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3월16일 서울 종로구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대회의실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홈쇼핑 방송채널 사용계약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뒤 홍진배 과기정통부 네트워크정책실장(왼쪽에서 일곱번째)과 유료방송업계 관계자, 홈쇼핑업계 관계자들이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과기정통부> |
[비즈니스포스트] 송출수수료를 둘러싼 홈쇼핑업계와 유료방송사업자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사실 송출수수료 갈등은 이 업계에서 아주 오래 된 문제다. 2000년대 초중반에도 홈쇼핑업체들이 송출수수료 인상 때문에 실적에 부담을 진다는 얘기들이 나왔다.
하지만 롯데홈쇼핑과 현대홈쇼핑, CJ온스타일 등 여러 홈쇼핑기업들이 연달아 유료방송사업자를 상대로 방송 송출을 중단하겠다고 나선 적은 없었다.
10년이 훌쩍 넘은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송출수수료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29일 홈쇼핑업계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홈쇼핑업계와 유료방송사업자의 송출수수료 협상 시 발생하는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3월16일 ‘홈쇼핑 방송채널 사용계약 기준’을 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등을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송출수수료란 홈쇼핑업체들이 케이블방송이나 위성방송, IPTV 등에 채널을 송출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금액을 말한다.
보통 다른 콘텐츠제작사들은 방송 콘텐츠를 지불하는 대가를 유료방송사업자에게 받지만 홈쇼핑은 방송을 일종의 광고 채널로 간주하기 때문에 오히려 유료방송사업자에게 수수료를 내는 것이다.
홈쇼핑 방송채널 사용계약 기준은 2017년 9월27일 처음 마련돼 2018년 1월1일부터 시행됐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홈쇼핑사업자와 유료방송사업자의 자율협상으로 송출수수료 협상이 진행됐지만 갈등이 너무 크다는 민원이 끊이지 않으면서 가이드라인이 제정된 것이다.
이후 몇 차례 보완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3월16일부터 시행된 새 기준이다.
개정안은 사업자 간 자율 협상의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송출수수료 협상 시 발생하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기준과 절차를 제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설명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새 기준을 만들기 위해 2022년 9월부터 수차례에 걸쳐 여러 이해관계자의 의견도 수렴했다.
공정한 자율협상을 지원하기 위해 협상 절차를 개선하고 대가 산정 시 고려요소를 명확하게 규정하였으며 협상 진행 중에는 전년도 계약이 적용되도록 협상 과정에서의 안정성을 높인 것이 새 개정안의 특징이다.
협상이 지연되거나 갈등이 발생할 경우 이를 해결하기 위핸 대가 검증 협의체의 운영 조건과 역할도 구체화해 협의체의 실효성을 높인 것도 개정안이 지니는 의미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대가 산정 기준이다.
기존에는 유료방송사업자가 대가 산정 기준을 만들어 홈쇼핑기업에 ‘통지’만 하면 됐지만 3월16일부터는 홈쇼핑기업과 이 기준을 놓고 ‘협의’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홈쇼핑기업과 유료방송사업자 사이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는 분위기다.
무엇보다도 ‘홈쇼핑 방송채널 사용계약 기준’이 법적 구속력을 지니지 않은 권고사항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기대됐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홈쇼핑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만드는 가이드라인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며 “보완사항을 점검해 개정안을 만든다고 해도 해당 조치가 송출수수료의 인하나 동결 등 홈쇼핑업계가 원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고 말했다.
홈쇼핑기업이 매출을 올리는 주요 창구가 여전히 TV방송이라는 점도 갈등 해결이 어려운 이유로 꼽힌다.
홈쇼핑회사들은 송출수수료 부담을 줄이기 위해 모바일커머스 등 새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TV홈쇼핑산업협회에 따르면 2022년 TV홈쇼핑의 방송 매출 비중은 전체의 49.4%를 차지해 사상 처음으로 50%를 밑돌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수입의 절반을 방송에서 거둔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료방송사업자들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결국 TV로 방송을 해야 매출의 절반을 유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유료방송사업자들이 달라는 대로 수수료를 줘야만 하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유료방송사업자 쪽에서도 홈쇼핑회사들을 상대로 송출수수료 인상을 압박하는 것이 편하다.
