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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맹호 민음사 회장 |
“책을 사랑하다, 책을 만들다, 그리고 사라졌다.”
박맹호 민음사 회장은 지난해 우리 시대에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느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했다. 이 말에 박 회장의 여든 인생이 모두 들어있다.
박 회장은 올해 81살이다. 요즘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사무실에 출근한다. 2005년 아들인 박근섭 민음사 사장에게 대표이사 자리를 넘겼지만 여전히 책에 파묻혀 지내며 책을 만들고 있다.
그는 ‘영원한 현역’으로도 불린다.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집으로 배달된 일간지를 정독하고 일할 채비를 한다. 시인 고은은 늘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를 두고 “발상에서 행동 사이에 거의 틈이 없다”고 말했다.
최근 그는 ‘셰익스피어 전집’을 완성해 나가는 중이다. 국내 최초의 ‘운문번역’ 셰익스피어 전집이다. 지난 12일까지 총 5권을 출간했다. 박 회장은 2019년까지 10권을 완간하기로 했다.
민음사는 온전히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고 그의 손에서 컸다. 1966년 종로구 청진동의 한 옥탑방에 문을 연 민음사는 황금가지, 비룡소, 사이언스북스, 황금나침반을 포함해 5개의 자매 출판사를 운영하는 국내 최고의 출판그룹으로 성장했다.
◆ 민음사를 만든 박맹호의 도전정신
박 회장은 자서전에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남들이 가지 않은 분야에 발을 디딜 때 쾌감을 느끼곤 했다”고 말했다.
민음사가 걸어온 길을 보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다양한 시리즈를 기획하고 책에 처음으로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는 등 다른 사람이 하지 않았던 일을 계속 시도했다.
민음사가 출판사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세계 시인선’과 ‘오늘의 시인 총서’ 시리즈를 시작하면서부터다.
박 회장은 당시 우리가 보는 외국시인의 시집이 대부분 일본어판을 중역한 것들이라 제대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으로 외국시를 유학경험이 있는 우리나라 문학가에게 번역하게 했다. 또 독자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원본과 번역본도 나란히 배치해 시집을 냈다.
당시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작업이었다. 원문을 함께 싣기 때문에 번역의 수준이 높아야 하는 부담이 컸다.
이백과 두보의 작품은 고은 시인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는 정현종 시인이 번역과 주석을 맡았다. 번역을 맡은 이들은 대개 프랑스나 독일 등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었고 직업이 시인이었기 때문에 원문도 살리고 시의 맛도 살렸다는 평을 들었다. 시집은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부터 신인 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오늘의 시인 총서’도 발간했다. 그는 신인 시인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해방 전에 활동한 시인들은 목록에서 제외했다. 이 시리즈는 이후 1970~1980년대 시집 붐을 일으키며 시의 전성기를 열었다.
박 회장은 단행본 출판사 최초로 가로쓰기를 도입했다. 그는 완벽한 소리글자인 한글을 쓰는 우리 출판문화에서 가로쓰기는 언젠가 도입해야 할 과제라고 여겼고 곧바로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가 시도한 이후 출판계에서 너나할 것 없이 가로쓰기를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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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맹호 회장. 민음사의 첫 사무실 청진동 옥탑방에서 찍은 사진. |
◆ 사람을 발굴하고 끝까지 믿어주는 안목
박 회장은 여러 명의 인재를 출판계에 끌어들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수많은 작가뿐 아니라 ‘한국 북디자이너 1세대’인 정병규 정병규학교 대표를 발굴했다.
박 회장은 책의 디자인을 내용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책은 예술품”이라며 “책은 내용이 중요함은 물론이요, 독자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책의 디자인이 뛰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책의 분장사’라는 말을 듣고 있는 정병규 대표를 영입했다. 박 회장은 그뒤 “일을 맡긴 이상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대로 정 대표에게 디자인에 관한 전권을 넘겼다.
정 대표는 제1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한수산 작가의 ‘부초’를 디자인했다. 이 표지는 어두운 추상화를 배경으로 제목을 크게 부각시켰는데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당시 소설책 같지 않다는 주변의 우려가 있었지만 박 회장은 정 대표를 끝까지 믿고 지지했다.
