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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이 지난 6월26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열린 제1차 제재심의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뉴시스> |
KB금융의 상처가 깊어지고 있다.
KB금융그룹은 지주사 회장과 주력회사인 은행장이 동시에 중징계를 받고 은행장이 전격 사임하는 금융권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다.
이건호 국민은행장은 최수현 금감원장이 중징계를 결정하고 1시간 뒤 사임했다. 이 행장은 지난해 7월 취임한지 1년2개월 만에 물러났다.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은 사임을 거부했다. 하지만 사임은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KB금융은 경영권 공백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KB금융은 임 회장과 이 행장의 지리한 내분사태 속에서 끊임없이 추락했다. 리딩뱅크 KB금융의 명성은 초라해졌다.
◆ 물러나는 이건호, 버티는 임영록
이건호 행장은 4일 “이 시간부로 사임한다”고 밝혔다. 이 행장은 “은행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며 “내 행동에 대한 판단은 감독당국에서 적절하게 판단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은 이 행장이 사임함에 따라 당분간 박지우 부행장 대행체제로 갈 것으로 보인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이 행장이 사임함에 따라 직무대행체제로 가게 된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장은 KB금융지주 회장과 사외이사 2명으로 이뤄진 계열사 대표이사 후보추천위원회가 선임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임 회장의 거취 역시 불투명하다.
임 회장은 이날 KB금융지주 명의로 보도자료를 내 중징계 결정에도 사퇴할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그는 “그 동안 더 큰 내부분란을 방지하기 위해 대응을 자제했고 과거의 예로 봐서 제재심의위의 결과가 충분히 최종결정에 반영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우려하던 결과가 나와 안타깝다”고 밝혔다.
임 회장은 “앞으로 KB의 명예회복을 위해 적절한 절차를 통해서 주전산기 교체 관련 진실, 즉 부당압력 행사 및 인사개입 등에 대한 오해가 명확히 규명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임 회장은 “KB의 경영공백을 메우기 위한 비상경영체제를 가동하고, 조직 안정화와 경영 정상화를 위해 전 임직원 및 이사회와 긴밀히 협력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덧붙였다.
임 회장의 임기는 내년 3월까지다. 임 회장은 애초 중징계를 받을 경우에 대비해 행정심판 소송을 낼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데다 소송기간이 2~3년가량 걸릴 것으로 예상돼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 쪽으로 방침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임 회장은 일단 최 금감원장이 내린 중징계에 대해 금융위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지켜볼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등 구명활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임 회장은 '적절한 조처'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권리구제 절차가 있다"고 밝혔다.
이는 금융위에서 중징계를 확정해도 이의를 신청하겠다는 뜻을 비춘 것이다. 임 회장이 이의신청을 하면 절차에 따라 재심을 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임 회장이 시간을 벌며 사임압박을 버텨낼 수 있을지 미지수다. 최 금감원장의 중징계 결정에는 최경환 부총리 등의 뜻도 반영됐다는 말도 나온다. 따라서 임 회장의 사임도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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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왼쪽)과 이건호 국민은행장(오른쪽)이 지난달 22일 경기도 가평 백련사에서 열린 '템플스테이' 행사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
◆ 조직의 새판짜기 어떻게 될까
KB금융 사태의 두 주역 중 한 사람인 이 행장이 물러나면서 임 회장도 거취에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됐다.
KB금융은 앞으로 조직의 새판을 짜기까지 적잖은 진통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또 내부 분위기를 추슬러 조직을 안정시키는 일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하다.
임 회장이 사임하지 않고 버티기로 작정한 것도 경영공백을 최소화하려는 명분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KB금융의 경영공백이 그 만큼 심각한 까닭이다.
두 수뇌부가 금융당국에 불려다니기 시작하면서 신사업 추진은 물론 주요계열사 인사조차 줄줄이 미뤄졌다. 직원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상황에 패닉상태에 빠졌다.