유료방송사업자는 전체 매출의 30~40%를 홈쇼핑업체의 수수료로 벌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의 매출 규모가 적다면 송출수수료의 무리한 인상은 불가능했을 수 있다. 하지만 홈쇼핑 주요 7개 업체 합산으로 해매다 3조 원가량을 꾸준히 벌다 보니 유료방송사업자들로서도 수수료 인상을 강제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 홈쇼핑업계와 유료방송사업자의 송출수수료 갈등은 십수년째 반복되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줄어들지 않는 데에는 그럴 만한 여러 사정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콘텐츠진흥원> |
홈쇼핑업계는 예전부터 송출수수료 문제를 사업의 중요한 위협 요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현대지에프홀딩스는 공시자료에서 “유료방송사업자와 홈쇼핑사업자 사이의 홈쇼핑 송출수수료 계약 관련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며 “송출수수료 인상은 현대홈쇼핑을 포함한 홈쇼핑업체의 수익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투자 시 유의하기 바란다”고 적어놨다.
롯데쇼핑도 홈쇼핑부문의 산업 성장성과 관련해 “T커머스와 라이브커머스 고성장에 따른 소비 분산, OTT 서비스 이용 증가에 따른 시청률의 감소, 송출수수료의 지속적 증가와 경쟁 심화로 성장을 위협받고 있다”며 송출수수료 문제가 성장 둔화의 한 원인이라는 점을 짚었다.
한국TV홈쇼핑협회에 따르면 2012년 8670억 원 수준이던 홈쇼핑 송출수수료는 2022년 1조9065억 원까지 늘었다. 해마다 약 8%의 인상률을 보인 것인데 이 기간 주요 7개 홈쇼핑회사의 합산 매출은 3조4천억 원대에서 2조9천억 원대까지 줄었다.
홈쇼핑회사들은 송출수수료 부담을 낮추기 위해 유료방송사업자들에게 매달리기도 한다.
홈쇼핑업계의 한 관계자는 “송출수수료를 인하해달라고 요구해봤지만 들어주지 않아 방송 채널을 뒷 번호로 옮겨달라고까지 해봤다”며 “하지만 이마저도 들어주지 않고 ‘로얄 채널’ 배정을 고집하는 경우가 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홈쇼핑채널은 지상파 방송과 위치를 고려해 S급 채널(지상파 4개 채널의 사이에 위치한 채널), A급 채널(지상파 채널과 한 쪽만 닿아있는 채널), B급 채널로 구분된다.
고객에게 얼마나 자주 채널을 노출하느냐에 따라 수익이 좌지우지되는 홈쇼핑업체 입장에서는 S급 채널을 배정받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유료방송사업자가 그 대가로 홈쇼핑업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의 송출수수료를 요구하다보니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1~10번 사이의 채널이 아닌 20~30번대로 채널을 이동하려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실제로 KT가 2018년 롯데홈쇼핑에 2배 이상의 송출수수료를 제시했던 적이 있는데 그 결과 롯데홈쇼핑은 올레TV의 6번 채널에서 30번 채널로 이동했다.
현대홈쇼핑도 2019년 LG유플러스와 채널 편성 및 송출수수료 협상을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방송통신위원회에 IPTV 송출수수료 관련 조정을 신청했다. 결국 갈등은 현대홈쇼핑이 황금 채널로 평가받는 10번에서 28번으로 채널을 변경하면서 수습됐다.
정부에서도 홈쇼핑업계와 유료방송사업자 사이의 송출수수료 갈등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2022년 10월4일 열린 과학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방송 매출의 60%를 송출수수료로 내는 것은 많다고 생각한다”며 “지금의 산정 기준이 시대에 맞는지 다시 면밀히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현대지에프홀딩스는 이 장관의 발언에 대해 “기존과 같이 송출수수료에 대해서는 자율적인 계약이라는 정부의 입장이 뒤바뀌고 장관이 송출수수료에 문제가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며 “송출수수료 인상 건에 대해 긍정적 상황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됐다”고 투자설명서에서 밝혔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