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전과 한수원이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위기에서 기회를 잡을지 주목된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한전과 한수원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맺은 합의를 놓고 사실상 원전 수출길을 막았다는 비판이 나오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원전 확대 의지가 한국에 기회가 될 지 주목된다.
22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일본과 미국을 순방하기 위해 오는 23일 출국한다. 이 대통령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이동해 25일에 트럼프 대통령과 취임 뒤 첫 정상회담을 진행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원전 관련 협력이 주요 의제로 다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비롯해 김동철 한국전력공사 사장, 황주호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등 국내 원전 관련 주요 관계자들은 이 대통령의 방미에 앞서 먼저 미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위한 사전 조율을 진행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 이재명 대통령(오른쪽)이 21일 대통령실에서 빌 게이츠 게이츠재단 이사장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과 미국의 원전 관련 논의에서는 한전 및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사이에 지난 1월 맺은 합의 내용이 거론될 가능성이 크다. 웨스팅하우스는 캐나다 사모펀드인 브룩필드가 대주주지만 원전 관련 지식재산권을 보유한 기업인 만큼 미국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알려진 한전·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의 합의문에는 앞으로 50년 동안 한국형 원전 수출 때마다 원전 1기당 6억5천만 달러 규모의 물품 및 용역 계약의 제공, 1억7500만 달러 규모의 기술 사용료 지불, 소형모듈원전(SMR)을 포함한 모든 차세대 원전을 대상으로 웨스팅하우스의 기술 자립 검증 등 내용이 담겼다.
주요 원전 수요 지역인 북미, 유럽 등에서는 한국이 원전 수주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까지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실상 향후 50년 동안 한국의 원전 수출길을 막아 버린 불공정한 내용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이 합의는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직후인 지난 1월에 체결됐으나 구체적 내용은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의 재임 당시인 지난해 하반기에 논의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의 원전 수출을 견제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태도가 민주당이나 공화당 어느 정부, 어떤 대통령이 들어서더라도 변하지 않는 대세적 정책 방향이라는 의미다.
바이든 전 대통령은 2023년 4월 윤석열 전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내놓은 공동 합의문에 ‘원전 관련 지식재산권 존중’ 문구를 넣는 등 사실상 한국 원전 수출에 제동을 걸려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원전 확대와 관련한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한국에 불리한 한전 및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사이 합의 내용은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정상회담이라는 상황을 만나면서 한국에 오히려 기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도 보인다.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뒤에도 국가 사이 협상을 흥정을 통한 장사로 보는 경향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최근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벌인 관세협상 등을 보면 상대에게 불리한 조건을 던져 놓고 조건을 개선하는 대가로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울 협상 내용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에 불리한 원전 관련 합의는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미 한국에 던져진 불리한 조건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이용해 한국을 상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에너지 정책과 관련해 미국 내 원전 수를 크게 늘리려 하고 있다. 인공지능(AI) 혁명 등 영향으로 미국에서도 에너지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재생에너지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트럼프 대통령에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는 원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들어 원자로 승인 절차 간소화, 원자력규제위원회(NRC) 개편 등 원전 건설의 절차를 간소화하는 행정명령을 연이어 마련했다.
하지만 미국은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에 따른 영향으로 이후 자체적으로 원전을 건설하고 운영할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웨스팅하우스가 자체적으로 시공 등 능력 없이 지식재산권만 들고 있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한국과 원전 협력이 필요할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의 한전, 한수원과 두산에너빌리티, 현대건설, 대우건설 등 팀코리아처럼 원전의 시공부터 이후 운영까지 전체 단계에 걸친 역량을 보유한 나라는 드물다.
이런 점을 고려해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원전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웨스팅하우스와 합의 내용의 수정을 당근으로 제시할 가능성이 큰 셈이다.
빌 게이츠 게이츠재단 이사장이 한국을 방문해 21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만나 “차세대 SMR의 빠른 실증과 확산을 위해서는 규제 체계 수립과 공급망 구축에서 한국 정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 점은 원전 분야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을 보여준다. 게이츠 이사장은 지난 21일 이 대통령, 22일 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도 원전 관련 논의를 나눴다.
이번 정상회담은 한전, 한수원 등을 통해 한국이 미국의 원전 확대에 참여할 기회가 될 수 있으나 실질적 이득을 확보할 수 있도록 구체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일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각국과 관세협상을 진행하면서도 명백한 합의문을 만들지 않고 뒤에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모호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 대상 관세율을 15%로 합의했으나 이전 부과했던 25% 자동차 관세율을 합의된 수준으로 낮추는 행정명령은 여태껏 미루고 있다.
김 장관은 22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방미 직전 기자들과 만나 미국과 원전 협력 관련 질문을 받고 “여러 가능성을 논의해 보겠다”며 “마지막 1분 1초까지 우리 국익이 관철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