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과 힙의 성지, 아날로그 감성 끝판왕. 회색빛 공장 사이 색다른 멋을 느낄 수 있는 ‘한국의 브루클린’ 성수동.” 2019년 9월24일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온더블록' 36회는 서울 성수동을 이렇게 소개했다. < tvN >
7년 전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온더블럭’ 36화는 서울 성수동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했다.
성수동을 돌아다녀보면 정말 이보다 잘 어울리는 별명이 있을까 싶었다.
수제화부터 시작해 인쇄, 금속가공, 기계, 자동차 정비 등 각종 소규모 제조업체뿐 아니라 공장과 창고가 혼재된 특유의 경관은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다소 쇠퇴한 공업지대로 인식됐던 덕분에 임대료는 저렴했고, 공장과 창고, 정비소나 기계공업소와 같은 독특한 공간을 새롭게 활용하려는 이들이 모이면서 풍경은 더 다채로워졌다.
몇몇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 고민한 뒤 구슬땀을 흘려가며 버려진 공장과 창고를 개조한 결과 특색 있는 카페와 음식점, 문화공간이 탄생했다. 성수역에서 뚝섬역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고가철도는 그들의 노력에 낭만을 더했다.
성수동이 ‘한국의 브루클린’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각의 개성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랬던 성수동이 아주 빠르게 변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는지도 모른다.
최근 성수동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기로 유명한 골목에 자리 잡고 있던 한 오래된 우동집이 갑자기 문을 닫았다. 예고 없는 폐업이었다.
사장에게 물어볼 여유조차 없이 가게 문을 닫았으니 앞으로도 이유는 영영 모를 것이다. 다만 이 우동집과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열었던 인근 편의점 점주가 치솟은 임대료를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워 자신 역시 조만간 가게를 접는다 하니 결국 돈이 문제였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회사가 삼성동을 떠나 성수동에 자리를 잡았던 1년 반 전과 비교해도 지금의 풍경은 매우 낯설다. 우선 밥집이 잘 안 보인다.
성수동을 대표하는 길 중 하나는 바로 경동초등학교부터 시작해서 건대양꼬치골목으로 이어지는 연무장길이다. 이 연무장길을 반으로 자르면 건대쪽에 붙은 동연무장길, 뚝섬쪽에 붙은 서연무장길로 나뉘는데 서연무장길 메인 대로에 남은 밥집은 이제 손에 꼽을 정도다.
음식점과 카페가 밀려난 공간에는 패션과 뷰티 브랜드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성수동 전체가 거대한 무신사, 혹은 올리브영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패션과 뷰티 브랜드가 골목마다 가득하다.
최근에는 가챠(뽑기)샵과 대형 K드러그스토어들도 성수동 진출을 재촉하고 있다.
음식점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는 만 원짜리 밥을 팔아 몇 천 원 남기는 수준으로는 가파르게 오르는 임대료를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패션과 뷰티 브랜드들은 다르다. 옷 한두 벌만 해도 10만 원이다. 화장품이나 향수를 몇 개만 골라도 몇만 원은 우습게 넘어간다. 객단가의 사이즈가 다르다보니 이들은 금세 성수동의 새로운 대세가 됐다.
대기업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소식에 이들은 1~2주에 수억 원을 내면서까지 단기 팝업스토어를 끊임없이 운영했다. 글로벌 브랜드까지 숟가락을 얹는다. 전 세계 최초의 각 브랜드 플래그십 스토어가 성수동 한복판에 여러개나 된다.
성수동이 어느새부터 모여드는 사람 만큼이나 팝업스토어 설치와 철거를 반복하는 공사소리로 시끄러워진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는 '공사하는 건물'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서울시 상권분석서비스에 따르면 2분기 서울 지하철 2호선 성수역 인근 상권의 신생기업 생존율(3년)은 57.01%다. 2025년 2분기보다 8.87%포인트, 1분기보다 6.97%포인트 떨어졌다.
동연무장길 상권도 마찬가지다. 이 상권의 신생기업 생존율은 55.88%로 1년 전보다 7.76%포인트, 직전 분기보다 0.28%포인트 하락했다.
몰려드는 사람을 보고 따라 들어오려는 가게도 많지만, 그만큼 버티기 가혹한 환경 탓에 3년을 채 못 버티고 나가는 이들이 10명 중 4~5명은 된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성수동 상권들을 분석한 자료에서 대부분 공통적으로 “전분기 대비 개업 업소 수와 폐업 수가 모두 증가하고 있다”며 “입지 선정에 유의하라”고 밝히고 있다.
그나마 혹독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사람들이 돈이라도 더 벌어가면 좋지만 그것 역시 아닌 것 같다.
성수동카페거리의 점포당 월평균 매출은 2분기 기준으로 2964만 원으로 집계됐다. 1년 전보다 225만 원 빠졌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세간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무장길을 돌아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국인 관광객이다. 한국의 브루클린이라며 성수동에 모여들었던 MZ세대 얘기는 이미 먼 과거 얘기가 돼버렸다.
이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성수동을 향한 내국인들의 애정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빠른 젠트리피케이션에 학을 떼며 혀를 끌끌 차는 비아냥만 가득하다.
“매력이 점점 없어지는 동네” “성수가 각광받던 이유들이 사라지는 동네” “밥집도 없고 팝업만 있고 임대나 공사중이라는 말만 즐비한 도시”라는 말이 차고 넘친다.
실제로 성수동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수는 2023년 하루 평균 3만 명에서 2026년 6만2천여 명으로 2배 넘게 뛰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성수동 지역 거주민과 직장인, 관광객을 포함한 내국인 생활인구 수는 월평균 226만 명에서 221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여러 회사들이 성수동으로 본사를 옮긴 덕분에 직장인 인구가 늘어났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내국인 관광객의 수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분석이 심심찮게 나오는 이유다.
사실 특색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이면 특색이 사라지는 게 세상 이치인지도 모른다. 가로수길도 겪었고 경리단길도 겪은 일이다.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브루클린’이라 불리며 삶과 문화가 켜켜이 쌓였던 그 유별난 매력이 어쩌다 이렇게 가볍고 무신경하게 소모됐는지 그저 씁쓸할 뿐이다. 그저 ‘성수유감(聖水遺憾)’일 뿐이다. 남희헌 유통&4차산업부장
▲ 서울 성수동을 대표하는 골목은 뚝섬역부터 시작해 건대양꼬치골목까지 이어지는 1.2km 남짓한 연무장길이다. 과거에는 수제화, 피혁, 인쇄, 금속가공 등 각종 소규모 제조업체 공장과 특색있는 카페, 음식점으로 붐볐지만 최근 1~2년 사이 풍경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