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원 농심 회장(사진)은 미국 제3공장 건설을 검토하다가 지난해 부산에 수출전용공장을 짓는 방안으로 전략을 선회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리스크가 현실화하면서 전략을 재검토 하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신동원 회장은 지난해 미국 현지에서 늘어나는 라면 수요에 대응해 현지에 3공장을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하다가 부산에 수출전용 공장을 짓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 각 나라에 관세 장벽을 세우겠다는 방침을 세워 미국 현지 공장 증설의 필요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어서다.
4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농심이 미국 정부의 관세 부과 리스크에 대응해 미국 현지에 새 공장을 짓는 방안을 다시 고민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 2기의 우선정책인 관세와 관련한 리스크에 대응하려면 미국에 공장을 더 두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글로벌 관세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일 캐나다와 멕시코에 각 25%, 중국에 10%의 관세를 4일부터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기도 했다.
멕시코와 캐나다를 대상으로 한 관세 부과 시행을 하루 앞두고 이를 한 달 동안 전격 유예하기로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을 감안할 때 잠재적 불씨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보는 분석이 우세하다.
‘협상가’ 성향이 강한 트럼프 대통령의 면모를 살펴볼 때 결국엔 미국 정부가 충분한 이득을 보지 않는다고 판단할 때 언제든지 관세 카드를 꺼내들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세계 각 나라를 대상으로 보편과세 최소 10%를 적용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을 때부터 한국의 주요 수출기업들은 트럼프 행정부 등장에 따른 손익계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여파가 미치기도 한다. 3일 국내 주요 식품기업 주가는 줄줄이 떨어졌다. 미국 정부가 캐나다와 멕시코, 중국을 시작으로 세계 각 나라에 관세 장벽을 줄줄이 세울 수 있다는 관측이 번지면서 국내 식품기업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시각이 번졌기 때문이다.
신동원 회장 입장에서도 관세 리스크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농심은 현재 미국에 1공장과 2공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 현지에서 생산하는 물량만으로는 현지 소비자들의 수요를 따라가지는 못하는 상태이다.
▲ 신동원 농심 회장. <농심>
신 회장이 2023년 3월 정기 주주총회 당시 “미국 내 제3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며 “미국 동부지역을 유력한 후보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로 여겨진다.
하지만 신 회장의 최종 선택은 미국이 아닌 한국이었다. 농심은 지난해 6월 미국 3공장 건설 카드를 유보하고 부산 녹산공장에 수출전용공장을 건설해 늘어나는 해외 수요에 대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미국에 추가 공장을 짓기 위해 사업성을 검토하다보니 부지와 설비 매입, 인건비 등에 드는 돈이 너무 올라 있어 투자가 적합하지 않은 시점이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 농심의 설명이었다.
농심은 현재 1918억 원을 들여 부산 수출전용공장 건설을 본격화하고 있다. 조만간 착공이 시작될 것으로 보이며 2026년 4월 말까지 투자를 마무리해 내년 하반기부터는 공장을 가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농심이 국내에 라면 공장을 만드는 것은 17년 만의 일인데 새 공장이 지어지면 농심이 국내에서 생산하는 수출용 라면은 기존 연간 5억 개에서 10억 개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 2기가 등장하면서 전략 변화를 고민해봐야 하는 시점이 됐다는 시선도 나온다. 관세 리스크가 현실화한다면 미국에 새 공장을 짓는 것이 장기적으로 농심에게 도움이 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의 재등장을 점치기 힘들었지만 트럼프 2기 시대가 열린 상황에서 주판알을 다시 튕겨봐야 한다는 의미다.
농심은 2020년까지만 하더라도 해외 매출 비중이 34%가량이었지만 이 비중은 2021년 37%, 2022년 39%, 2023년 39% 등으로 높아졌다. 농심의 전체 영업이익 가운데 40%가량도 해외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매출 비중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외신 파이낸셜타임즈는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인터내셔널을 인용해 농심의 가장 큰 해외시장은 미국으로 시장점유율이 25.4%라고 보도했다. 미국 시장에서 50%가량의 지배력을 보유한 일본 종합식품기업 도요수산에 이은 2위다.
신 회장은 2023년 7월 임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내 “2023년까지 미국 시장에서 연매출을 3배 끌어올리고 라면 시장 1위에 오를 것”이라고 말하며 미국 영향력 확대 의지를 내보인 바 있다.
▲ 이병학 농심 대표이사 사장(사진)은 농심 안팎에서 인정받는 생산 관리 전문가다.
신동원 회장이 생산 전문가인 이병학 대표이사 사장 체제를 이어가는 것도 생산거점 확보와 관련한 고민이 녹아들어간 결정으로 해석된다.
이 사장은 농심 안팎에서 인정받는 생산 관리 전문가다. 1985년 농심 품질개발실로 입사해 경기 안양공장 생산과장, 경북 구미공장 생산과장, 안양공장 생산기술팀장, 구미공장장, 안양공장장 등을 거쳤다. 농심 대표이사를 맡기 전까지는 생산부문장으로 일했다.
농심의 생산공장 가운데 규모가 큰 두 곳으로 꼽히는 구미공장과 안양공장을 두루 거친 뒤 농심 모든 공장의 생산을 책임지는 자리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이 사장의 역량을 의심하기는 힘들다.
이 사장은 특히 농심이 라면업계 최초로 국내 구미공장에 도입한 스마트팩토리를 구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미공장에서 1분에 라면 600봉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한 장본인이 이 사장이다.
농심이 각 지역별 생산거점 구축과 관련해 고심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당분간 신 회장이 이 사장을 중용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 사장은 지난해 말 실시된 임원인사에서 자리를 지켜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임기를 연장할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농심 관계자는 “현재 미국 새 공장 건설 계획과 관련한 검토는 유보된 상태”라며 “경영진이 관세 리스크와 관련해 미국 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는지는 확인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