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IMF(국제통화기금) 내에서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한국은행 국정감사에서 외환보유고의 적정성을 묻는 정태호 더불어민주당의 의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오늘Who] 이창용 첫 한은 국감 신고식, 흔들림 없는 편안함 보여주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재위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대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날 국감에서 야당 의원들은 한국은행이 현재 국내외 경기상황을 심각하게 보지 않고 지나친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며 이 총재를 비판했다.

정태호 의원은 “최근 국내 주요 지표들이 다 안 좋은데 한국은행 총재의 메시지는 너무 낙관적이다”며 “모든 것을 다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시장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보다 물가안정에 확실히 비중을 두고 메시지를 정확히 던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용진 민주당 의원도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이라는 단일목표를 지닌 중앙은행인데 지금까지 결과를 보면 실망스럽다”며 “물가를 잡기 위한 금리인상 조치들이 너무 늦어 안이하다”고 비판했다.

이 총재는 이를 놓고 “물가안정을 최우선에 두고 금리정책을 펼치고 있다”며 “현재 경기상황을 결코 가볍게 보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양기대 민주당 의원은 “현재 복합 경제위기를 수동적 시각에서 너무 한가하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했는데 이 총재는 이와 관련해 “변명처럼 들릴 수 있지만 한국은행을 대표해 현재 상황을 한가하게 보고 있지 않다고 말씀드린다.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 총재는 오전 국감에서 야당 의원들의 집중된 질문을 받으면서도 시종일관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경제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의원들의 지적에 동의한 것과 달리 외환보유고 관련 질의에는 우려라는 말의 싹을 잘라내듯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다른 나라와 비교해 한국의 GDP(국내총생산) 대비 외환보유액 비율이 낮다는 배준영 국민의힘 의원의 지적에는 “고정환율제나 변동환율제를 취하고 있는 나라에 따라 레벨이 굉장히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 비교가 어렵다”며 적극 방어하기도 했다.

이날 한국은행 국감장에서 외환보유고가 이슈가 된 것은 9월 외환보유고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전날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9월 말 외환보유고 4167억7천만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8월 말과 비교해 한 달 사이 196억6천만 달러 감소했다. 2008년 10월 이후 약 14년 만에 가장 많이 줄었다.

한국은행은 이와 관련해 이례적으로 사전 브리핑을 열고 원/달러 환율 상승에 따른 환율 방어에 나서면서 외환보유고가 크게 줄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은 매월 초 전월 기준 외환보유고 현황을 정기적으로 발표하는데 보통 수치가 담긴 자료만 배포해 왔고 이와 관련한 브리핑을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한국은 1997년 외환보유액 부족으로 IMF 금융위기를 겪은 경험이 있다.

코로나19 확산 초기부터 이어진 경기 불확실성이 코로나19가 가라앉은 올해부터는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미국의 고강도 긴축 등 글로벌 불확실성 확산에 따라 오히려 커지고 있는 만큼 시장은 외환보유고 규모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 총재는 “현재 한국의 외환보유고 상황은 IMF에서 권고하는 적정 외환보유고 기준치와 비교해 100% 조금 밑에 있는 수준이다”며 “IMF 기준은 보통 80~150%를 적정치로 보는데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절대 낮은 수준이 아니다”고 말했다.

한국과 미국의 기준금리 역전, 달러화 강세 기조 상황에서 달러 유출을 막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현재 달러 유출 상황은 달러 강세에 따라 전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며 “예전에 겪은 위기 때와 다르게 원/달러 환율이 오르는 과정에서 유동성 문제나 달러 유출 문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대답했다.

9월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고 외환보유고가 빠르게 줄어든 만큼 국감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통화스와프 이야기도 나왔는데 이 총재는 이와 관련해서는 말을 아꼈다.

이 총재는 “통화스와프 결정은 결국 미국 연준이 하는 것”이라며 “연준과 어떤 논의를 하고 있느냐 역시 한국이 미국 연준의 결정에 관여하는 느낌을 줄 수 있어 공개적 자리에서 말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이 “정부와 한국은행이 통화스와프의 시급성에 대해 자꾸 톤다운을 하고 있는데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기대를 낮추는 게 아닌가” 묻자 이 총재는 “통화스와프를 놓고 저희가 언제 된다 어떤 상태에 있다, 이렇게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보시면 된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현안인 금리인상과 관련해서는 물가상승률이 잡힐 때까지 금리인상 기조를 이어간다는 원론적 대답을 내놓으면서 12일 예정된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를 이유로 민감한 질문은 피해갔다.

한국은행은 다음주 열리는 금통위에서 기준금리 인상폭을 결정하는데 통상 금통위 위원들은 금통위 일주일 전부터 통화정책 방향을 유추할 수 있는 발언을 삼가는 이른바 블랙아웃 기간을 갖는다.

이 총재는 금리인상 속도, 한국과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차이 전망 등을 묻는 질문에 “다음주 금통위를 앞두고 시사하는 바가 있을 수 있어 대답이 어렵다”며 “비슷한 질문이 금통위 이후 기자회견 때 나올 수 있는 만큼 그때 말씀드리도록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날 오전 국감에서 많은 의원들이 이 총재에게 기준금리 관련 질의를 던졌으나 금통위를 앞두고 있어 답변이 어렵다는 이 총재의 대답을 문제 삼은 이는 없었다.

이 총재를 향한 의원들의 신뢰도 한몫한 듯했다.

이 총재는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출신으로 이명박정부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거쳐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IMF 아시아태평양국 국장 등을 지냈다.

3월 대통령선거 이후 문재인정부 말기 추천돼 선임됐을 정도로 여당과 야당 모두에서 거시경제 전문가로 인정 받았다. 이날 국감에서도 의원들의 질의에 답할 때마다 진중한 목소리로 '존경하는 의원님'을 먼저 부르는 낮은 태도를 보이면서도 정확하게 사안을 짚어내는 전문적 설명은 신뢰감을 더했다.

시장에서는 한국은행이 이번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0.50%포인트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할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국은행은 올해 4월부터 8월까지 4번의 금통위에서 4번 연속 기준금리를 올렸다. 한국은행이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4번 연속 올린 것은 한국은행 설립 이후 처음이다. 이한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