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취임 전 ‘조용한 내조’를 선언했던 김건희 여사는 임기 초반 외부 일정이 드물었으나 1년이 지난 현재 윤 대통령 못지 않은 활발한 행보를 하고 있다. 대통령 배우자로서 역할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함께 관련 법 제정과 공식 전담 조직 마련 등 배우자 활동의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 김건희 여사가 5월7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배우자 기시다 유코 여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9일 대통령실 등에 따르면 10일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1년을 앞두고 김건희 여사는 다양한 일정을 수행하고 있다.
김 여사는 7일부터 1박2일 동안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친교 일정의 일환으로 부부동반 관저 만찬을 진행했다. 기시다 유코 일본 총리 부인과 진관사 수륙재와 리움미술관 ‘조선 백자전’을 관람하기도 했다.
김 여사는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기간 동안에도 단독일정 7개를 소화했다.
김 여사의 단독 일정은 △넷플릭스 최고콘텐츠책임자와 만남 △워싱턴 보훈요양원 방문 △북한 인권 간담회 참석 △질 바이든 여사와 내셔널갤러리 전시관람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남편과의 환담 △문화체육관광부와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양해각서(MOU) 체결식 참석 등이다.
이밖에 국빈 만찬에선 배우 안젤리나 졸리와 만나 인권과 동물권, 환경 보호 등에 관련한 대화를 나누고 동물권 개선 문제를 지지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김 여사는 최근 정책 관련 발언도 늘었다. 김 여사는 지난달 “윤석열 정부 임기 안에 개 식용 금지 추진이 제 본분”이라고 말하고 “납북 문제에 관련해서는 북한에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발언하는 등 구체적 정책 목표와 방향 등을 제시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 방미 과정에서 대통령실이 넷플릭스 투자 유치 과정을 김건희 여사에게 보고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김 여사가 보고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두고 논란이 불거진 일도 있다.
야권에서는 김건희 여사의 늘어난 행보를 탐탁지 않게 보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8일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김건희 여사 단속 좀 하시기 바란다”며 “부부 정권, 공동 대통령 아니냐는 소리 안 나오게 말이다”고 지적했다.
임기 처음부터 김건희 여사가 활발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김건희 여사는 2021년 12월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자신의 허위 이력 논란이 커지자 ‘조용한 내조’를 선언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당선되면 배우자를 보좌하는 제2부속실을 해체하겠다고 공약하며 이를 뒷받침했다. 윤 대통령은 영부인 호칭의 사용 또한 금지하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5월 윤 대통령은 제2부속실을 폐지했다.
김건희 여사도 봉하마을에 지인을 대동하는 등 몇 번 논란이 일기는 했으나 가급적 공개일정을 자제하고 봉사활동에 참여하며 조용한 내조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김 여사의 행보가 본격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올해부터다. 1월11일 대구 서문시장 단독 방문을 시작으로 공식 석상 노출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를 두고 올해 초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코바나 협찬 의혹 등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면서 김 여사의 행보가 확대된 것이라는 분석이 존재한다.
2월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 자체는 유죄로 판결이 났고 김건희 여사의 계좌가 시세 조종에 동원됐다는 사실이 법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다만 도이치모터스 사건 전주 가운데 가장 개입 정도가 높다고 여겨지는 손모씨가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아 김 여사도 사실상 무죄를 받은 것과 다름없다는 해석이 나왔다.
코바나컨텐츠 협찬 의혹은 3월 검찰이 모두 무혐의 처분을 내리면서 사건이 종결됐다.
대통령실은 김건희 여사의 최근 행보가 예전보다 늘어났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언론 공개 일정이 많아졌을 뿐이며 요청이 들어온 행사를 선별해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영부인에게 정치적 역할을 아예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영부인은 민간인이지만 대통령과 함께 국내외 주요 행사에 참석하고 때로는 대통령 대신 대외 활동에 나서며 사실상 공직자로서 역할도 수행하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이 크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배우자 엘리너 루스벨트가 여성 인권 증진과 인종차별 철폐 활동을 한 것처럼 대통령이 챙기기 힘든 약자 보호 분야에 기여하기도 한다.
다만 지금 상황은 영부인 전담 조직이 공적인 시스템 아래에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길 여지가 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제2부속실장을 지낸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4월28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영부인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인정한다"면서 "대통령실 조직 편제를 통해 영부인 활동을 공식화하지 않으면 영부인으로 해야할 역할조차 비판의 대상에 오를 수밖에 없다"고 바라봤다.
대통령실 내에 ‘배우자팀’이 있기는 하지만 책임자가 모호하고 관련 업무 진행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김 여사의 일정 또한 취재진 대동 없이 대통령실이 사후에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때가 많다.
김 여사의 발언과 행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메시지를 제대로 관리할 공적 보좌, 책임의 대상이 필요하다는 주장 또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제2부속실의 재설치나 대통령 배우자법을 제정해 김건희 여사의 일정을 공적 시스템 안으로 포함시켜야 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4월27일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 규정을 뼈대로 하는 '대통령 배우자법'을 발의하겠다고 예고하기도 했다.
다만 대통령실은 제2부속실 설치를 논의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된다. 윤 대통령 공약으로 없앤 만큼 다시 설치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많다. 김홍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