KB금융은 앞으로 이사회 중심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당장 KB금융지주 이사회 이경재 의장과 국민은행 김중웅 의장을 만나 경영정상화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 금감원장은 중징계를 발표하기 전에 두 의장을 만나 이사회가 KB사태의 조기수습을 위해 고객과 시장이 납득할만한 방안을 마련해 시행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 금감원장은 "경영진간 갈등과 조직내 반목을 그냥 덮을 것이 아니라 그 근본원인을 발본하고 철저한 인적·조직 쇄신을 통해 경영의 독단과 공백을 동시에 해소해 달라고도 당부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KB금융에 대한 새판짜기를 해달라는 요구나 마찬가지다. 최 금감원장이 이런 요구를 한 만큼 KB금융지주 이사회는 회장 선출구조 등을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부의 의중도 강하게 전달될 것으로 보인다. KB금융 안팎에서 이번 기회에 KB금융에 낙하산이 이뤄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요구가 일고 있다. 하지만 그런 희망대로 될지 미지수다.
금융권 관계자는 "KB금융 이사진들이 공영공백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차기수장을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리딩뱅크’ KB 몰락하나
KB금융은 지난 몇달 동안 혼미에 빠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룹 내 최고수장들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 되면서 내부기강이 크게 흔들렸다. 직원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새 사업 추진도 사실상 모두 중단됐고 LIG손해보험 인수 등 추진중이던 사업에서도 속도를 내지 못했다.
KB금융의 실적도 올 상반기 ‘리딩뱅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주저앉았다. 국민은행은 올 상반기 5462억 원의 순이익을 내는 데 그쳤다.
이는 올해 상반기 5267억 원의 순이익을 낸 우리은행과 함께 은행권에서 가장 저조한 실적이다. 신한은행의 순이익 8421억 원과 3천억 원 가까이 차이가 나는 것은 물론이고 총자산 규모가 훨씬 적은 기업은행의 순이익 5778억 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국민은행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 연속 2조 원 넘는 순이익을 넘겼던 시절을 생각하면 가히 ‘리딩뱅크의 몰락’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순이익 규모뿐 아니라 총대출·총수신 시장점유율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지난 6월 말 국민은행의 총대출 시장 점유율은 24.5%로 지난해 말까지 그나마 유지해 오던 25.6% 수준에서도 더 떨어졌다.
금융권 관계자는 “경영공백 사태가 길어지면서 국민은행의 영업력과 KB금융지주의 실적이 곤두박질치고 있다”며 “KB금융이 단기간에 휴유증을 극복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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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호 KB국민은행장이 지난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본점에서 국민은행 주전산시스템 교체 논란에 대한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고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
◆ KB금융 CEO 잔혹사, 도대체 왜?
KB금융은 2008년 금융지주 출범 이후 CEO들의 잔혹사가 6년째 이어지고 있다. 특히 금융감독원과 악연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
2004년 금융당국의 문책경고를 받았던 김정태 전 행장을 시작으로 지주사 전환 이후 초대 회장에 오른 황영기 전 회장도 직무정지 징계를 받아 1년여 만에 조기퇴진했다.
김 전 행장은 주택은행과 합병을 이끌어 초대 통합국민은행장에 올랐으나 국민카드를 합병하면서 회계기준을 위반한 이유로 문책경고 상당의 중징계를 받았다. 김 행장은 임기종료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황 전 회장은 우리은행장으로 재직하던 2005년부터 2년 동안 우리은행이 파생상품에 투자했다가 1조 원 이상의 손실을 낸 책임으로 업무집행정지 3개월의 제재를 받았다.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황 전 회장 후임으로 내정됐으나 해외투자 손실에 대한 책임으로 금감원의 중징계가 예고되자 2010년 7월 은행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카자흐스탄 센터크레디트은행 지분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국민은행에 총 1조1천억 원에 이르는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 이유였다.
어윤대 전 회장은 임기 동안 사외이사들과 갈등을 빚다가 가까스로 임기는 마쳤으나 퇴임 후에 징계를 받았다.
