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김재천 전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
김재천 전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


김재천은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을 지냈다.

한국은행에서 30년 넘게 근무했으며 G20재무차관·중앙은행부총재 회의 공동의장을 맡는 등 금융분야와 공직 모두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다.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35년 간 한국은행에 재직하면서 뉴욕사무소 부국장, 금융시장국장, 조사국장, 부총재보 등을 역임했다.

한국은행 부총재보로 중앙은행 생활을 끝낸 뒤 한국주택금융공사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종대 당시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이 사의를 표명하자 사장을 대행하다 사장으로 선임됐다.

2017년 12월 임기를 마쳤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본 직원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하다고 알려졌다.

한국은행 금융시장국장에 올라 언론에 처음 얼굴을 드러냈을 때 한 매체는 그를 보고 “정확하고 반듯한 독일 병정을 닮았다”고 평했다.

한국은행 사상 최장기간(4년) 조사국장을 지냈다.

2004년 3월 동기는 물론 선배들까지 다 제치고 금융시장국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 한국은행 관계자는 “정부, 공기업, 시중은행 가운데 아마 한국은행의 간부진이 가장 고령일 것”이라며 “한국은행의 연공서열 관행이 깨지는 신호탄인 듯싶다”고 평가했다. 김재천이 2009년 부총재보에 임명됐을 때도 한국은행이 한층 젊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은행 부총재보로 일할 당시 인상적인 인물로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밀턴 프리드먼 전 시카고대학교 교수를 뽑았다. 그는 스스로를 “나는 볼커와 프리드먼의 중간점에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볼커는 중앙은행 안정기능의 신봉자, 프리드먼은 자유주의 경제원칙의 신봉자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에 오른 뒤 공사를 발전시켰다는 평을 듣는다. 한국은행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경제전문가답게 주택저당증권(MBS) 발행에 힘써 시장의 파이를 키웠다. 또한 직원들의 역량 강화에 힘쓰는 한편 연구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해 주택금융연구소를 주택금융연구원으로 키웠다.

한국주택금융공사가 부산에 안착한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주택금융공사는 부산시, 부산은행 등 부산지역단체들과 시민복지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는 등 지속적으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2016년 9월 한 매체의 조사에 따르면 부산으로 이전한 4개 공공기관의 단체장 가운데 김재천만 부산으로 주소를 이전했다.

소신있게 업무를 추진한다는 평가도 받는다.

2011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총재라는 이름은 민주화 사회에 맞지 않아 바꾸는 게 좋겠다”는 말을 했다. 이에 기획재정부는 총재란 명칭이 청산해야 할 일제 강점기의 잔재라며 한국은행이 61년 동안 써온 총재 명칭을 ‘한국은행장’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김재천은 우리나라 모든 지폐에 ‘한국은행 총재’라고 써 있다며 그것을 ‘한국은행장’으로 바꾸려면 수천억 원의 비용이 들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신의를 강조하며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도 지니고 있다.

2006년 한국은행에서 18년 동안 영문자료 작성을 담당했던 존 발슨(John R. Balson)이 정년퇴임 했다. 한국은행은 그의 능력을 인정해 그를 용역계약직으로 다시 채용했다. 당시 김재천은 “미스터 발슨은 한국은행에 필요한 인재”라며 “그가 한국은행에서 더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고 한국은행은 그의 청을 들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4월 성세환 BNK금융지주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주택금융공사와 부산은행 직원들의 미팅을 제안했다. 부산의 인재가 수도권으로 일하러 가는 것이 안타까우니 공사의 젊은이들과 은행의 청춘들이 만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성 회장 역시 그 뜻에 동의했지만 첫 커플이 탄생할 경우 김재천이 주례를 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한국주택금융공사와 부산은행 청춘들 사이의 10대10 미팅은 그렇게 성사됐고 12월 한 연인이 결혼하며 김재천은 난생 처음으로 결혼식 주례에 섰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7년 한국은행에 들어갔다. 이후 2012년까지 35년 동안 한국은행에서 일했다.

