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


조정호는 1958년 10월 5일 인천에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4남으로 태어났다.

미국 보스턴의 대처고와 서던캘리포니아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에서 금융전공으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한항공 차장으로 입사해 구주지역본부에서 일하다가 한일증권으로 옮겼다. 한일증권에서 이름이 바뀐 한진투자증권에서 전무로 일하다가 한진그룹 계열 동양화재해상보험으로 옮겨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조정호는 한진그룹에서 가장 먼저 홀로서기에 나섰다. 한진투자증권과 동양화재를 메리츠증권과 메리츠화재로 사명을 변경하고 메리츠증권 회장에 올랐다.

부친인 조중훈 창업주가 세상을 뜨자 메리츠화재, 메리츠증권, 한불종금 등 3개 금융회사를 계열분리했고 메리츠화재, 메리츠증권, 메리츠종합금융 등 3개 계열사를 토대로 메리츠금융그룹을 출범시켰다.

지주사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으로 취임했으나 보수와 배당을 합쳐 136억 원을 받은 데 대한 비판이 일자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뒤 메리츠종금에서 미등기임원 신분으로 상근회장을 맡다가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으로 복귀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한진가(家)의 막내가 메리츠가(家)라는 새 명문가문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정호가 회사의 외형을 확대하면서 실적을 견고하게 이어올 수 있던 비결로 차별화된 경쟁력 구축이 꼽힌다. 금융업계에서 나홀로 질주를 하고 있는 조정호의 리더십을 조명하는 전문가들이 늘고 있다.

인재중심의 전문경영인 체제와 성과보상주의 기업문화를 내세워 회사의 경쟁력을 차별화시켰다. 김용범 메리츠화재 사장은 그에 대해 “회사가 필요로 하는 인재와 몸값 흥정을 하지 않고 연봉은 달라는 대로 주고 업무는 믿고 맡긴다”고 설명했다.

지주사를 총괄하고 있으나 각 계열사의 전문경영인들이 소신경영을 할 수 있도록 이들에게 경영 전권을 맡기고 있다. 그는 사람이 전부라는 경영철학을 근간으로 하여 인재들을 채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그룹의 성장을 이끌었다.

조정호의 '인재 중심 경영'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가족 중심 경영'과 비교되기도 한다.

조양호 회장은 한진해운이 자율협약에 들어가면서 리더십이 위기에 직면해있다. 조정호의 메리츠금융그룹의 규모가 커지자 자율협약을 신청한 한진해운과 상황이 정반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조정호는 계열사를 분리할 때 주식자산이 네 형제들 가운데 1450억 원으로 가장 적었으나 현재 1조2천억 원 정도로 가장 많아졌다.

조정호는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형식에 얽매이는 것들을 회사에서 없앴다. 회사에서 전자결재, 자율복장제, 정시퇴근 등을 도입해 이를 고유의 기업문화로 정착시켰다. 이를 통해 메리츠금융그룹에서는 창의적 아이디어가 속출했고 이직률도 크게 감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직원들이 성과를 낸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메리츠종금증권의 경우 기존에 고정급은 높고 성과급이 낮은 임금체계 대신 성과에 따라 수익의 절반을 인센티브로 되돌려주는 임금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성과가 있는 곳에 파격적으로 보상하라’는 조정호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메리츠종금증권은 다른 증권사와 마찬가지로 영업지점을 작년에 20개에서 5개로 확 줄였다. 하지만 영업직군 자리는 늘려 초대형 거점 점포로 만들었다. 영업직군에는 ‘신임금체계’를 도입했다.

증권과 종금을 합병해 메리츠종금증권을 출범했는데 이를 두고 신의 한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 최초로 보험금융지주 시대를 연 장본인으로 평가받는다.

외부에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는 은둔형 경영자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83년 대한항공 구주지역본부 차장으로 입사했다. 다음해에 부장에 올랐다.

1989년 한일증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일증권의 사명이 한진투자증권으로 바뀌고 나서 전무이사까지 승진했다.

1995년 동양화재해상보험 전무, 1996년 같은 회사 부사장에 올랐다.

1997년 한진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됐고 1999년에는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동양화재보험이 메리츠화재로 사명이 바뀌고 나서 이사를 거쳐 부사장을 역임했다.

