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 |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단통법)이 공공의 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단통법이 마련된 명분은 휴대폰시장의 과열을 막고 가계의 통신비 부담을 줄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통법은 과녁을 벗어나고 말았다. 휴대폰시장의 과열은 막았지만 보조금 액수가 턱없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통신비 부담만 높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단통법에 대한 불만은 곧바로 판매현장으로 이어졌다. 고객의 발길이 뚝 끊겨 판매율이 단통법 시행 전과 비교할 때 5분의 1수준까지 떨어졌다.
정부도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은 이동통신사와 단말기제조사에 압력을 넣었다. 보조금을 올리고 단말기 가격을 낮추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언발에 오줌누기다. 이동통신사들은 8일 보조금을 약간 올리는 선에서 다시 고시했다.
단통법은 왜 애초의 취지와 달리 “누구를 위한 단통법인가”라는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을까?
◆ 단통법은 왜 나왔나
2012년 대선 당시 화두는 ‘반값’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공약집 제목도 ‘국민 걱정 반으로 줄이기’였다. 여기에 가계의 통신비를 반값으로 줄이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단통법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박 대통령이 내세운 통신비 부담완화와 반값 통신비 대선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법안 논의가 시작됐다.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미래창조과학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대통령의 의지를 담아 법안을 추진했다. 지난해 5월 조해진 새누리당 의원을 대표로 국회의원 10인이 발의했다.
보조금 차별 금지와 보조금 공시 의무, 고가 요금제 강제 제한, 보조금 또는 요금할인 선택 가능, 제조사 장려금 조사 및 관련 자료제출 의무화 등이 단통법의 주요 뼈대였다.
취지 자체는 좋았다. 이동통신시장의 혼탁한 과열 경쟁을 막아 건전한 유통질서를 세울 수 있는 대안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법안이 나오기까지 산통이 너무 길었다. 단통법은 지난해 12월 임시국회에 상정됐으나 해가 바뀌어 올 2월까지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당시 방통법 개정안을 두고 여야가 맞서는 바람에 국회처리가 거듭 무산됐다.
박 대통령은 지난 2월17일 “스마트폰 가격이 시장과 장소에 따라 몇 배씩 차이가 나고 최근에 보도된 것처럼 스마트폰을 싸게 사려고 추운 새벽에 수백 미터 줄까지 서는 일이 계속돼선 안 된다"며 단통법의 국회 통과를 압박하기도 했다.
단통법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발의되고 1년 가량이 지난 4월 초였다.
|
|
|
▲ 8일 오후 소비자단체 컨슈머워치가 연 '단통법 폐지를 위한 소비자 1만명 서명운동' 에 시민들이 단통법 폐지에 찬성하는 서명을 하고 있다.<뉴시스> |
◆ 삼성전자 "장려금 공개는 영업비밀"
법안통과가 끝이 아니었다. 주무부서인 미래창조과학부와 방송통신위원회는 법안이 통과되자마자 10월1일 시행을 목표로 세부 고시안을 마련하기 위한 실무 준비에 들어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제조사와 이통사 등 업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린 것이다. 그 핵심은 휴대폰 구입 때 지급되는 보조금 공개였다.
보조금은 이통사가 직접 부담하는 부담금과 제조사가 이통사에 주는 장려금으로 이뤄져 있다. 보조금을 공개하면 소비자 입장에서 구입하는 단말기와 요금제도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 가격인하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업계는 이를 공개하기를 꺼렸다. 요금제도에 얼마나 가격 거품이 끼었는지, 단말기 제조사가 폭리를 얼마나 취하는지가 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보조금 공개를 가장 반대한 업체는 삼성전자였다. 삼성전자는 장려금 지급은 영업비밀이라며 이를 공개할 경우 글로벌시장에서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란 주장을 폈다.
이통사들은 보조금 공개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단통법 시행으로 어느 통신사나 지급할 보조금 액수가 같아지기 때문이다.
◆ 시행 1주일 앞두고 '분리공시' 도입 무산
단통법은 시행 1주일 가량을 앞둔 시점까지도 진통을 거듭하며 순탄치 못한 운명을 예고했다.
방통위는 지난 8월 지원금 공시 관련 세부기준 고시안 2조3항에서 이통사가 지급하는 지원금을 공시할 때 이통사 직접 부담과 제조사 장려금을 이용자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보조금 분리공시' 조항을 넣었다.
하지만 국무총리실 산하 규제개혁위원회는 지난달 24일 단말기 유통법 하위 세부규정인 고시안을 심사하면서 방통위가 마련한 보조금 분리공시 조항에 대해 삭제권고 조치를 결정했다.
휴대폰 보조금 분리공시는 단통법이 그나마 법 취지를 살릴 수 있는 핵심사안이었다. 이통사의 지원금과 제조사의 판매장려금을 소비자가 구분할 수 있어야 법안 취지대로 투명한 보조금 집행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규개위는 분리공시 도입을 반대해온 삼성전자의 손을 들어줬다. 분리공시 도입이 무산된 데 최경환 부총리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와 기재부는 기업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삼성전자의 논리를 수용했다. 최 부총리도 규개위 심사에 앞서 분리공시 도입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
|
|
▲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
◆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애초 단말기 제조사 가운데 삼성전자만을 제외하고 LG전자와 팬택도 찬성으로 돌아섰다.
