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외부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그룹 총수 취임 초부터 ‘40세가 되면 외부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뜻을 보였지만 50대에 접어든 현재도 공개적 대외활동 모습을 접하기는 힘들다.
그만큼 신중한 경영자라는 얘기다. ‘베일 속 조용한 행보’ ‘돌다리를 두드리지도 않는다’ 등의 수식어가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심사숙고를 통해 결론을 내면 뚝심으로 끝장을 보는 모습도 보인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정지선 회장의 경영행보는 더욱 그렇다.
정 회장의 뚝심 행보가 롯데와 신세계, 현대백화점 구도에서 ‘만년 3위’라는 꼬리표를 떼는 기반을 닦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7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현대백화점그룹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격적 경영기조를 보이는 유통업계의 라이벌 롯데나 신세계와 경쟁에서 한 발 물러서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은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이 6일 광주광역시에 미래형 문화복합몰 ‘더현대광주(가칭)’를 만들겠다고 밝힌 것은 이런 평가를 단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례다.
앞서 광주광역시는 복합쇼핑몰 유치를 위한 민간기업 3~4곳을 후보자로 보고 복합쇼핑몰 개발사업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 기업은 거론되지 않았지만 광주신세계와 롯데쇼핑, 현대백화점 등이 물망에 올라 있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었다.
이 가운데 ‘내가 하겠다’며 가장 먼저 손을 든 곳이 바로 정 회장이었다. 롯데와 신세계의 행보를 보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과거와 결이 달라진 것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의 발표가 나오자 롯데와 신세계가 뒤늦게 각각 “우리도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힌 것은 현대백화점그룹의 타이밍이 빨랐다는 의미다. 게다가 롯데와 신세계는 더현대광주 설립과 같은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정 회장은 더현대서울의 성공 공식을 한층 업그레이드해 더현대광주에 이식하겠다는 포부도 보였다. 더현대서울은 현대백화점그룹이 2021년 서울 여의도에 개장한 백화점으로 오프라인 유통기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현대’라는 글자를 그대로 따와 호남에 또 다시 더현대의 브랜드 가치를 전파하겠다는 것은 다른 유통업계와 비교할 때 충분히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도 해석된다.
현대백화점그룹에 ‘
정지선 체제’가 들어선지 약 15년 만에 정 회장의 색깔이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정 회장은 언론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필요하다면 적극적 대외 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달리 늘 언론 노출을 꺼렸다.
만 30세에 불과했던 2002년 당시 재계서열 24위인 현대백화점그룹의 총괄 부회장에 오른 뒤 5년 만에 회장으로 승진한 이력은 정 회장이 경영에 유독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으로 줄곧 거론된다.
확실한 업적을 내세울 수도 없고 새로운 사업을 펼치기에도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신중한 모습만이 현대백화점그룹의 생존 전략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 회장의 신중한 태도는 현대백화점그룹이 큰 부침 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현대백화점그룹이 유통업계 1, 2위를 다툰 롯데와 신세계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정 회장이 신중을 거듭하며 그룹을 15년째 이끌면서 이제는 그만의 차별화한 길을 만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정 회장은 다른 유통기업들이 가지 않는 ‘마이웨이’를 걷고 있다.
롯데그룹과 신세계그룹은 이커머스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통합 온라인몰을 강화하며 적자를 감수하고 공격적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달리 현대백화점그룹은 계열사들의 온라인몰을 고유한 색채를 가진 전문몰로 키우는 데 주력했다.
현대백화점이 운영하는 쇼핑몰 더현대닷컴과 식품 전문 온라인몰 현대식품관투홈, 현대H몰(현대홈쇼핑), 더한섬닷컴(패션, 한섬), 리바트몰(가구, 현대리바트), 그리팅몰(식품, 현대그린푸드) 등이 그렇다.
이 방식은 일각에서 ‘거꾸로 전략’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안정적 수익 창출이라는 긍정적 성과로 나타났다.
증권업계는 현대백화점그룹이 전문몰에서 2021년에 매출 4조7천억 원, 영업이익 1400억 원을 거둬 성장세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롯데그룹과 신세계그룹이 온라인몰에서 각각 수백억 원 규모의 영업손실을 낸 것과 대비된다.
남들이 다 뛰어드는 시장에서 출혈경쟁을 피하면서 나름 소득도 알뜰히 챙겨간 셈이라고 볼 수 있다. 뚝심으로 전문몰 전략을 밀지 않았다면 거둘 수 없었던 정 회장의 성과다.
정 회장은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뚝심 경영의 결실을 맺었다.
더현대서울은 유통업계가 깨지 못했던 낡은 틀을 여러 곳에서 깬 매장으로 주목받았다. 매장의 전체 면적 절반 이상을 휴식공간으로 조성하고 건물의 천장을 유리로 만든 것들이 대표적 사례다.
새 콘셉트의 매장은 주말에 한가했던 여의도에 MZ세대를 불러모으는 데 성공하며 유통업계에 ‘현대백화점이 혁신’이라는 확실한 신호를 줬다.
더현대서울은 이미 손익분기점에 다다른 것으로 파악되며 현재 매달 매출 700억~800억 원대를 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세를 이어간다면 개장 이후 역대 최단 기간에 연 매출 1조 원을 돌파한 매장에 이름을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정 회장은 코로나19에 따른 불황에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특히 면세점사업을 보면 시내면세점과 공항면세점에서 철수하던 다른 유통기업과 달리 정 회장은 서울 동대문점과 인천공항점 등에 진출하며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 일찌감치 대비했다.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이 되면 현대백화점이 면세점사업에서 실적에 탄력을 받을 수 있다고 증권가가 내다보는 이유다.
정 회장은 사업적으로만 뚝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친환경 경영에서는 고집스러울 만큼 뚝심이 강하다.
쇼핑백을 친환경 쇼핑백으로 만들거나 종이영수증 대신 전자영수증을 기본 발급하는 것으로 바꾼 일, 최고경영자 산하에 최고지속가능경영책임자 자리를 만든 일 등은 정 회장이 친환경 경영에 얼마나 진심을 보여주는지 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