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K콘텐츠 전성시대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한국의 매력에 빠졌다고 말하는 외국인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서구권 콘텐츠를 즐길 줄만 알았던 대한민국의 위상이 달라진 셈이다. 문화 불모지였던 한국이 콘텐츠 수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토양에는 정부와 기업, 그리고 산업 종사자의 노력이 곳곳에 배어있다. 식품사업을 하다가 느닷없이 문화로 손을 뻗친 CJ그룹의 역할도 절대적이었다. 비즈니스포스트는 CJ그룹이 문화투자에 뛰어든 지 30주년이 되는 해를 맞이해 그동안 CJ그룹이 걸어온 길을 살펴본다. -글 싣는 순서 ① 이재현·이미경 뚝심, ‘아시아 할리우드’ 만들자던 꿈 CJ로 일궜다 ② CJ 명실상부 ‘한류 선봉’, 영화·드라마·예능·음악 글로벌 종횡무진 ③ 문화‘판’은 어떻게 문화‘산업’이 됐나, CJ 콘텐츠 선순환 생태계 만들었다 |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1995년 드림웍스에 투자를 결정하면서 누나인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에게 했다는 이 말은 유명하다.
정확히 30년 뒤인 2025년. 전 세계인이 누리는 한류 콘텐츠의 선봉장으로 CJ그룹을 꼽는 데 이견은 없다.
해외 언론은 일찌감치 CJ그룹을 한류 콘텐츠의 산실로 주목했다.
블룸버그는 2023년 4월 ‘글로벌 시청자를 서울로 끌어들이고 있는 한국 드라마의 인기’라는 기사에서 “K드라마의 성공은 하룻밤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라며 CJENM의 역할과 비전을 조명했다.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K콘텐츠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CJ그룹이 있다는 블룸버그의 분석이었다.
CJ그룹은 소위 콘텐츠와 관련한 문외한이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손자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에게 1993년 계열분리해 준 회사가 설탕과 밀가루 등을 수입해 팔던 CJ제일제당이었다. 당시 CJ제일제당은 문화 쪽과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CJ그룹이 문화 방면으로 사업을 넓힐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재현 회장과 이미경 부회장은 드림웍스 투자를 성사하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같은 꿈을 꿨다.
이미경 부회장은 당시를 회고하며 “전 세계인이 매년 2~3편의 한국 영화를 보고 매달 1~2번씩 한국 음식을 먹고 매주 1~2편의 한국 드라마를 보고 매일 1~2곡의 한국 음악을 들으며 일상에서 한국 문화를 즐기게 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주도해 월트디즈니스튜디오 회장에서 해고당한 제프리 카첸버그, 음반 제작업자 데이비드 게펜과 드림웍스라는 회사를 설립한 것은 1995년 초. 이들은 회사 성장을 위해 전 세계에서 영화과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는 투자자를 물색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택에서 협상한 것은 이 회장이 드림웍스의 초기 투자자로 합류하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1995년 초 국내 언론에서는 이미 삼성그룹이 드림웍스의 주식을 대거 매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퍼졌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CJ제일제당이 드림웍스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여기에는 재밌는 일화가 있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스티븐 스필버그와 협상에서 반도체 얘기만 주구창장했다고 한다. 더구나 경영권과 관련해 삼성그룹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얘기에 스필버그 감독이 난색을 표하면서 협상은 틀어졌다.
이 지점을 파고든 인물이 바로 이미경 부회장이다.
이 부회장은 스필버그와 만나 협상하면서 오롯이 영화 얘기만 했다고 한다. 스스로 영화광이라며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영화들을 봤다”는 등 영화 이야기를 계속해 결국 드림웍스를 상대로 한 3억 달러 투자를 성사했다.
이재현 회장 역시 드림웍스 투자에 한몫했다.
당시 CJ제일제당 상무였던 이 회장은 삼성그룹과 드림웍스의 협상이 결렬되자 바로 미국으로 날아갔는데 ‘격식 파괴’를 무기로 가져갔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사무실이 아닌 개인 스튜디오를 찾아가면서 청바지에 티셔츠, 운동화 차림으로 피자를 주문해 식사하면서 사업계획을 논의했다고 한다.
▲ 이미경 CJ그룹 부회장(가운데)가 드림웍스 공동창업자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오른쪽)과 제프리 카첸버그 전 월트디즈니스튜디오 회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 CJ그룹 >
물론 CJ그룹의 드림웍스 투자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1995년 4월 말 CJ제일제당이 드림웍스에 투자한다는 보도가 나온 뒤 당시 업계에서는 ‘망하기 위해 뛰어드는 자충수’라며 CJ그룹의 행보를 뒷담화했다.