1985년 조사제1부 조사역, 1997년 문서부 비서실 부부장, 1998년 정책기획부 부부장을 거쳤다.

1999년 정책기획국 정책총괄팀장 겸 수석조사역이 됐다.

2002년 뉴욕사무소 부국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2004년 금융시장국장, 2005년 조사국장이 됐다.

2009년 부총재보로 승진했다.

2012년 6월 한국은행을 떠나 한국주택금융공사 부사장에 올랐다.

2014년 10월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에 선임됐다. 2017년 12월 임기를 마쳤다.

◆ 학력

1972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7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 가족관계

부인 심상죽씨 사이에 딸 셋을 두고 있다.

◆ 상훈

◆ 상훈

어록


“준비된 자에게 위기란 없다는 말이 있다. ‘성공한 기업의 역사는 위기극복의 역사’입니다. 위기극복 역량이 곧 조직의 실력일 것이다.” (2016/12/30, 신년사에서)

“소통과 정보 교류의 효과는 컸다. 무작정 반대하던 직원들의 시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성과연봉제에 대한 직원 이해도가 한 달 사이에 90% 이상 높아졌다. 자연스럽게 제도 도입을 위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노조는 조합원들과의 의견 조율을 거쳐 성과연봉제 도입을 위한 노사 간 합의로 화답했다.” (2016/10/17, 매일경제에 기고한 ‘노사소통으로 열매맺은 성과연봉제’에서)

“법과 원칙을 준수하고 정당한 조합 활동을 존중하며 직원들이 일하기 좋은 일터 환경을 조성하는데 노력하겠다.” (2016/10/10, 한국주택금융공사 노사공동 화합선언식에서)

“근황을 묻는 내 질문에 공사 직원들은 종종 ‘이제 부산사람 다 됐심니더!’라고 답하곤 한다. 부산으로 이사 온 지 한 달도 안 돼 부산말씨를 그대로 따라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이제는 부산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공사가 부산으로 이전한 지 어느덧 1년 반이 지났다. 공사는 부산에 잠시 여행 왔다 떠나가는 이방인이 아니다.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부산과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있다.” (2016/08/10, 부산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주택금융을 총괄하는 정책당국과 실무자, 관련 연구자들에게 유용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해외기관과 교류할 때도 국내 주택금융시장 노하우 전수를 위한 유용한 참고자료로 쓰이길 기대한다.” (2016/07/28, ‘한국의 주택금융 70년’의 발간사에서)

“상반기에 50명이 신입사원으로 들어왔는데 수시로 실무시험을 보고 있다. 직원들에게 미안하지만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2016/07,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어린이부터 청년까지 모두 한 평생 행복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누군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해야 할 시기를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은퇴 이후의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2016/05/13,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예전에 부모님을 화장(火葬) 하면 상놈이라 손가락질 받았지만 이젠 화장 문화가 대세가 됐다. 주택연금도 어느 순간 인식이 바뀌면 노후 대책의 대세가 될 거라 확신한다. 부모는 수입이 없어도 자식을 위해 집을 껴안고 자식은 그런 부모의 생활비를 보전하기 위해 고통 받는 모순은 이제 끝내야 한다.” (2016/04/19,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과거와 같은 호황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올해와 내년쯤이 집 사기 좋을 때가 아닌가 싶다. 금리도 낮은 편이고 주택가격도 크게 하락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2015/03/05, 주택금융공사 창립 1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공직자로서 사명감과 철저한 자기관리, 높은 전문성, 유연한 사고와 동료직원에 대해 배려하는 자세를 갖고 조직 내에서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내는 직원들이 우대받는 조직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2015년 신년사에서)

“약 35년 간 한국은행에서 일하는 동안 금융과 경제 전반에서 많은 경험과 식견을 얻었다. 한국주택금융공사에서 일하며 공사가 처한 환경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다.” (2014/12,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주택금융공사 사장으로 선임된 이유를 묻자)