박 회장은 이후에도 ‘오늘의 작가상’을 통해 이문열, 박영한, 최승호 등 대형 신인을 발굴해 냈다.
이문열은 ‘사람의 아들’로 제3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작품에 과도한 이념이 드러난다며 논란이 벌어졌다. 박 회장은 그런 논란을 무릅쓰고 이문열을 끝까지 지지했다. 그는 “작가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자”며 “한 가지 장점이 있으면 그것을 끌어올리면 된다”고 심사위원들을 설득했다.
이문열 작가에게 삼국지 연재를 제안한 것도 박 회장이다. 그는 등단한 지 갓 3년밖에 되지 않았던 이문열 작가에게 삼국지 연재를 제안했다. 한문 문장에 익숙하고 문체가 유려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작가는 당시 순수창작물에 매진하고 싶어 했다. 그러자 박 회장은 젊은 이 작가에게 파격적 대우를 해주며 승낙을 받아냈다. 그렇게 시작된 삼국지는 지금까지 1800만 부가 넘게 팔리며 우리나라 출판 사상 최고의 판매고를 올린 책이 됐다.
박 회장은 또 1990년대 초반에 편집자를 주간으로 발탁했다. 그 전까지는 교수나 문인이 주로 출판을 주도했다. 박 회장은 전문 편집자 시대를 열었고 지금도 민음사는 전문 편집자가 중책을 맡아 회사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 박맹호를 키운 거듭된 실패와 아버지의 반대
박 회장이 모든 일에 탄탄대로를 걸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크고 작은 실패를 거듭했다.
그는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애초 영문과를 지원했지만 2지망으로 불문과에 겨우 합격했다. 프랑스어에 흥미가 없어 친구들과 어울리며 소설을 읽어 토론 하는 일에 재미를 붙였고 이것이 뒷날 자산이 됐다.
박 회장은 몇 번이나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계속 떨어졌다. 포기를 생각할 즈음 새롭게 생각이 미친 곳이 바로 출판이었다. 그는 뒷날 “소설은 천재들이 써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며 “지금도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내 능력을 스스로 간파하고 과감하게 소설가의 길을 포기한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1966년 민음사를 창업했지만 크고 작은 실패와 반대에 부닥쳤다. 사업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그까짓 책 파지로 팔아야 몇 푼이냐 벌겠냐”며 당장 그만둘 것을 요구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는 이후 “아버지가 소리치실 때면 더 출판 일에 매달렸다”고 회고했다.
첫 책이 큰 성공을 얻은 후 안일한 생각으로 냈던 책이 망하는 시련도 겪었다. 당시 그는 약사이던 아내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박 회장은 지금도 아내에 대해 “민음사가 어려울 때 박카스 팔아서 도와준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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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맹호 민음사 회장(좌)과 장은수 대표편집인(우) |
◆ ‘백성의 소리’ 이어갈 수 있을까
민음(民音)사는 한자 풀이 그대로 ‘백성의 소리’를 뜻한다. 박 회장은 출판사 이름 내력에 대해 “학생 때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백성의 소리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민음사는 지금 박 회장의 두 아들이 이끌고 있다. 박근섭과 박상준 대표는 아버지를 닮아 민음사를 잘 이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러나 최근 민음사는 위기를 노출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 3월 있었던 해고사태는 민음사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렸다. 당시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받은 신입 디자이너는 “해고의 적법성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민음사가 사람에 대한 실수를 범하는 것에 몹시 화가 난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2012년 출간한 자서전에서 출판계의 위기상황을 거론하며 “동료나 선후배 출판인들의 한없는 열정이야말로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가장 큰 잠재력”이라고 썼다.
박 회장은 또 자서전을 낼 당시 이렇게 말했다. "출판이 후퇴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산업의 규모에 맞춰 확장돼 왔지, 쇠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전에 인문, 사회과학 도서가 출판되지도 않고 팔리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해마다 수많은 책이 쏟아져서 출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앞으로도 독자를 고려한 책을 잘 만들어서 타이밍을 잘 노린다면 출판업은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박 회장은 그동안 5천여 종의 책을 만들어왔다. 그는 출판업이 성장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책이 인간의 DNA를 이루고 있고, 인간은 책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믿음은 계속 유효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