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30여 년 동안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다섯 차례에 걸쳐 10여 년의 옥고를 치른 대표적 재야출신 인사다.
1945년 1월11일 강원도 묵호(현 동해시)에서 4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강원도 탄광지대에서 전기기사로 일했다. 그의 가족은 탄광이 문을 닫자 고향인 경북 영양으로 귀향해 소작농으로 일했다.
중학교 때 읽은 심훈의 ‘상록수’에 깊은 영향을 받아 농촌운동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린시절부터 웅변에 재능이 뛰어나 각종 웅변대회를 휩쓸기도 했다.
영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양군청 농장관리인으로 근무하다 중앙대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다.
대학교 2학년 한일회담 비준 반대운동을 하다 제적됐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이후 국민산업학교에 입학해 졸업하고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다시 중앙대 경제학과에 복학하여 졸업했다.
군 복무 중 파견교사 시험에 합격해 전역 뒤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장훈고, 대성고, 송곡여고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이재오는 이우재, 장기표, 김문수 등과 함께 51개 지구당을 가진 민중당을 창당한다. 그는 14대 총선 서울 은평을 지역구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민중당이 전국 득표율 3%를 얻지 못하고 해산되는 결과를 맞았다.
이후 김문수, 이우재 등 민중당 세력과 함께 보수여당인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15대 총선에서 서울지역 최다득표 기록을 세우며 당선돼 정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놨다.
당시 김문수, 홍준표 등 초선의원 35명과 함께 ‘시월회’를 조직해 당 쇄신 논의를 주도했다.
16, 17대 총선에서 지역구인 은평구에서 내리 당선됐다.
이재오는 최병렬 대표 체제에서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맡았지만 2개월 만에 물러났다.
그는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후보 선대본부장을 맡아 이명박 정권 창출의 핵심역할을 했다. 18대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정치일선에서 떠났다가 국민권익위원장으로 복귀했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한 이후 국민권익위원장, 특임장관을 역임하는 등 자타가 인정하는 ‘실세’로 꼽혔다. 특히 그는 4대강 전도사로 활동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여권에서 친이(친이명박) 좌장으로 통한다. 정권창출을 앞장서 이뤄냈고 ‘왕의 남자’로 불릴 정도로 실세 중 실세를 경험했다.
자신의 트위터, 페이스북뿐 아니라 공개석상에서 박 대통령을 자주 비판해 ‘여당 내 야당’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그가 진보정당에서 보수당에 입당할 당시 변절이니, 전향이니 하는 지적이 많았다. 그는 “전향은 애당초 없었다. 좌파라서 사회주의라서 독재와 싸우고 감옥에 간 것이 아니었다”면서 “정의롭지 못한 사회, 옳지 않은 것에 저항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정몽준 전 의원이 붙여준 그의 별명은 ‘돌아온 장고’다. 새누리당에서 거의 독보적으로 독설을 날린다고 해서 붙은 별명으로 전해진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그를 “정치적 지략이 많은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춘추전국의 영웅들>1·2·3, <초한지> <열국지> <한비자> 등을 저술한 평론가 신동준은 이 의원이 이명박 전 대통령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삼국지에서 악인 동탁의 밑에 있던 이각이나 곽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보수 진영 일부에서 ‘빨갱이’, 진보 진영에서 ‘변절자’ 소리를 듣는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64년 중앙대학교 재학시절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해 제적됐으며 그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거치면서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으로 30년 동안 5번 투옥됐다.
장훈고 교사 시절 서울대 유신반대 시위 배후조종과 내란음모죄로 수업 도중 체포돼 치안본부 남산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했다. 이 때 이재오를 고문한 사람이 고문경관 이근안이고, 담당검사는 한나라당 대표를 역임한 이한동이다.
1977년 대성고 교사로 지내던 당시 서울시내 고교 교사들과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풍자극을 각본연출하다 구속돼 다시 교단에 서지 못했다.
그뒤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는 등 재야운동에 뛰어들었다. 1979년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1979년 8월 강연 중 대통령의 딸을 비방하고 유신정권을 퇴진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세 번째 옥살이를 시작한다.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 배후로 지목돼 또 다시 구속됐다.
1989년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을 거쳐 1990년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여 사무총장이 됐다. 14대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은평구에서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했다.
그 후 15대 총선을 앞둔 1996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공천받아 신한국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뒤 16대, 17대 국회의원에 연달아 당선되며 15~16대 국회교육위원회 위원, 17대 국회문화관광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했다.
2001년 이례적으로 재선으로 한나라당 원내총무를 역임하고, 2002년 한나라당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 본부장을 맡아 청계천을 내세우면서 야당인 김민석 후보에게 뒤지는 상황에서 역전승을 거뒀다.
제 32대 이명박 서울시장 직무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3년 한나라당 사무총장, 2004년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2006년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당선되었다.
2006년 7월11일 한나라당 제8차 전당대회에서 2위를 기록하며 최고위원에 당선됐으나 2007년 11월8일 한나라당 경선에서 패배한 친박의원들의 압력으로 최고위원직을 자진사퇴했다.