새정치민주연합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위원들은 지난달 24일 성명을 내고 “단통법이 반쪽 시행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됐다”면서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민들의 과도한 통신비 절감보다 삼성전자의 영업비밀 보호에 앞장섰다”며 재논의를 요구했다.
우상호 의원은 “고시안 확정을 앞두고 기재부가 삼성전자 입장을 대변하면서 고시안이 흔들리고 있다”며 “규개위에서 분리공시를 반드시 포함해 단말기 유통법의 취지를 제대로 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도 성명에서 “단통법의 핵심은 보조금 분리공시를 통한 단말기 가격 거품 제거에 있다”면서 “삼성전자와 규개위가 정부나 국민보다 위에 있는가”라고 비판했다.
단통법은 분리공시가 빠지면서 ‘기형아’로 세상에 나왔다. 표면적으로 이동통신 시장질서가 잡힌 듯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싸게 파는 것이 불법이 돼버렸다.
휴대폰 판매점을 찾았던 한 시민은 “그동안 발품을 팔면 좋은 제품을 싸게 살 수라도 있었지만 이제 다 같이 비싼 돈을 주고 사야하는 처지가 됐다”며 “정부가 전 국민을 호갱으로 만든 것 아니냐”고 비난했다.
전문가들은 단통법이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나서 시장 활성화를 저해했다는 것이다.
한 법률전문가는 “국민을 위한다지만 이통사들에게 일정 금액 이상으로 더 싸게 팔지 말라고 강제한 것으로 이해된다”면서 “단통법이 정부의 성공적인 시장개입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최양희 '공급자보다 수요자가 먼저'라고 했지만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은 지난 7월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정부의 모든 통신정책은 공급자보다 수요자 중심으로 대전환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래부 장관이 되면 가계의 통신비 경감을 목표로 모든 정책과 제도를 정비하겠다”는 다짐도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최 장관은 “세계적 경쟁력을 보유한 단말기 제조업체가 단통법으로 불이익을 받는다면 국가경제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덧붙였다.
최 장관의 이날 발언은 소비자 이익과 업계 이익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그러나 단통법 시행 결과는 최 장관의 뜻과 완전히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소비자 이익은 제쳐두고 업계의 이익만 봐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특히 분리공시가 빠진 채로 단통법 시행을 서둘러 밀어붙인 미래창조과학부에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단통법 시행 전 요금제에 관계없이 27만 원까지 보조금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달부터 7만원 이상 고가요금제 가입자만 30만 원까지 보조금을 받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마저도 이동통신사들이 축소에 나서면서 보조금은 최대 18만 원까지로 한정된 상태다. 저가 요금제 가입자는 보조금을 4~5만 원밖에 받을 수 없다.
단통법 시행 후 시장은 오히려 얼어붙었다. 소비자뿐 아니라 판매대리점들까지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애초 법안을 발의했던 새누리당 의원들은 ‘을사5적’에 빗대 ‘갑오10적’이란 비난을 듣고 있다.
|
|
|
▲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1일 단통법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뉴시스> |
◆ 최성준 '시간두고 지켜보자’ 무대책
최 장관은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는 지난 6일 유통현장을 방문해 성난 민심을 달랠 계획을 세웠다가 일정을 전격 취소했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함께 주무부처인 방통위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최성준 방통위원장은 최양희 장관보다 발빠른 대응에 나섰다.
최 위원장은 도입 첫날인 1일 “이통사들이 보조금을 올려야 한다”고 발언한 데 이어 7일 긴급 기자간담회까지 열어 “해외와 비교할 때 국내 휴대전화 출고가가 높은 편”이라며 이통사와 제조사를 압박했다.
그렇지만 최 위원장은 현재 시행초기인 만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적 입장을 나타냈다. 이통사가 지원금을 조정하든지 제조사가 출고가를 조정할 것이라는 얘기다.
최 위원장은 “보조금 상한을 바꾼다고 보조금 변화가 있지 않을 것”이라며 “보조금 상한을 조정해 보조금 변화를 유도할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 단통법 '민심'에 정치권 촉각
정치권도 단통법 민심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원장은 필요하다면 단통법을 보완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주 의원은 지난 6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많은 소비자들에게 통신요금 인하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필요하다면 후속 입법을 고려하며 철저하게 모니터링하겠다"고 밝혔다.
전병헌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보조금을 일률적으로 규정하면 단말기 제조사는 물론 이동통신사간의 경쟁을 제한해 오히려 소비자 혜택이 줄 수 있다”며 “통신서비스가 잘 갖춰진 국가 가운데 보조금을 규제하는 나라는 없다”고 지적했다.
미래창조과학부와 방송통신위원회는 오는 13일부터 국정감사를 받는다. 단통법을 놓고 일대 격론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