메리츠종합금융이 출범하고 나서 이사로 지냈다. 2000년에는 한진투자증권을 전신으로 하는 메리츠증권의 대표이사 부회장과 회장도 맡았다.

2007년 6월 메리츠화재해상보험 상근회장과 비상근이사를 지냈다.

2011년 8월에는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에 올랐다가 2013년 6월 고액 연봉 논란을 의식해 메리츠금융지주와 메리츠화재 회장에서 물러났다.

2014년 3월 메리츠금융지주 사내이사로 선임되면서 경영일선에 다시 복귀했다.

◆ 학력

미국의 사립인 대처(THACHER)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처고등학교는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이 졸업한 학교로 유명하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 가족관계

고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4남이다.

구자학 아워홈 회장의 차녀 구명진씨와 결혼해 슬하에 조원기씨, 조효재씨, 조효리씨 등 1남2녀를 뒀다.

장모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둘째딸 이숙희씨다. 이를 두고 조정호가 한진과 삼성, LG의 3대 그룹을 연결하는 인간고리 역할을 한다는 말도 있다.

◆ 상훈

◆ 상훈

어록


“양질의 사람들이 와서 일하고 싶은 회사, 명성이 높은 회사를 만들자.” (최희문 메리츠증권 사장을 부사장으로 임명하며)

◆ 평가

'한진가(家)의 막내가 메리츠가(家)라는 새 명문가문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정호가 회사의 외형을 확대하면서 실적을 견고하게 이어올 수 있던 비결로 차별화된 경쟁력 구축이 꼽힌다. 금융업계에서 나홀로 질주를 하고 있는 조정호의 리더십을 조명하는 전문가들이 늘고 있다.

인재중심의 전문경영인 체제와 성과보상주의 기업문화를 내세워 회사의 경쟁력을 차별화시켰다. 김용범 메리츠화재 사장은 그에 대해 “회사가 필요로 하는 인재와 몸값 흥정을 하지 않고 연봉은 달라는 대로 주고 업무는 믿고 맡긴다”고 설명했다.

지주사를 총괄하고 있으나 각 계열사의 전문경영인들이 소신경영을 할 수 있도록 이들에게 경영 전권을 맡기고 있다. 그는 사람이 전부라는 경영철학을 근간으로 하여 인재들을 채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그룹의 성장을 이끌었다.

조정호의 '인재 중심 경영'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가족 중심 경영'과 비교되기도 한다.

조양호 회장은 한진해운이 자율협약에 들어가면서 리더십이 위기에 직면해있다. 조정호의 메리츠금융그룹의 규모가 커지자 자율협약을 신청한 한진해운과 상황이 정반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조정호는 계열사를 분리할 때 주식자산이 네 형제들 가운데 1450억 원으로 가장 적었으나 현재 1조2천억 원 정도로 가장 많아졌다.

조정호는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형식에 얽매이는 것들을 회사에서 없앴다. 회사에서 전자결재, 자율복장제, 정시퇴근 등을 도입해 이를 고유의 기업문화로 정착시켰다. 이를 통해 메리츠금융그룹에서는 창의적 아이디어가 속출했고 이직률도 크게 감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직원들이 성과를 낸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메리츠종금증권의 경우 기존에 고정급은 높고 성과급이 낮은 임금체계 대신 성과에 따라 수익의 절반을 인센티브로 되돌려주는 임금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성과가 있는 곳에 파격적으로 보상하라’는 조정호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메리츠종금증권은 다른 증권사와 마찬가지로 영업지점을 작년에 20개에서 5개로 확 줄였다. 하지만 영업직군 자리는 늘려 초대형 거점 점포로 만들었다. 영업직군에는 ‘신임금체계’를 도입했다.

증권과 종금을 합병해 메리츠종금증권을 출범했는데 이를 두고 신의 한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 최초로 보험금융지주 시대를 연 장본인으로 평가받는다.

외부에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는 은둔형 경영자다.

◆ 기타

2014년 9월 메리츠금융지주가 사업확대를 위해 추진한 1663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에서 자신의 지분율 만큼인 1175억 원의 사재를 투입했다. 당시 메리츠종금증권은 유상증자 성공으로 자기자본 규모를 1조6천억 원 대로 늘렸다.

메리츠금융지주의 지분 67.7%를 지니고 있는 최대주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