“국내 임대시장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전세 시장이 빠르게 반전세 시장, 월세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의 독특한 전세제도는 많이 줄고 미국처럼 월세시장으로 옮겨갈 것이다.” (2014/11/11,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사장 직무대행을 이토록 오래할 줄 몰랐다. 2개월 정도라 생각했는데 9개월 이상 직무대행을 했다. 그래도 막상 사장이 되니 책임감이 더욱 무겁다.” (2014/10,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으로 선정된 소감을 묻자)

“금융을 비유할 때 우리 몸의 혈액이라고 합니다. 혈액이 잘 돌아야 우리 몸 곳곳에 산소가 공급돼 몸이 건강해진다. 이 혈액을 몸 구석구석까지 공급해주는 심장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중앙은행이다.” (2010/06/25, 한국은행 부총재보 당시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저는 기본적으로 시장주의자입니다. 하지만 중앙은행 사람으로서 통화정책으로도 뭔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단기적으로 통화정책은 신축성을 유지하되 물가냐 경기냐 선택 기로에서 중앙은행은 물가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9/04/28, 한국은행 부총재보 당시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정책은 사실 이미 다 개발돼 있다. 어느 상황에서 어떤 정책을 쓸지가 중요한데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이 있어야 정확한 판단이 가능하다. 한국은행 조사국장으로 4년을 일했습니다. 같은 일을 계속하다 보면 컴퓨터나 경제전망 모델로는 계량화할 수 없는 감이 생기는 것 같다.” (2009/04/28, 한국은행 부총재보 당시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수출 결정요인은 몇 가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요인은 해외수요가 얼마큼 되느냐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가격요인이다. 바꿔 말하면 환율변화에 따른 가격변화다.” (2008/07/01, 한국은행 조사국장 당시 ‘2008년 하반기 경제전망’ 발표 뒤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상황에서 4%대 중반의 경제성장률은 괜찮은 수준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수준에 만족할 것이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2006/12/05, 한국은행 조사국장 당시 ‘2007년 경제전망’ 발표 뒤 기자간담회에서)

“노동력 부족도 문제지만 노동의 질이 떨어지는 게 더 큰 문제다.” (2005/08/29, 한국은행 조사국장 당시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경제 전망치와 실제치의 괴리를 줄이는 건 어려운 문제다. 올바른 정보를 얼마큼 정확한 타이밍에 얻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직원들이 경제를 바라보는 거시적 안목을 기르는 훈련을 꾸준히 한다면 통계상 오류는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거라 본다.” (2005/03/14, 한국은행 조사국장에 오른 뒤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 평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본 직원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하다고 알려졌다.

한국은행 금융시장국장에 올라 언론에 처음 얼굴을 드러냈을 때 한 매체는 그를 보고 “정확하고 반듯한 독일 병정을 닮았다”고 평했다.

한국은행 사상 최장기간(4년) 조사국장을 지냈다.

2004년 3월 동기는 물론 선배들까지 다 제치고 금융시장국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 한국은행 관계자는 “정부, 공기업, 시중은행 가운데 아마 한국은행의 간부진이 가장 고령일 것”이라며 “한국은행의 연공서열 관행이 깨지는 신호탄인 듯싶다”고 평가했다. 김재천이 2009년 부총재보에 임명됐을 때도 한국은행이 한층 젊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은행 부총재보로 일할 당시 인상적인 인물로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밀턴 프리드먼 전 시카고대학교 교수를 뽑았다. 그는 스스로를 “나는 볼커와 프리드먼의 중간점에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볼커는 중앙은행 안정기능의 신봉자, 프리드먼은 자유주의 경제원칙의 신봉자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에 오른 뒤 공사를 발전시켰다는 평을 듣는다. 한국은행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경제전문가답게 주택저당증권(MBS) 발행에 힘써 시장의 파이를 키웠다. 또한 직원들의 역량 강화에 힘쓰는 한편 연구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해 주택금융연구소를 주택금융연구원으로 키웠다.

한국주택금융공사가 부산에 안착한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주택금융공사는 부산시, 부산은행 등 부산지역단체들과 시민복지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는 등 지속적으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2016년 9월 한 매체의 조사에 따르면 부산으로 이전한 4개 공공기관의 단체장 가운데 김재천만 부산으로 주소를 이전했다.

