달 지분보유 목적을 경영참여로 변경했다. 넥슨은 이사 파견 등 엔씨소프트 경영에 참여할 뜻을 밝혔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엔씨소프트가 보유하고 있는 자사주 8.90%를 넷마블게임즈에 넘겨 경영권 방어에 나섰다. 이로써 김 대표는 넷마블이 보유한 우호지분을 합해 18% 가량 지분을 확보해 넥슨과 지분경쟁에서 한 발 앞서게 됐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넥슨과 엔씨소프트가 끝까지 대립할 경우 주주총회에서 승패를 가르는 건 국민연금(지분 6.88%)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연금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최종승자가 결정된다.
국민연금이 넥슨이나 엔씨소프트 어느 한쪽 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주주권 행사에 나서고 있는 만큼 넥슨이나 엔씨소프트 어느 한쪽이 상당한 수준의 주주가치 훼손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할 경우 새로운 선례를 만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밖에도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기업들이 많다. 삼성물산, 유한양행, SK케미칼 등 15개 기업은 최대주주 지분율이 주주총회 결의를 위한 최소요건인 25%를 충족하지 못한다.
이들 기업은 최대주주와 국민연금의 지분 차이가 10%포인트 미만이기 때문에 국민연금의 협조가 더욱 절실하다.
KB금융지주, 하나금융지주, 신한금융지주, 포스코, 네이버, KT 등 6개 기업은 국민연금이 최대주주에 올라있다. 국민연금 입김이 어디보다 강하게 작용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사내외 이사들의 임기만료를 앞두고 있어 이사 선임에 국민연금의 의지가 어느 정도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남재우 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이 주주총회에서 반대의견을 내도 실제 반영되는 사례가 많지 않았지만 국민연금이 한 기업에 10% 이상 투자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기관투자자들의 행동주의성향이 강해지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독려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국민연금의 기금운용평가 지침을 변경해 평가항목에 주주권 행사와 사회적 책임 투자를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해외 연기금이 적극적으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감안해 평가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높다.
무엇보다 기업들이 볼멘 소리를 낸다. 이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배당 확대와 관련한 안건이 보류된 것이 대표적이다. 이동응 한국경영자총협회 전무는 “배당은 기업고유의 경영권”이라고 강조한다.
정부의 지나친 개입에 따른 관치논란도 제기된다.
김용하 순천향대학교 교수는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의 주식의결권과 주주권 행사 강화는 주식회사를 근간으로 하는 국내 자본주의 시스템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다”며 “국민연금 의결권 강화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디모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