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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물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든 히라하라 스나오

이재우 sinemakid222@gmail.com 2024-09-27 0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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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물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든 히라하라 스나오
▲  일본 ‘하역 근대화의 아버지’ 히라하라 스나오(平原 直). 그는 표준 파렛트(pallet) 시스템 보급에 평생을 바친 물류 개척자였다. 사진은 1952년의 모습.  <일본 물류박물관>
[비즈니스포스트] 1949년 3월 일본 고베항. 한 남자가 우연히 미국 펩시콜라사의 하역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본 통운에서 일하고 있던 히라하라 스나오(平原 直, 1902~2001)라는 이 남자는 그 모습이 너무나 신기했다. 

누군가 지게차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지게차 앞부분에는 나무 파렛트(pallet) 위에 콜라로 꽉 찬 상자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파렛트는 지게차가 무거운 물건들을 옮기고 보관할 때 사용하는, 나무 또는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화물용 받침대다. 낱개 단위로 포장된 화물들을 한 덩어리(1톤 단위)로 만들어 물류 작업이 원활하도록 고안된 것이 파렛트다.

히라하라는 물품이나 짐을 지게차의 파렛트에 쌓아, 팔레트 단위로 보관하고 수송하는 장면을 익히 본 적이 없었다. 가히 신세계였다. 더욱 놀라운 건, 모든 작업이 출발지로부터 중계지를 거쳐 도착지까지 환적(換積) 없이 일관되게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 너무나 손쉽게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참고로, 지게차(포크리프트: forklift)는 1920년대에 미국 클라크(Clark)사와 토우 모터(Towmotor)사가 개발하면서 하역 장비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클라크사가 1924년 최초의 내연기관식 지게차를 출시했다. 일본에서는 1949년 TCM(Toyo Carriers Manufacturing)이라는 회사가 최초로 지게차를 제작했다. 

히라하라가 고베항에서 본 그날의 감동은 강렬했다. 평소 “물류 현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싶다”는 신념을 가졌던 그였다.

20년 전 규슈 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선택한 회사가 운송회사였다. 명문대를 나와 거친 물류 현장에 취업하자 주위에선 그를 ‘별종’ 취급했다. 게다가 현장 배속을 희망했다. 

그런 그는 어느 날, 하역 현장에서 엄청난 무게의 물건을 나르는 한 늙은 노동자의 모습을 보곤 충격을 받았다. 하역이 아니라 고역이었다. 당시 히라하라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간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은 상당히 귀중한 것이지만, 그 노동이 인간의 생리적 한계를 넘어 육체를 혹사시킨다면 더 이상 올바른 노동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일본 물류 전문지 ‘LOGI-BIZ’ 인용)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물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든 히라하라 스나오
▲ 히라하라 스나오가 1949년 고베항에서 목도한 펩시콜라사의 지게차에 의한 파렛트 하역 작업 현장. <일본 물류박물관>
아시다시피, 지게차와 파렛트는 한 세트로 움직여야 시너지 효과를 얻는다. 실과 바늘의 관계다. 그런 지게차와 파렛트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된 건 2차대전 중에 미군이 병참으로 채택하면서다. 전쟁이 끝나고 1940년대 후반에는 산업계에 도입되었다. 패전한 일본 복구와 연합국 점령 통치가 맞물리면서 지게차와 파렛트 시스템도 일본에 적용됐다. 

그런 현장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은 히라하라는 1949년 9월 ‘하역 연구소’를 설립하고 ‘하역과 기계’라는 물류 전문지를 발간하게 된다. 하역 기계화를 통한 그의 물류 계몽 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히라하라 스나오는 일본 파렛트 협회를 만들었고, 일본 파렛트 렌탈(JPR: Japan Pallet Rental)이라는 회사의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표준 파렛트 보급에 일생을 바쳤다. 그런 그를 일본 물류 업계는 ‘하역 근대화의 아버지’ 또는 ‘물류 개척자’라 부른다.

필자는 지난 회 칼럼에서 ‘표준화된 컨테이너 시스템’으로 물류 상식을 바꾼 말콤 맥린을 다뤘다. 이번 칼럼 역시 물류에 대한 이야기다. ‘한-일 물류 사제(師弟)의 세상 바꾸기’쯤으로 해두자. (사제? 이어지는 글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잠시 말콤 맥린 이야기를 덧붙여본다. 맥린 이후 컨테이너 시장엔 어떤 혁신이 일어났을까? 비교적 최근엔 미국 뉴저지주에 본사를 둔 스택슨(Staxxon)이라는 회사는 ‘빈 컨테이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코디언처럼 접히는 컨테이너(accordion-style folding containers)를 만들었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물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든 히라하라 스나오
▲ 컨테이너 시장의 혁신을 이끈 미국 스택슨(Staxxon)의 접이식 컨테이너. 아코디언처럼 접히면서 빈 컨테이너 문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 <스택슨 페이스북>
빈 컨테이너가 차지하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줄이고 항만 활용도를 높이면서 공급망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접이식 운송 컨테이너가 새로운 산업 표준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말콤 맥린과 스택슨이 컨테이너를 통한 큰 개념의 물류 혁신을 이뤘다면, 히라하라 스나오의 ‘지게차+파렛트 시스템’의 경우는 작은 개념의 물류 혁신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도 일찌감치 파렛트 표준화 시스템에 눈을 뜬 물류 경영인이 있었다. 물류 서비스 그룹 로지스올(LogisALL)의 서병륜(75) 회장이다. 그가 이끄는 로지스올은 한국파렛트풀(주), 한국컨테이너풀(주), 한국로지스풀(주)을 아우르는 통합 브랜드다. 이중 한국파렛트풀(KPP)은 파렛트 렌탈 분야 시장점유율 1위 회사다. 

