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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고영수와 한국출판인회의 회장대행 윤철호를 비롯한 출판 관련 단체는 25일 '도서정가제 법률개정에 따른 출판계 결의문'을 채택했다. 사진은 고영수 회장 |
도서정가제가 출판계의 구세주가 될 수 있을까.
오는 11월부터 ‘도서정가제 개정안’이 시행된다. 개정안은 도서 전체 할인금액이 정가의 15%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다.
지금 시행중인 정가제는 발행일로부터 18월이 지난 책은 사실상 무제한 할인판매를 허용하고 있다. 신간의 경우에도 정가 10% 할인에 마일리지, 적립금 등 10%의 간접혜택이 더해져 총 19%까지 할인이 가능하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신간, 구간 구분없이 가격할인은 정가의 10%까지만 할 수 있다. 마일리지나 적립금 할인을 더해도 할인되는 가격이 정가의 15%를 넘을 수 없다. 실용서나 초등학습도서 등 예외도 사라진다.
책의 가격거품을 줄이고 제값을 찾아 출판사와 서점을 살리자는 것이 이 법의 취지다.
일단 대부분의 출판사는 오랜 숙원을 풀게 됐다며 환영하고 있다. 온라인서점의 무분별한 가격인하로 몇몇 대형출판사를 제외한 중소출판사들은 고사직전에 놓였기 때문이다. '멸종위기'에 놓여 있던 동네서점 역시 개정안을 반기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의 시선은 싸늘하다. 소비자들은 이 법의 취지처럼 책값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비싼 책값을 그대로 받고 할인은 하지 않아 생기는 이익을 출판계와 서점이 독식하려 한다는 부정적 인식을 품고 있다.
몇몇 대형출판사도 내색은 하지 않지만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물량공세로 많은 수익을 내던 대형출판사들은 도서정가제로 인해 '폭탄세일'이 막히는 게 달갑지 않다.
◆ 편법할인 사라질까
개정된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 종류에 상관없이 같은 할인율을 적용받게 된다. 현행 도서정가제에서 18월이 지난 구간, 실용도서 등 예외조항이 존재했다. 이 때문에 할인이 되지 않는 인문사회도서를 실용도서로 바꿔 등록하는 편법이 기승을 부렸다.
단적인 예가 소설 ‘레미제라블’이다. 영화 레미제라블 개봉 이후 레미제라블 소설이 한창 인기를 끌자 어느 출판사는 한글판에 영문판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외국어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실용서로 허가를 받은 후 반값에 판매했다.
이후 책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다른 유명 출판사를 제치고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앞으로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 이런 편법은 불가능해진다. 소설과 실용서적이 같은 할인율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유형의 편법할인이 등장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가장 많은 얘기가 나오고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중고서점을 통한 편법할인이다.
새로 시행되는 도서정가제에도 물론 예외사항이 있다. ‘최종소비자에게 판매되었던 간행물로서 다시 판매하는 중고간행물’은 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출판사나 서점들이 새 책을 중고로 속여 중고서점을 통해 할인판매를 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신간을 재구매해 중고서적으로 분류한 뒤 50% 할인된 가격으로 내다 팔아 출판사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관련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정교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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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 모습. 오는 11월 시행되는 도서정가제가 위기의 출판계를 구할 것이라는 기대가 엇갈린다. |
◆ 책값 정상화될까
출판업계는 중장기적으로 책값이 싸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동안 출판사들이 할인판매를 고려해 책값을 높게 정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품이 빠지면서 책값이 정상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조재은 출판인회의 유통위원장은 “앞으로 책의 평균 정가가 10~20% 정도 싸질 것이고 가격경쟁이 완화돼 콘텐츠의 다양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에서 한 번 올라간 책값은 내려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부정적 시각도 존재한다. 결국 책값이 오른 상태에서 할인도 불가능해지면서 소비자들의 부담만 높아질 것이라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출판계는 지난 25일 도서정가제 개정안 시행과 관련된 우려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직접 나섰다.
대한출판문화협회와 한국출판인회의를 비롯한 출판 관련 단체는 이날 결의문을 발표해 개정된 도서정가제가 책값 상승을 불러올 것이라는 출판계 일부의 의견에 반박했다.
이들은 “책은 가격이 아니라 가치로 경쟁해야 한다"며 “도서정가제 개정안이 국민의 독서증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적정한 도서정가 책정과 재조정가 산정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고영수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은 이번 결의문 채택과 관련해 "개정 도서정가제 시행과 정가제 강화에 따른 부담이 독자의 몫이어서는 안 된다는 출판계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출판사 스스로 책값을 낮추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출판인은 “어제까지 반값 할인 했던 책이, 새 도서정가제 실시로 정가를 받을 경우 소비자의 입장에서 가격부담을 크게 느낄 것”이라며 “기존에 반값 할인했던 책들의 경우 출판사들이 스스로 정가를 낮추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 동네서점 햇볕 기대, 대형출판사들 아쉬움 표시
1천여 서점을 회원사로 둔 한국서점조합연합회는 즉시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그동안 대형서점과 온라인서점들이 출판사들로부터 정가의 45~65%에 책을 받아 대폭 할인행사를 하면서 동네서점들은 몰살직전의 위기에 몰려 있었던 탓이다.
개정된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 인터넷서점과 중소서점에 대한 출판사의 책공급가 격차가 줄어들게 돼 동네서점의 숨통을 틔워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책 구경은 동네서점에서, 책 구입은 온라인서점에서’라는 인식도 개선될 것으로 보여 동네서점 활성화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미 온라인시장 위주로 재편된 상황에서 뒤늦은 법 개정이라는 지적도 있다. 도서생태계가 이미 망가진 상태에서 도서정가제만으로 동네서점이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계획적이기보다 즉흥적으로 책을 구매하는 고객의 비중이 높은 동네서점은 가격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책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은 직접 확인하고 꼼꼼히 따지는 다른 쇼핑과 달리 내용과 저자만을 확인하고 구매하는 즉시성이 작용하기 때문에 온라인서점이 여전히 유리하다”며 “동네서점 활기라는 취지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가장 아쉬워하는 쪽은 전집 등으로 박리다매를 취하던 대형출판사들이다. 세계문학전집을 출판하고 있는 민음사나 문학동네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폭 할인으로 물량공세를 펼칠 수 있는 길이 막히게 됐다.
한국출판연구소 백원근 책임연구원은 “세계문학전집, 아동물 등 전집 장사를 해온 출판사들은 가장 큰 무기였던 특가판매를 원천봉쇄한 도서정가제가 탐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가격거품을 빼고 정가를 제대로 매겨야 한다”면서 “할인경쟁이 사라지면 번역과 디자인 등 품질로 승부를 겨루는 방향으로 출판시장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라고 낙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