2008년 4월9일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압승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낙선했다.
그뒤 2008년 5월 미국 워싱턴에 있는 존스홉킨스 대학교로 떠나 객원 교수로 한국학 강의를 맡았다.
2009년 9월 30일 대한민국 국민권익위원회 2대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2010년 7월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해 2년 3개월여 만에 국회로 복귀하게 됐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됐다.
◆ 학력
1957년 경상북도 영양에서 석보초등학교를 졸업해 1960년 석보중학교를 졸업했다.
1963년 영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4년 중앙대학교 농촌사회개발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졸업하면 농촌지도소에서 공무원 특채로 뽑아준다는 조건이 있어서 들어갔다. 하지만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주도하다 제적당했다.
강제징집으로 1966년 군에 입대했고 1969년 제대 뒤 복교신청을 했지만 불순세력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고 스스로 말한다.
1970년 국민산업학교 농업경영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1972년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1996년 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 가족관계
부인 추영례와 1971년 결혼해 1남2녀를 두고 있다.
부인은 부모가 연을 맺어줬다. 1940년대 일본에 부역을 나갔다가 만난 양가 부친은 1969년 결혼할 때가 된 서로의 자녀들을 소개했고 2년 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당일 수배령이 내려졌다. 안기부 직원이 “오늘은 봐주고 내일부터 잡을 테니 알아서 도망가라”고 한 일화가 전해진다.
◆ 상훈
◆ 상훈
어록
“당단부단 반수기란(當斷不斷 反受其亂)”(마땅히 잘라야 할 것을 자르지 못하면 훗날 재앙이 온다는 뜻으로 2015년1월 페이스북에 올린 글)
“초심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초심을 잃었으면 권력을 이용해 부자가 됐거나, 아니면 감옥에 갔거나 둘 중 하나겠지”(2014년 12월, 1991년 민중당을 시작하면서부터 초심을 잃지 않았다고 자부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난 그 아버지 때도 겪었는데 거기에 비하면 약과다.”(2014년 12월, 현직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데 무섭거나 두렵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청와대가 환골탈태해서 속 좁은 정치를 그만 했으면 한다. 국가나 권력을 사유화하지 말고 ,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패거리 정치하지 말고, 너그러운 정치를 했으면 한다.”(2014년 12월3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
“이 정부 들어 몇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대통령이 한 번도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정윤회 씨 문제도 사실 여부를 떠나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 이 정도 이야기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사람이라면 적어도…”
“지금 정부가 하는 것을 보면 옛날 박정희 정권에 대한 향수, 그중에서도 유신독재 권력으로 회귀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대통령이 권력독점을 넘어 권력을 사유화하는 것 같다.” “대통령 스스로가 국민들이 대통령을 나라의 아버지, 어머니로 생각해주길 바라고 있다.” (2014년 12월11일 이해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주최로 열린 ‘권력구조 개편과 헌법개정’ 토론회 축사자로 나서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적폐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소위 집권여당이라는 사람들도 싹 엎드려버렸다.”(2014년 12월 라디오방송에서 ‘정윤회 동향보고’ 문건 유출과 관련해)
“영화 변호인을 봤다. 잊고 살았던 고문당한 전신이 스믈스믈거리고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전신이 옥죄이면서 아파온다. 비단 나 뿐일까. 아, 그런데 지금 이 나라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눈물이 난다.”(2013년 12월 영화 ‘변호인’을 보고 자신의 트위터에)
“무슨 2인자? 1인자가 있을 뿐이지. 권력에 무슨 2인자가 있나요. 권력은 1인자만 갖는 거지. 뭘 보고 나를 2인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어요. 내가 무슨 직책이 있나, 자리가 있나.”(2009년 이명박 정권의 2인자라는 얘기에)
“정치는 있는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죠. 국민 다수가 없는 사람에 속하니까. 재산이 많으면 그것을 잣대로 사물을 보게 돼요. 없는 사람 처지를 이해하기 어렵죠. 정책이나 법안을 재산가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런 태도는 공직에 적합하지 않죠.”(2009년 언론에)
“돈이 생기면 쉽게 일을 하려 한다. 정치를 돈으로 하려면 안 된다.”(2009년 언론에)
◆ 평가
여권에서 친이(친이명박) 좌장으로 통한다. 정권창출을 앞장서 이뤄냈고 ‘왕의 남자’로 불릴 정도로 실세 중 실세를 경험했다.
자신의 트위터, 페이스북뿐 아니라 공개석상에서 박 대통령을 자주 비판해 ‘여당 내 야당’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그가 진보정당에서 보수당에 입당할 당시 변절이니, 전향이니 하는 지적이 많았다. 그는 “전향은 애당초 없었다. 좌파라서 사회주의라서 독재와 싸우고 감옥에 간 것이 아니었다”면서 “정의롭지 못한 사회, 옳지 않은 것에 저항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정몽준 전 의원이 붙여준 그의 별명은 ‘돌아온 장고’다. 새누리당에서 거의 독보적으로 독설을 날린다고 해서 붙은 별명으로 전해진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그를 “정치적 지략이 많은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춘추전국의 영웅들>1·2·3, <초한지> <열국지> <한비자> 등을 저술한 평론가 신동준은 이 의원이 이명박 전 대통령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삼국지에서 악인 동탁의 밑에 있던 이각이나 곽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보수 진영 일부에서 ‘빨갱이’, 진보 진영에서 ‘변절자’ 소리를 듣는다.
