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철 M&A로 승부사 기질 또 발휘, 오리온 3세시대 여는 키맨으로 우뚝

▲ 오리온이 역대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을 통해 바이오사업에 힘을 싣겠다는 방향성을 명확히 했다. 이 인수합병에는 허인철 부회장의 공도 큰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은 허인철 오리온 부회장이 2019년 11월26일 서울 강남구 도곡동 마켓오 도곡점에서 열린 오리온 제주 용암수 출시 간담회에서 오리온 제주 용암수를 소개하는 모습.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오리온그룹이 바이오기업 레고켐바이오을 인수하며 방향성을 명확히 알렸다.

저출산 기조에 따라 제과사업의 성장성을 의심받는 상황에서 새 성장동력으로 바이오사업을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번 인수합병에서 허인철 오리온 부회장의 공을 빠질 수 없다. 그는 과거 신세계그룹에서 인수합병 솜씨를 여러 차례 보여줬는데 이 역량을 오리온그룹에서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허 부회장의 인수합병은 향후 오리온그룹이 오너3세 시대를 여는 초석을 놓는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다.

16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오리온의 레고켐바이오 인수는 인수합병 매물을 찾던 오리온그룹이 오랜 기다림 끝에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된다.

오리온은 2020년 10월 중국 국영제약기업인 산둥루캉의약과 바이오사업 진출을 위한 합자계약을 체결하면서 바이오사업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이듬해 3월 오리온홀딩스와 산둥루캉의약은 각각 65%, 35%의 지분율로 합자회사를 설립했다.

2022년 11월에도 난치성 치과질환 치료제 개발기업인 하이센스바이오와 합작투자 계약을 체결한 뒤 곧바로 합작회사 오리온바이오로직스를 설립했으며 2023년 6월에는 치약 연구소도 세웠다.

바이오사업에 속도를 내기 위한 인수합병도 수 년 동안 준비했다.

실제로 지난해 7월에는 국내 바이오기업 알테오젠 인수를 눈앞에 두기도 했다. 5천억 원 이상을 베팅했다고 알려진 이 협상이 막판에 틀어지면서 인수가 무산됐지만 이후에도 꾸준히 인수합병 후보를 물색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시도 끝에 인수한 기업이 바로 15일 공시를 통해 알린 레고켐바이오다.

레고켐바이오는 차세대 항암제로 알려진 항체-약물접합체(ADC) 치료제 기술 개발기업이다. 지난해 글로벌 제약바이오기업인 존슨앤드존슨의 자회사 얀센에 총 2조2천억 원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오리온그룹이 레고켐바이오를 5500억 원에 사들이기로 한 것은 이 회사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리온그룹은 사실 그동안 인수합병을 하겠다는 의지는 종종 보였지만 결과를 내놓지는 못하는 기업으로 평가받았다. 허인철 오리온 부회장이 2022년 4월 증권사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한 ‘최고경영자 주관 증권사 간담회’에 직접 나와 “식품회사에 한정해 한국과 중국, 베트남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매물을 살펴보고 있다”고 얘기했지만 이후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리온이 인수합병에 좀처럼 뛰어들지 않는 기업이라는 인식이 생긴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역대 최대 규모의 베팅을 통해 오리온그룹도 인수합병 의지가 강하다는 점을 투자자들에게 확인시켰다.

오리온의 레고켐바이오 인수는 사실상 승부수라는 시선도 적지 않다. 레고켐바이오의 성장성을 의심하는 시각은 적지만 최근 3년 동안 내리 적자를 내며 누적 영업손실 규모만 1천억 원이 넘어간다는 점에서 단기적으로 오리온에 부담을 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리온이 국내외 법인의 안정적 성장 덕분에 실적 성장세를 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당분간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은 투자자들의 맘에 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온이 레고켐바이오를 품에 안기로 한 것은 결국 미래 성장동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해진 상황에서 장기적 안목으로 투자를 집행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인수합병에는 허인철 부회장의 판단이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식품업계는 보고 있다.

허 부회장은 신세계그룹에서 잔뼈가 굵은 유통업계 전문경영인으로 인수합병을 비롯한 그룹 전반적인 전략기획 분야에서 역량을 인정받는 인물로 꼽힌다.

신세계 경영지원실장으로 일하던 2008년 이마트의 월마트코리아 인수작업을 맡아 일주일 만에 협상을 끝내고 한 달 안에 모든 절차를 마무리한 것은 그의 추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다.

이마트는 허 부회장의 월마트코리아 인수 덕분에 국내 대형마트 업계 1위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수 있었다.

허 부회장은 이밖에도 파주프리미엄아웃렛 부지 매입, 신세계와 이마트의 인적분할, 센트럴시티 인수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역량을 인정받았고 2012년 말 이마트 대표이사에 발탁됐다.

2014년 1월 이마트 대표이사에서 돌연 사퇴했다가 자리에서 물러난 지 6개월 만인 2014년 7월 오리온 부회장으로 영입된 것도 그의 능력이 두루 인정받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리온이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면서 최초로 부회장 직함을 달아준 사람도 바로 허 부회장이었다.

오리온이 레고켐바이오를 인수하는 자리에 오너인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이 아닌 허 부회장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가 오리온그룹 내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허 부회장은 15일 김용주 레고켐바이오 대표이사와 지분 양수도 계약을 체결하는 자리에서 “세계적 바이오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레고켐바이오와 함께 글로벌 신약 개발을 위해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며 “최대주주로서 사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것이다”고 말했다.

통상 수천억 원 규모의 인수합병을 마무리하는 자리에는 오너일가가 나서기도 하는데 오너를 대신해 허 부회장이 참석했다는 점에서 레고켐바이오 인수가 사실상 허 부회장 주도로 이뤄진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허인철 M&A로 승부사 기질 또 발휘, 오리온 3세시대 여는 키맨으로 우뚝

허인철 부회장의 판단은 앞으로 오리온그룹이 오너3세 시대를 여는 기반으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의 아들 담서원 오리온 상무.


오리온그룹 관계자는 "특정 전문경영인의 판단 아래 인수합병이 추진됐다고 단언하기는 힘들 것 같다"며 "인수합병은 회사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허 부회장의 승부사적 기질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오리온그룹은 바이오사업에 꾸준하게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업인 식품사업 쪽으로도 적당한 매물이 있으면 인수합병하겠다는 방침을 정해놓고 있다. 오리온이 최근 4년 동안 꾸준하게 매출과 영업이익을 늘리고 있다는 점에서 투자 여력도 비교적 충분한 것으로 파악된다.

허 부회장의 결정은 향후 오리온그룹이 오너3세 시대를 여는 데도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쓰일 것으로 보인다.

담철곤 회장의 아들인 담서원 오리온 상무는 2022년 말 오리온그룹 인사에서 상무로 승진하며 본격적으로 경영수업에 들어갔다. 오리온그룹에 입사한 지 1년6개월 만에 임원을 단 것으로 경영승계를 위한 수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로 읽혔다.

담 상무는 현재 오리온 경영지원팀을 맡으며 신사업 발굴 등을 총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허 부회장이 추진하는 인수합병 결정들이 향후 담 상무의 경영승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재계는 보고 있다.

오리온그룹 관계자는 "이번 인수합병은 오리온 경영지원팀이 아닌 신사업팀에서 추진한 사항이다"며 "앞으로 담서원 상무가 어떤 역할을 맡게될지 알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