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월11일 싱가포르 현지에서 만난 통 시엔 후이(Hsien-Hui Tong) SG이노베이트 투자담당 이사는 싱가포르 혁신 생태계의 성공비결로 장기 계획과 인내자본(patient capital)을 꼽았다. < SG이노베이트 >
11일 싱가포르 카펜터스트리트에 있는 SG이노베이트 본사 인근 카페에서 만난 통 시엔 후이(Hsien-Hui Tong) 투자담당 이사는 싱가포르 혁신 생태계의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싱가포르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스타트업 강국이다. 스위스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2025년 세계 디지털경쟁력 순위에서 3위, 세계지식재산기구(WIPO)이 발표한 글로벌 혁신지수에서 세계 5위에 올랐다.
아세안 전체 벤처캐피탈(VC) 거래의 59%가 싱가포르에서 이뤄진다. 싱가포르기업청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싱가포르 기반 스타트업들이 유치한 투자금도 48억 달러(약 7조3600억 원)에 이른다.
하지만 통 이사는 그 성공 비결을 화려한 기술이나 풍부한 자금보다 '시간'에서 찾았다.
통 이사는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5년, 10년을 내다보는 장기 계획과 인내자본(patient capital)이 필수적”이라며 “눈앞의 성과를 내기 급급한 자본은 ‘딥테크’를 키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통 이사는 SG이노베이트 로고가 새겨진 남색 야구점퍼 차림으로 나타났다. 인터뷰 중 스타트업 업계의 매력을 묻자 그는 “이런 복장의 자유로움이 있다”며 웃었다.
통 이사는 SG이노베이트가 출범한 2016년부터 함께한 원년 멤버다.
SG이노베이트는 싱가포르 재무부(MOF)가 설립한 스타트업 투자기관으로 ‘오늘의 기술을 내일의 기회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미래 기술력을 지닌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스타트업 투자는 물론 인재 육성과 연구개발 등 생태계 구축에 힘을 실으며 현재까지 스타트업 약 100곳을 발굴해 지원해왔다.
2026년 3월 기준 SG이노베이트가 직접 집행한 누적 투자금액은 1억1800만 싱가포르 달러(약 1404억 원)으로 사업화 이전 초기 기술 스타트업에 집중 투자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규모다.
SG이노베이트가 투자한 스타트업이 지금껏 받은 후속 투자 규모는 12억 싱가포르 달러(약 1조4270억 원)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 SG이노베이트는 싱가포르 재무부(MOF) 산하 스타트업 투자기관이다. 사진은 싱가포르 카펜터스트리트 32번지에 위치한 SG이노베이트 사무실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SG이노베이트의 역할은 일반 기술기업이 아닌 민간 자본이 투자하기 어려운 초기 신생기술(Emerging Technology) 기업에 먼저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다. 상용화까지 10년 이상 걸릴 수 있는 혁신기술에 집중한다.
해수면 상승, 에너지 전환, 탈탄소화 등 국가적 과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기술 투자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
통 이사는 “SG이노베이트는 아주 먼 미래를 바라보는 기업에 투자하는 기관”이라며 “민간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운 기업들에 투자하고 다음 단계 투자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시기까지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10년 전에는 인공지능(AI)과 블록체인, 의료기기 분야를 주목했고 5년 전에는 양자기술과 광자학(포토닉스), 바이오테크 등에 집중했다. 지금은 핵융합이나 바이오와 컴퓨터가 결합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등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는 “당장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더라도 10년, 20년 뒤의 미래 가치를 보고 씨앗을 뿌려야 진짜 혁신이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다만 정부가 출자한 기관이라고 해서 시장성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술의 수익화가 가능한지를 투자판단의 핵심 요소로 보고 있다.
통 이사는 “SG이노베이트의 투자철학은 명확하다”며 “싱가포르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찾고 그 기술이 스스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지속가능성을 갖추고 있는지를 본다”고 말했다.
통 이사는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더라도 상업화를 할 수 없고 정부 보조금이 계속 필요한 영역이라면 투자 대상이 아니라 정부 지원사업이어야 한다”며 “스타트업이 성장해 수익을 내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야 국가 산업과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 SG이노베이트는 신생기술기업 발굴과 투자를 넘어 인재와 규제당국을 연결하는 생태계 구축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 SG이노베이트 >
기술 투자 초기 단계부터 연구개발과 규제당국 등 각 분야 이해관계자를 연결해 관련 인프라를 함께 키우는 것도 SG이노베이트의 핵심 역할 가운데 하나다.
통 이사는 이런 생태계 구축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광자학 산업을 들었다. 광자학은 빛을 이용해 정보를 처리하고 전달하는 기술로 초고속 광통신과 광반도체 등에 활용된다.
8년 전 SG이노베이트는 광자학 기술의 잠재력에 주목했지만 당시 싱가포르에는 관련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SG이노베이트는 광자학 기술 관련 분야 연구인력과 스타트업, 대기업, 정부기관을 연결하는 ‘실무 커뮤니티’를 만들고 해외 스타트업에 선제적 투자를 단행했다.
통 이사는 “당시 싱가포르에는 광자학 기술 분야 스타트업도 없었지만 해외 스타트업에 먼저 투자하면서 배운 경험을 싱가포르로 가져와 생태계의 토대를 닦았다”며 “현재 광자학 산업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국가 전략산업으로 성장해 통상산업부가 다음 단계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통 이사는 “정부와 연구기관, 기업, 투자자, 규제당국이 함께 움직여야 생태계가 만들어진다”며 “생태계 구축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성장 뒤에는 국가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SG이노베이트는 투자뿐 아니라 인재 육성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초기 스타트업의 인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박사급 연구인력 채용 비용의 최대 70%를 지원하는 공동펀딩 프로그램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과 싱가포르처럼 자본이 부동산과 금융권으로 집중되는 국가일수록 정부가 새로운 자본 흐름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도 내놓았다.
통 이사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 자본이 어디로 흐르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라며 “정부는 부동산과 은행 외 어떤 산업에 자본이 필요한지 고민하고 금융 인센티브와 투자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 SG이노베이트 사무실 인근의 홍콩스트리트 모습. SG이노베이트는 마리나베이 금융지구의 고층 오피스빌딩 대신 전통 상점가와 카페 등이 어우러진 도심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자본의 흐름을 생산적 분야로 돌려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꾸준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통 이사는 1998년 싱가포르국립대학 공과대학을 졸업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2000년대 초반 데이터마이닝 스타트업을 공동창업해 2년 만에 글로벌은행에 회사를 매각했다.
글로벌 사무용품기업 스테이플스(Staples) 부사장, 싱가포르국립대 총동창회(NUSS) 최고경영자(CEO)를 거쳐 벤처캐피탈 와삭스벤처스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매니징 파트너 등을 역임했다.
창업과 벤처캐피탈, 기업 경영의 생태를 현업에서 두루 경험한 뒤 2016년 SG이노베이트에 합류했고 현재 투자이사를 맡아 신생기술 발굴과 투자전략 수립을 총괄하고 있다. 박혜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