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쥐고 흔들던 시절, 잡스가 ‘영혼의 파트너’라고 부른 사람은 최고 운영책임자(COO)였던 팀 쿡이 아니라 최고 디자인 책임자(CDO)였던 조너선 아이브였다.
잡스는 회사를 이끄는 내내 아이브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냈고 애플을 디자인 중심의 회사로 탈바꿈했다. 기존에는 엔지니어가 기기를 설계하고 디자이너가 그에 맞춰 제품을 디자인했다면 잡스는 이를 완전히 뒤바꿔 디자인을 회사의 정점에 세웠다.
▲ 이정선 커리어케어 헤드헌팅사업본부장 전무.
디자인부서가 제품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주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옥과 리테일스토어, 온라인스토어까지 깊숙이 관여해 브랜드의 통일성을 꾀했다.
특히 애플 스토어는 소비자들이 제품을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공간이면서 애플의 철학과 디자인을 한번에 경험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매우 특별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이 아주 당연하게 들려도 2001년 잡스가 애플스토어를 열겠다고 했을 때 비즈니스위크는 ‘Sorry Steve, Here’s Why Apple Stores Won’t Work’라는 기사를 써서 대놓고 비난했다. 어떤 컨설턴트는 “애플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2년 안에 알게 될 것”이라며 조롱했고 월스트리트의 대다수 전문가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판단을 비웃듯 애플스토어는 개장과 동시에 소매업 역사상 가장 빠른 성장률을 보였고 애플스토어의 ‘지니어스 바(Genius Bar)’는 호텔 컨시어지를 연상시키며 소비자들로 하여금 애플을 고급 브랜드로 각인하는 데 일조했다.
이후 애플스토어를 본 따 소니는 ‘Sony Style’을, 삼성은 ‘Samsung DigitAll’을 만들었으니 직영매장을 통한 소비자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결과라 하겠다.
이는 소비자들이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는 유통업체에서 더 강하게 와닿았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인 아마존은 최근 오프라인서점 '아마존북스'와 무인편의점 '아마존고'에 이어 아마존 웹사이트에서 평점 4점 이상을 받은 제품을 모아 판매하는 오프라인매장 ‘아마존 4-스타’를 열어 아마존닷컴을 손에 잡히는 현실로 구현해냈다.
사람들은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아마존 웹사이트에 접속한 것처럼 익숙한 팻말과 디자인을 접하게 되고 먼저 구매한 사람들의 평점과 추천을 확인해 물건을 살 수 있다. 아마존의 오프라인매장은 애플스토어와 달리 아마존이라는 브랜드가 사람들이 쇼핑하는 데 매우 실용적이며 효율적 공간임을 강하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시대의 디자인은 단순히 제품의 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소비자에게 기업의 브랜드를 어떻게 일관된 이미지로 뚜렷하게 각인하게 하느냐 하는 문제까지 포괄한다.
따라서 예전에는 마케터나 기획자가 전면에 나서 브랜드를 관리하고 디자이너가 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았다면, 이제는 디자이너가 앞장서 콘셉트를 정하고 브랜드를 총괄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국내에는 온오프매장을 지니고 있는 대형 유통기업들이 많다 보니 이들을 중심으로 이런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한국 최대 헤드헌팅회사인 커리어케어의 이정선 전무 역시 다양한 기업들로부터 채용의뢰를 받으며 시장동향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데 담당 사업본부장의 목소리를 빌어 브랜드 전략 디자이너의 위치를 점검해 본다.
- 지금 채용시장에서 브랜드 전략을 총괄할 능력을 갖춘 디자이너들이 주목 받고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요 근래 고객경험을 시각화하여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기능이 강조되면서 디자이너의 역할이 커졌다. 예전에는 보통 마케팅부서에서 브랜딩을 담당하고 디자인부서는 마케팅을 지원하는 성격을 띠었다면 현재는 디자인의 중요성이 훨씬 더 커져 디자인 부서에서 브랜드 전략까지 맡는 경우가 많아졌다.
주요 기업의 브랜드 전략부서 책임자가 누구인지를 보면 이런 상황이 보다 분명해진다. 오랜 기간 디자인부서에 몸담고 있다가 브랜딩 업무로 넘어 온 디자이너 출신 책임자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때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ior)라는 직함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마케터를 하다가 디자이너가 되기는 어렵지만 그 반대는 더욱 수월한 편이다. 다만 최근에 이런 경향이 강해졌기 때문에 시장수요에 비해 실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 이해를 돕기 위해 구체적 사례나 언급 가능한 사람이 있는가?
"2000년대 들어 온라인 채널이 성장하고 고객의 쇼핑형태가 변화하면서 대형 오프라인매장은 위기를 맞았다. 기업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고객경험을 설계하고 고도화할 수 있는 내부조직을 구축했다.
예를 들어 한 대형 유통기업은 상품부터 매장, 서비스, 브랜드까지 고객이 접하는 모든 경험의 혁신을 위해 디자인경영실을 신설했다. 담당 임원은 "디자인경영실은 회사의 질적 성장에 기여하는 부서로 브랜드부터 상품 및 온오프매장 디자인까지 모든 구성요소들을 통합적으로 기획, 개발하고 고객과 일관성 있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임원도 처음에는 상품 디자이너로 시작해 공간 디자인으로 업무가 확장되었다가 브랜드 총괄까지 맡게 되었는데 이미 업계의 스타급 인재이다.
시장에서는 유통기업뿐 아니라 온오프매장을 지니고 있는 많은 소비재기업들이 모든 영역에서 브랜드와 디자인을 묶는 공통의 아이덴티티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커리어를 지닌 인력의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아질 것이다."
- 기업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원하는 실질적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디자인이 갖는 위상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디자인이 사용자 경험과 결합되면서 기업 내부의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디자인을 통해 최종 소비자와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고 전달하려는 콘텐츠를 시각적으로 바로 이해시킬 수 있다는 특유의 매력이 브랜드 전략으로 이어진 셈이다.
소비자에게 브랜드를 각인하는 데 디자인보다 더 강렬할 것이 있을까. 수많은 상품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이 때에 디자인은 브랜드를 알리는 첨병이자 솔루션이라고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을 같다."
- 브랜드 전략까지 아우를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되려면 어떠한 경험과 전문성을 쌓아야 하는가?
"당연히 입사하자마자 디자인과 브랜드 전략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현재 롯데쇼핑 마트사업본부에서 고객소통혁신부문장을 맡고 있는 서현선 상무나 글로벌기업에서 브랜드전략본부장을 맡고 있는 다른 임원도 경력 초기에 상품과 매장 디자인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만 특정 전문 분야에 머무르기보다 다른 경험을 쌓을 기회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그 기회를 잡았다. 모험 없이 안정성만 추구해서는 크게 성장하기 어렵다."
- 앞으로도 이런 분위기가 지속될 것 같은가? 만약 그렇다면 기업 또는 업계 종사자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
"한 번 지나가고 마는 유행은 아닌 것 같다. 브랜드 전략가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든 직함에 상관 없이 디자인과 브랜드를 통합해서 고객에게 제시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이런 사람들은 개성이 강해 조직 안에 잘 머무르지 못하므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
만약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거나 기업의 디자인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멀리 넓게 보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디자인을 할 때도 기업이 추구하는 브랜드와 일맥상통한지, 고객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늘 생각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마케팅 부서나 브랜드 전략팀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적극 참여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좀 고되더라도 어떻게 마케팅 전략을 세우고 실천하는지 직접 볼 수 있어 업무의 깊이를 더하고 나중에 브랜드 전략을 맡게 될 때도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정민호 커리어케어 경영기획실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