CJ그룹의 결정은 말그대로 명운을 건 결정이었다. 투자금 3억 달러는 당시 자산 1조 원 규모에 불과한 CJ제일제당의 연간 매출의 20%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 자칫 투자가 실패로 돌아가면 첫 걸음을 떼지도 못한 CJ그룹 입장에서는 오너일가의 입지가 대폭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재현·이미경 남매의 인식은 확고했다.
이 회장은 평소 할아버지인 이병철 창업주의 가르침 덕분에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주위에 “역사적으로 경제 강국의 전제 조건은 문화 강국이 되는 것”이라며 “우리나라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문화상품에서 답을 찾아야한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경 부회장 역시 ‘문화광’으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실제로 이 부회장은 미국 유학 시절 문화의 파급력을 몸소 느꼈으며, 이를 여러 자리에서 강조한 바 있다.
이 부회장은 한 강연회에서 “미국 유학 시절 문화에 대한 놀랍고 충격적인 경험이 많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며 “하지만 부러워할수록 깊은 상처로 남아 ‘어떻게 한국을 알려야 할까’와 관련한 고민이 이어졌는데 결국 답은 ‘문화산업’이었고 한국 문화의 글로벌화이라는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다짐이 생겼다”고 말했다.
▲ CJ그룹은 1998년 국내 영화관사업자 최초로 서울에 멀티플렉스 영화관 'CGV강변11'을 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내 멀티플렉스 영화관 시대가 열렸다고 영화산업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1999년 2월 매일경제에 보도된 CGV강변11 관련 기사. < CJ그룹 뉴스룸 >
한국에 최초로 멀티플렉스 영화관 시대를 연 것도 CJ그룹이었다. CJ그룹은 1996년 해외 기업들과 함께 CGV(현 CJCGV)를 설립해 1998년 4월 상영관 11개를 갖춘 CGV강변을 선보였다. CJ그룹의 투자는 이듬해인 1999년 롯데그룹이 롯데시네마를, 동양그룹이 메가박스를 연 것으로 이어졌는데 이를 통해 한국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 시대가 문을 열었다.
극장 인프라만 갖추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케이블방송사업에 진출한 뒤 푸드와 애니메이션, 음악채널 등을 계속 인수했고 2006년에는 자체 종합엔터테인먼트채널 tvN을 개국했다.
CJ그룹은 tvN을 통해 자체 제작 예능과 드라마,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송출하기 시작했고 모든 분야의 방송 콘텐츠를 선보이는 채널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에는 CJ그룹의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담당하는 계열사 6개를 합병해 CJE&M(현 CJENM)을 출범하면서 콘텐츠 제작 역량을 끌어올렸다.
글로벌을 향한 도전 속도도 높였다. CJENM 산하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을 통해 해외에서 제작 역량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에 멈추지 않고 2022년에는 미국 대형 스튜디오인 엔데버콘텐트(현 피프스시즌)를 인수했다.
문화산업의 최앞단에 있는 미국 현지에서 콘텐츠를 선보일 수 있는 기지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따라나온 것은 이무렵이었다.
▲ CJ그룹은 극장사업뿐 아니라 영화와 방송, 콘텐츠제작, 온라인동영상스트리밍서비스(OTT), 음악 등 문화산업 인프라를 폭넓게 구축하고 있다. 사진은 CJ그룹의 OTT 플랫폼인 티빙. < CJ그룹 >
극장은 물론 영화와 방송, 콘텐츠제작, 온라인스트리밍서비스, 음악 등 문화산업 인프라를 폭넓게 구축하고 있는 회사는 국내에 CJ그룹이 유일하다.
현재까지 CJ그룹이 문화산업에 직접 투자한 금액만 7조5천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
국자통계포털 기준으로 문화산업의 2023년 말 총매출은 151조1천억 원이다. 18년 전과 비교하면 규모가 94조 원가량 늘었다.
같은 기간 문화산업 수출 규모는 10배 성장했는데 이는 2차전지와 전기차, 가전 등 대한민국의 핵심 산업 수출액을 뛰어넘는 수치다.
CJ그룹이 뿌린 씨앗이 한국의 기간산업과 어깨를 견줄 정도로 성장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제프리 카젠버그 드림웍스 공동창업자는 과거 CJ엔터테인먼트 출범 15주년 기념 방한에서 “짧은 기간에 방송, 영화, 음악, 공연 등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그룹과 식품, 유통 등 라이프스타일 기업이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했다는 게 놀랍다”라며 “미국이나 유럽 기업도 쉽게 만들어내지 못한 포트폴리오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즈 역시 2021년 한국을 놓고 서구 문화를 소비하는 입장에서 주요 문화를 수출하는 입장으로 탈바꿈한 ‘문화적 거물’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평가를 가능하도록 한 데는 CJ그룹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