로지스올은 전문 물류 용어로 말하자면, SCM(Supply Chain Management: 공급망관리) 종합물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SCM이라는 개념은 영국 물류 컨설턴트 케이트 올리버(Keith Oliver)가 1982년 6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사용하면서 일반화되었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도 SCM 체계 구축은 기업의 핵심 경쟁력이라 할 수 있다. 

서병륜 회장은 한국물류연구원을 창립하였으며, 한국물류협회 회장을 지낼 정도로 물류 발전의 최일선에 서 있었던 기업인이다. 공교롭게 그는 히라하라 스나오와 ‘물류 사제(師弟)’ 관계를 맺고 있다. 

“착안대국 착수소국(着眼大局 着手小局: 사업의 구상은 크게 하되, 시작은 작게 하라). 저의 영원한 물류 스승인 히라하라 선생께서 저에게 가르쳐 준 지혜입니다.” 

서병륜 회장이 자신의 물류 인생을 담은 저서(‘물류의 길’, 삼양 미디어)에서 한 말이다. ‘착안대국 착수소국’은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 순자의 말로 알려져 있다. 넓은 시야로 그림 전체를 그릴 줄 알아야 하며, 실제로 일에 임해서는 세세하게 작은 것부터 실행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병륜 회장의 말을 더 들어보자. 

“히라하라 선생님은 ‘물류’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습니다. 하역의 기계화를 부르짖으며 일본 정부에 파렛트 풀(pallet pool) 제도 도입을 제안했습니다. 또한 일본 파렛트 협회 등 물류 관련 단체들을 설립하는 등 선생님은 가히 ‘물류 선각자’라 해도 지나침이 없는 분입니다.”

서 회장이 히라하라 스나오와 인연을 맺은 건 대학 졸업 후 대우중공업에 입사해 지게차 파트에서 일하면서다. 지게차 마케팅을 위해 일본을 찾았던 서 회장은 표준화된 파렛트 풀 시스템 구축에 일생을 걸고 있던 히라하라 스나오를 알게 된다. 히라하라는 훗날 물류 회사(한국파렛트풀)를 설립한 서병륜 회장에게 ‘물류지도(物流之道)’라는 지혜를 나눠주었다. 

서병륜 회장은 히라하라가 ‘물류’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 과정을 한번 들여다보자. 서 회장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물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든 히라하라 스나오
▲ 필자가 물류 현장에서 본 KPP(한국파렛트풀) 파렛트. KPP는 서병륜 회장이 이끄는 로지스올 그룹의 계열사다. 한국과 일본의 표준 파렛트는 1,100mm(가로)×1,100mm(세로) 크기인 T11형이다. <이재우>
물류는 ‘물적 유통’의 줄임말로, 영어 Physical Distribution을 직역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1940년대 초에 Physical Distribution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가나가와대 경제학부 나카타 신야(中田信哉) 명예교수는 과거 일본 물류학회에 발표한 ‘물류라는 단어와 개념의 탄생’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일본이 미국에 유통 시찰단(일본 생산성본부의 ‘유통 기술 전문 방미시찰단’)을 보낸 건 1956년이다. 거기서 일본에 도입된 것이 Physical Distribution이라는 개념이다. 

시간이 좀 흘러 1964년 4월 일본 정부의 경제심의회 회의가 열렸는데, 히라하라 스나오는 유통 소 분과회의 전문 위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일본엔 아직 정착되지 않았던 Physical Distribution이라는 영어의 개념을 ‘물적 유통’으로 번역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신야 교수에 따르면, 1964년 그해 통산성이 정책 용어로 ‘물적 유통’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경제신문 등 언론이 이를 줄여서 ‘물류’라고 부르면서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물류’라는 용어를 히라하라 스나오로부터 빌려 쓰고 있는 셈이다. 그는 2001년 99세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물류 강론을 폈던 철인이었다. 

세상을 멀리 내다본 히라하라 스나오. 그와 서병륜 회장을 묶어 준 것이 물류였고, 순자의 말(착안대국 착수소국)이었다. 글의 마무리 역시 순자의 말을 빌려 본다. 

‘순자’ 권학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오상기이망의(吾嘗跂而望矣), 불여등고지박견야(不如登高之博見也). 

“나는 일찍이 발꿈치를 치켜들고 저 먼 곳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높은 산에 올라가 보는 것만큼 멀리 보지 못했다”. 이재우 재팬올 발행인
 
이재우 발행인(일본 경제전문 미디어 재팬올)은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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