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 안 서면 M&A 안 한다'던 쿠팡 김범석, 파페치에 꽂힌 진짜 이유는?

김범석 쿠팡Inc(쿠팡 모회사) 이사회 의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글로벌 명품 이커머스 기업 파페치를 인수한 것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사진은 김 의장이 지난해 7월 미국에서 열린 전 세계 글로벌 재계 거물들의 사교모임인 '선밸리콘퍼런스'에 참석하는 모습.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확신이 서지 않으면 안 하는 편이다.”

김범석 쿠팡Inc(쿠팡 모회사) 이사회 의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쿠팡Inc의 미국 상장 당시 인수합병 계획과 관련해 한 말이다.

김 의장은 실제로 인수합병에 매우 보수적이다. 쿠팡이 최근 수 년 사이 진행한 굵직한 인수합병이라고는 싱가포르에 기반한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기업 '훅'을 인수한 게 전부다.

그가 국내 소비자들에게 낯선 글로벌 명품 이커머스 기업 ‘파페치’라는 기업을 6500억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인수한 데는 그만한 확신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김 의장이 그동안 성과를 내지 못했던 패션 분야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파페치를 사지 않았겠냐는 의견이 대다수지만 일각에서는 김 의장이 쿠팡을 성장시키며 써왔던 ‘인재 영입’ 전략을 다시 한 번 시도한 것 아니냐는 시선도 나온다.

20일 이커머스업계에 따르면 쿠팡이 파페치를 인수한 배경을 놓고 김범석 의장이 어떤 점에서 확신을 가졌는지가 중요한 관전 포인트로 여겨진다.

‘확신’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이유는 김 의장의 과거 발언 때문이다.

그는 2021년 3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쿠팡Inc를 상장할 때 미국 주재 한국 특파원들과 진행한 온라인 간담회에서 인수합병 계획을 묻는 질문에 “M&A에 대해 문을 닫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대단히 많은 분석과 고민을 통해 옳은 판단이라고 확신이 서지 않으면 안 하는 편이다”고 말했다.

사실상 강한 확신이 서야만 인수합병에 나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쿠팡이 과거 배달 앱(애플리케이션) 요기요나 이커머스 기업 이베이코리아(현 지마켓)의 인수 후보로 여러 차례 거명됐지만 결국 인수를 시도하지 않았던 이유도 김 의장의 인수합병 철학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수 년 안에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면 남들이 좋다고 칭찬하는 매물이라 할지라도 결코 사지 않는다는 의미다.

김 의장의 이런 성향을 감안할 때 파페치를 인수한 것은 다소 뜻밖의 결정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쿠팡이 져야 하는 부담이 매우 크다. 쿠팡이 올해 벌 것으로 예상되는 영업이익은 5천억~6천억 원 수준인데 이보다 더 큰 규모를 기업 인수에 재투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투자자들의 우려가 적지 않다.

쿠팡이 파페치 인수에 나선다는 소식이 알려진 18일 쿠팡 주가가 전날보다 5.11% 급락했다는 사실은 이런 염려를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쿠팡이 파페치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전망도 많다.

쿠팡은 생활용품 등 공산품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했지만 명품이나 패션, 뷰티쪽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명품만 보면 기존 오프라인 강자인 백화점의 영향력이 굳건한 데다 발란과 머스트잇, 트렌비 등 명품 전문 버티컬 이커머스도 나름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패션에서도 무신사를 중심으로 한 버티컬 이커머스 때문에 영향력을 좀처럼 확대하지 못하고 있다. 뷰티 역시 CJ올리브영과 같은 오프라인 매장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하지만 파페치는 이런 약점들을 단번에 극복하게 만들 무기가 될 수 있다.

파페치는 2008년 영국에서 설립된 기업으로 현재 190여 개 나라에 버버리와 구찌 등 50여 개 나라의 1400여 개 명품 브랜드를 취급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 약 3조 원을 내는 등 글로벌 명품 이커머스 플랫폼 1위에 올라 있다.