소신있게 업무를 추진한다는 평가도 받는다.

2011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총재라는 이름은 민주화 사회에 맞지 않아 바꾸는 게 좋겠다”는 말을 했다. 이에 기획재정부는 총재란 명칭이 청산해야 할 일제 강점기의 잔재라며 한국은행이 61년 동안 써온 총재 명칭을 ‘한국은행장’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김재천은 우리나라 모든 지폐에 ‘한국은행 총재’라고 써 있다며 그것을 ‘한국은행장’으로 바꾸려면 수천억 원의 비용이 들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신의를 강조하며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도 지니고 있다.

2006년 한국은행에서 18년 동안 영문자료 작성을 담당했던 존 발슨(John R. Balson)이 정년퇴임 했다. 한국은행은 그의 능력을 인정해 그를 용역계약직으로 다시 채용했다. 당시 김재천은 “미스터 발슨은 한국은행에 필요한 인재”라며 “그가 한국은행에서 더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고 한국은행은 그의 청을 들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4월 성세환 BNK금융지주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주택금융공사와 부산은행 직원들의 미팅을 제안했다. 부산의 인재가 수도권으로 일하러 가는 것이 안타까우니 공사의 젊은이들과 은행의 청춘들이 만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성 회장 역시 그 뜻에 동의했지만 첫 커플이 탄생할 경우 김재천이 주례를 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한국주택금융공사와 부산은행 청춘들 사이의 10대10 미팅은 그렇게 성사됐고 12월 한 연인이 결혼하며 김재천은 난생 처음으로 결혼식 주례에 섰다.

◆ 기타

취미로 산에 오르며 매일 저녁 40분 정도 빠르게 걷는 운동을 한다고 한다.

2009년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음주는 즐기지만 가무는 약하다”며 ”소주는 1병 반, 폭탄주는 10잔까지 문제없다”고 밝혔다. 18번은 ‘옥경이’인데 "그 노래가 좋아서가 아니라 부를 수 있는 노래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2010년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가 ‘한은 수석 이코노미스트’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경제전문가 영입에 열을 올렸다. 김 전 총재는 “경제학 박사학위 보유자로 영어실력도 뛰어나고 해외 근무경험도 있으며 한국은행의 조직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영입조건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는데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김재천의 이름이 조심스럽게 오르내렸다.

하지만 한국은행 최초 수석 이코노미스트의 영광은 김준일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조사국 부과장에게 돌아갔다.

2011년 10월 우리나라는 일본, 중국과 잇따라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 당시 협상은 극도의 보안 속에서 진행됐는데 김재천이 비밀리에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협상을 전담했다. 그는 일본과 중국을 방문할 때 현지 대사관에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2014년 5월 박원식 한국은행 부총재가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후임으로 한국주택금융공사 부사장을 맡고 있던 그가 하마평에 올랐다.

2016년 7월 한국주택금융공사는 한국능률협회컨설팅 주관으로 실시된 ‘한국산업의 서비스품질지수(KSQI)’ 고객접점 부문 평가조사에서 ‘공공서비스산업 1위’ 기관으로 선정됐다.

2016년 7월 한국주택금융공사는 1945년부터 2015년까지 국내 주택금융의 70년 역사를 담은 ‘한국의 주택금융 70년’을 발간했다.

2015년 3월 공직자윤리위원회에 따르면 김재천은 2014년 말 42억4408만 원을 보유했다. 그러나 배우자 명의로 된 재산이 절반을 넘었다. 그는 소유하는 차로 소형차인 모닝을 신고했다.

2016년 3월 공직자윤리위원회에 따르면 김재천은 2015년 말 43억9549만원을 보유했다. 그의 예금이 2억 가량 늘며 지난해보다 1억5140만 원 늘었다. 배우자 명의의 재산은 대부분 그대로였다. 그가 보유한 차량 역시 2010년식 모닝 그대로였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에 따르면 주택금융공사에서 보수로 2억5674만 원을 받았다. 보수는 기본급 1억9152만 원, 경영평가성과급 6521만 원으로 구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