◆ 기타
개헌작업을 공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2012년 박근혜 정부 출범 이전부터 개헌론을 주창했다. 2014년 ‘이제는 개헌이다’라는 책도 냈다.
야구모자에 티셔츠를 입은 채 자전거로 지역구를 누벼 ‘자전거 의원’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특임장관 내정자 시절 어린시절 생활기록부가 공개돼 화제를 모았다. 석보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매사에 치밀하고 자존심이 강하나 좀 경솔하다’(6학년)는 평가가 기록돼 있다. 석보중학교 시절에도 ‘언어동작이 경솔하나 사리판단이 영특하다’(1학년), ‘창조성이 영특함. 품행이 다소 경솔한 편’(2학년), ‘진취적이고 자율적임, 언어동작이 경솔함’(3학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양고등학교 시절에도 ‘때로 학급 분위기를 어지럽힘’(2학년)는 평가를 받았다. 3학년 시절 ‘명랑하고 활발해 정의감이 강하고 의지력이 강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0년 말 장기표, 김문수 등과 의기투합해 민중당을 창당하고, 1992년 14대 총선에 나섰다. 이 의원은 민중당에 대해 “대중의 정치적 진출, 서민의 정치적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신한국당에 입당해 같이 개혁해보자면서 지역구 출마를 두 번이나 권유해서 길을 바꾸게 된다. 스스로 그 이후 지금까지 한나라당에 남아있는 이유에 대해 “한국정치에서 보수가 개혁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5년 동안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23평짜리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다. 가진 돈 850만 원과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 2천만 원으로 마흔이 넘어서 마련한 집이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중진 정치인으로 드물게 골프에 취미가 없다.
등산을 즐긴다. 동네 뒷산에 매일 올라가고 일요일에 북한산, 관악산, 도봉산 등에 오르는데 주로 혼자 다니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산을 찾아갈 때만 산악회원들과 어울린다.
‘4대강 전도사’로 불릴 정도로 4대강사업 추진에 앞장섰다.
매년 농촌봉사활동을 한다.
자전거 사랑으로 유명하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겸임교수 당시 출퇴근 교통수단으로 자전거를 이용했다. 이때 습관이 된 자전거타기가 지역구민과 소통수단으로도 톡톡히 활용됐다. 선거운동기간에도 유세차에 오르지 않고 자전거로 골목을 누빈 일화는 유명하다.
2012년 이명박 정부 당시 3박4일 일정으로 612km에 달하는 4대강 자전거 현장탐방에 나서기도 했다.
소설가 이문열과 같은 재령(載寧) 이씨다.
역사책이나 논어 같은 고전을 많이 본다. 정치의 고전으로 삼기 위해서.
1982년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시절 재소자 인권투쟁을 하면서 23일간 단식했다. 그해 부친이 돌아가셨지만 그 사실을 알려주려 면회를 왔던 형이 동생이 단식투쟁하는 걸 보고 차마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듬해 출소할 때까지 이미 세상을 뜬 부친에게 간간이 편지를 써 보냈다.
수감생활 하는 동안 집안생계는 부인이 꾸렸다.
거실에 ‘不勞無榮(불로무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노력하지 않으면 영광이 없다’는 뜻이다. 가훈은 “가난하더라도 정의롭게 살자”다.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기 시작한 것은 둘 다 국회의원이던 15대 국회시절로 전해진다. 이명박 당시 의원이 경부운하 건설을 제안한 것에 공감해 대통령 출마를 권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등학교 1학년 때 4·19가 일어나자 교장 전근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영양경찰서 유치장에서 20여 일을 보냈다.
어릴 적 꿈은 농촌지도자였다. 영양고등학교 재학시절 학교 농촌계몽 단장을 지냈다. 당시 농촌지역에 청소년 사회교육운동인 4H클럽이 유행했는데 고등학생 때 경북 4H 연합회장을 맡았다. 당시 심훈, 김동인, 황순원 같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고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박동혁 같은 농촌계몽운동가를 꿈꾸었다.
학창시절 적성과 흥미가 '정치'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내 변론반과 웅변반에서 활동하며 군내 웅변대회에서 특상을 수상하는 등 학창시절부터 정치에 대한 소질을 드러냈다.
어린시절 직접 지은 호가 ‘파란만장’의 ‘파란’이다.
그뒤 1980년대 초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옆방에 있던 홍남순 변호사가 ‘남인의 맥을 잇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남산(南山)’이라는 호를 붙여줬다.
1977년 ‘상황’이라는 극단 만들어서 연출도 하고 잡지에 ‘이민’이라는 가명으로 평론도 실었다. [비즈니스포스트 조은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