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나 레이먼도 미국 상무부 장관이 9월6일 백악관 브리핑에서 반도체 지원법과 관련한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 |
[비즈니스포스트] 미국 상무부가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반도체 지원 법안과 관련한 세부 내용을 공개했다. 반도체 시설 투자와 관련해 제공되는 지원금 규모가 예상보다 작은 수준에 그친다.
정부 지원을 기대해 미국에 반도체공장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삼성전자가 받게 될 실질적 혜택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나 레이먼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현지시각으로 6일 백악관에서 브리핑을 열고 약 500억 달러(69조 원)에 이르는 반도체 지원 법안의 예산 배정 계획을 공개했다.
그는 반도체 지원법이 미국 내 반도체 생산 활성화와 공급망 구축, 연구개발 역량 강화와 일자리 창출을 주요 목표로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체 예산 가운데 절반 정도인 280억 달러는 최신 반도체 공정을 활용하는 시스템반도체 및 메모리반도체 공장 투자를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데 쓰인다.
100억 달러는 자동차와 의료기기, 통신장비 등에 쓰이는 구형 공정 반도체 생산 지원에 활용되며 110억 달러 가량은 반도체 연구개발 관련한 예산으로 활용된다.
상무부는 내년 2월까지 지원 대상에 해당하는 반도체기업의 신청서를 받아 가능한 이른 시일에 실질적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삼성전자와 미국 인텔, 마이크론, 대만 TSMC와 글로벌웨이퍼 등 반도체기업 및 소재업체는 반도체 지원법 시행을 기대하고 지난해부터 잇따라 미국 내 공장 투자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세부 내용을 보면 지원 규모가 예상보다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졌다.
첨단 반도체공장 시설 투자에 직접적으로 지원되는 금액이 전체 예산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여러 기업들이 정해진 기준에 맞춰 나눠야만 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반도체기업들이 대부분의 지원금을 독식하면서 결국 반도체 지원 법안이 ‘미국 반도체기업 지원법’에 그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마이크론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지원법에 서명하는 날 기습적으로 향후 10년 동안 모두 1500억 달러를 미국 등 지역의 반도체 생산 확대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인텔은 미국 오하이오주 반도체공장 신설과 애리조나주 공장 증설에 모두 400억 달러의 투자 계획을 잡아두고 있다. 최근 오리건주에도 시설 투자 확대 계획이 발표됐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에 170억 달러, TSMC는 애리조나주에 120억 달러를 들여 새 반도체 파운드리공장을 짓고 있는데 미국 반도체 경쟁사들과 비교하면 규모가 다소 작은 편이다.
280억 달러의 지원금이 전체 투자금액에 비례해 제공된다면 삼성전자 등 미국을 제외한 해외 반도체기업이 받는 인센티브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상무부는 지원을 신청하는 반도체기업이 중장기적 측면의 경제효과와 협력사 및 고객사 확보 방안, 저소득층 및 소수자 지원 계획 등을 제출하면 좋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보조금 제공 대상과 기준을 선정하는 데 주관적 요소를 포함한 점은 결국 미국 기업들에게 더 큰 이익을 주기 위한 포석일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미국 정부의 전기차 지원법에 이어 반도체 지원법마저 자국 기업과 해외 기업을 차별하는 방식으로 시행돼 삼성전자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한국 패싱’이 이뤄질 가능성도 고개를 든다.
바이든 정부는 최근 전기차 보조금 제공을 포함한 인플레이션 완화법 시행 과정에서 미국에 생산공장을 보유한 기업에만 지원금을 주는 방식으로 현대자동차와 기아 등에 타격을 입혔다.
현대차가 미국에 전기차 공장 신설 계획을 밝혔음에도 당분간 테슬라와 GM, 포드 등 미국 자동차기업에 중점적으로 지원을 제공해 자국 기업을 육성하는 데 주력한다는 것이다.
반도체산업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가 내세운 조건을 만족시키기 유리한 인텔과 마이크론 등 기업이 생산 및 연구개발 투자 지원을 독식하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상무부는 지원을 받은 기업이 중국에 최소한 10년 동안 첨단 반도체 생산투자를 벌인다면 투자금을 회수하는 조치를 시행할 수 있다는 조건도 강조했다.
중국에 반도체공장을 운영하며 꾸준한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TSMC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조치에 해당한다.
레이먼도 장관은 “우리는 반도체기업들의 성장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 것이 아니다”라며 “지원을 받는다면 투자 규모를 더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삼성전자가 미국 반도체공장을 신설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금전적 부담을 덜고 경쟁력을 높이는 일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레이먼도 장관은 백악관 브리핑에서 “최근 여러 반도체기업들이 대규모 투자 계획을 내놓았다”며 마이크론과 인텔, 온세미컨덕터 등 미국 반도체기업을 예시로 들었다. 삼성전자와 TSMC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