어 전 회장은 지난해 7월 3년 임기를 마치며 불명예 퇴진은 면했으나 그해 10월 금감원에 주의적 경고 조치를 받아 역시 오명을 벗지 못했다. KB금융이 ING생명을 인수하려다 실패한 뒤 주총 분석기관에 미공개 정보를 유출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KB금융의 수장들이 이토록 파국을 맞은 원인은 이들 대부분이 ‘낙하산’ 인사 때문인 것으로 지적된다.
황영기·어윤대 전 회장은 ‘MB맨’으로 이명박 정부의 비호를 받았다. 이밖에 강정원 행장을 비롯해 역대 회장과 행장 가운데 4명이 외부출신 인사였다.
임 회장 역시 재정경제부 출신으로 취임 때부터 낙하산 논란이 일었다. 수장이 바뀔 때마다 줄서기를 되풀이하고 또 이에 반대하는 세력 또한 생겨나면서 내부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임 회장과 이 행장 사이에 벌어진 내분도 사실상 두 사람 다 외부인사 출신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성낙조 국민은행 노조위원장은 4일 "벌써부터 행장에 누구 누구가 거론된다는 얘기가 돈다"며 "회장, 행장 선임과정의 투명성 확보 등 지배구조 리스크를 해결하지 않는 한 경영진 갈등은 누가 오든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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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오른쪽)과 이건호 우리은행장(왼쪽)이 지난해 11월 열린 KB금융지주 관련 행사에 참석해 나란히 앉아 있다. |
◆ KB 집안싸움, 어떻게 시작됐나
임 회장과 이 행장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지난 5월부터다. 이 행장은 5월 국민은행의 주전산시스템을 교체하는 과정에 의혹이 있다며 금융당국에 특별감사를 요청했다.
국민은행은 2012년 6월 전담반을 꾸려 주전산기 기종변경 검토작업을 해왔다. IBM과 맺고 있던 사용 계약이 2015년 7월로 끝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국민은행 이사회는 외부 컨설팅 업체로부터 자문을 받아 차기 주전산기 기종을 유닉스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10월 임시 운영위원회와 11월 경영협의회는 이 결정을 승인했다.
지난해 12월부터 올 초 전산기 교체에 대비한 테스트까지 마쳤다. 국민은행은 지난 4월24일 이사회에 주 전산기 전환계획안을 정식안건으로 상정할 예정이었다.
유닉스 교체 건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하지만 이사회를 열흘 앞두고 열린 임시운영위원회에 셜리 위 추이 한국IBM 대표가 이 행장에게 협상가격을 낮춰 1500억 원대에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자 상황이 급반전됐다.
이 행장은 유닉스의 2천억 원대 교체비용보다 가격이 낮은 만큼 전산기 교체계획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사회는 뒤이어 열린 이사회에서 유닉스로 전환계획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 밖으로 번진 집안싸움, 결국 치명타
국민은행 감사팀은 이사회 직후 내부감사를 진행해 전산기 교체안건 보고서에 문제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유닉스로 전산기를 교체하는 데 따른 비용과 잠재 리스크 등이 의도적으로 축소 또는 누락됐다는 것인데 그 과정에 KB금융지주가 관여돼 있다고 본 것이다.
이 행장은 금융감독원에 특별검사 착수를 요청했다. KB금융 내부에서 벌어진 집안싸움이 외부로 확전되는 시발점이었다.
금융당국이 나서기 시작하자 이 행장과 이사회간의 갈등은 표면적으로 수그러드는 듯했다.
그러나 금감원이 6월9일 임 회장과 이 행장에게 중징계를 사전통보하면서 사태는 더욱 꼬이기 시작했다.
금감원은 주전산기 교체 건을 지난 1월 KB카드의 고객정보 유출사태와 도쿄지점에서 발생한 부당대출 건과 함께 징계사유에 포함시켰다.
금융당국은 KB사태의 원인이 임 회장과 이 행장의 내분에 있다고 보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결국 중징계 사전통보에서 경징계 결정, 다시 중징계 최종 결정을 오가는 동안 KB금융은 그 동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여러 문제점들을 드러내며 깊은 상처를 입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