15년 동안 사업을 펼쳐오며 다져온 글로벌 명품 소싱 역량과 이를 통해 쌓아온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감안하면 쿠팡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명품 패션 및 뷰티 카테고리로 인지도를 높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쿠팡은 “글로벌 개인 명품 시장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됐다”며 “명품 고객을 위한 고객 경험을 다시 정의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맞이하게 됐다”고 파페치 인수에 따른 기대효과를 설명했다.

김 의장이 단순하게 사업 확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진행한 인수합병이 아닐 수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글로벌 사업 확장이나 패션 카테고리 강화 등도 물론 염두했겠으나 무엇보다도 파페치의 인재들을 영입하기 위한 승부수를 던진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확신 안 서면 M&A 안 한다'던 쿠팡 김범석, 파페치에 꽂힌 진짜 이유는?

▲ 쿠팡이 '인재 영입'을 위해 파페치를 인수한 것일 수 있다는 시각이 떠오른다. 사진은 파페치 상장 당시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외벽에 걸렸던 파페치 현수막. <연합뉴스>

김 의장이 인재 영입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쿠팡 설립 초기 직접 개발자를 채용하기 위해 국내외를 돌아다녔다는 점, 기업에 꼭 필요한 인재라는 확신이 들면 기존 업체보다 연봉을 20~30%씩 더 주면서까지 인건비를 아끼지 않았다는 일화 등은 유명하다.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기업을 사들인 적도 있었다.

쿠팡은 2014년 4월 실리콘밸리의 기술기업 캄씨를 인수하며 대외적으로 주목받았다. 캄씨는 대규모 데이터베이스 시스템과 빅데이터 분석, 유통 최적화 작업 등에 노하우를 가진 기업으로 디즈니와 푸마, 레노버, 바클레이카드 등 글로벌 유명 기업을 고객으로 두고 있었다.

이는 구글이나 메타와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스타트업을 인수하는 방식과 같은 ‘인재 인수’의 성격이 강한 인수합병이었다는 것이 이커머스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쿠팡이 2020년 싱가포르에 기반을 둔 OTT기업 훅을 인수한 것도 인재 인수를 위한 포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당시 쿠팡은 OTT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미 선두주자들이 많은 상황에서 격차를 줄이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인재 흡수를 위한 기업 인수였다는 것이다.

김 의장은 파페치 인수의 배경으로 지목되는 패션 카테고리 강화를 위해 실제로 인재 수혈을 시도한 적도 있다.

패션업계에서 오래 일한 관계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쿠팡은 2019년부터 패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삼성물산과 신세계인터내셔날, 한섬, LF 등 국내 유명 패션기업 출신 인력을 대거 채용했다. 2020년 패션 전문관 C.에비뉴가 탄생한 배경이다.

그러나 쿠팡 패션사업의 영향력은 국내외 주요 패션 플랫폼과 비교해 여전히 미미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번에 파페치를 인수하면 ‘글로벌 1위 명품’ 이커머스를 경험했던 인재들을 대거 품에 안게 되는 만큼 선두기업들과 격차를 단숨에 좁힐 수 있다. 올해 초 기준으로 파페치에서 일하는 인력은 약 7천~8천 명으로 추산된다.

파페치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쿠팡이 극복해야 할 과제다. 파페치가 매물로 나온 가장 큰 이유는 수익이 줄어들고 있는 데다 앞으로 전망도 밝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페치 주가는 2021년 2월 주당 70달러를 넘었지만 19일 기준으로 0.64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파페치는 올해 회계연도 2분기에 매출 5억7210만 달러, 주당순손실 21센트를 봤다. 이는 월가의 예상보다 11.8% 낮은 수준이며 적자를 유지한 것이다. 2분기 실적 발표 이후 파페치 주가는 42%나 폭락했다.

3분기 실적은 아예 발표되지 않았다. 애초 11월 말 실적을 공개할 예정이었지만 일정이 돌연 취소됐는데 매각 수순을 밟으면서 생긴 일로 추정된다.

보그비즈니스는 18일 쿠팡의 파페치 인수를 놓고 한 전문가 의견을 인용하며 “쿠팡은 파페치의 서비스를 활용하는 명품 브랜드들에게 그들도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해야 할 것이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