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무능했고 혼란한 독일 상황에서 히틀러를 선택해 파시스트 정권의 산파 노릇을 했다.
[비즈니스포스트] 1932년 12월 연방 총리직에서 물러난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22대 총리 프란츠 폰 파펜은 아직 분을 삭이지 못했다. 1932년 4월 총리에 올랐으니, 불과 8개월도 안 돼 실각했기 때문이다.
상황은 받아 들이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자신의 뒤를 이어 총리직을 차지해 버린 슐라이허 전 국방장관의 행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독일 군부 막후 실력자 슐라이허는 대통령 힌덴부르크에게 파펜을 추천해 총리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런 슐라이허를 파펜은 국방부장관으로 대우했다.
더구나 슐라이허는 파펜이 초급장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다. 슐라이허가 없었다면 파펜이 총리가 되는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파펜은 베스트팔렌의 평범한 귀족 출신으로서 1차세계대전 전후 정치권에서 활동하긴 했지만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파펜과 슐라이허의 끈끈한 우정은 파펜 내각 출범 후 얼마 되지 않아 틀어졌다. 파펜은 정치적 기반도 약했지만, 어설픈 정책과 조치를 남발했다.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비난이 파펜에게 쏟아졌다. 결국 상황을 지켜 보던 슐라이허가 다시 대통령에게 나아갔다. "파펜을 해임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후임은 바로 자신이었다.
슐라이허는 파펜을 총리로 추천하긴 했어도 "머리가 없다"고 무시했다. 친구를 추천해 놓고, 몇 달 만에 실각시킨 것은 그의 이런 무시가 극적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파펜은 이를 갈았다. 즉시 슐라이허 퇴진작전에 돌입했다. 작전의 핵심타깃은 총리 임명권자인 대통령 힌덴부르크였다. 한 달 전 슐라이허가 파펜 경질을 건의하던 장면에서 등장인물 한 사람만 바뀐 셈이다.
이번엔 파펜이 힌덴부르크에게 슐라이허 퇴진을 요구했다. 힌덴부르크가 물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후임은 누구입니까?"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1932년 재선에 성공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는데 당시 독일 상황은 악몽이었다. 초대 에베르트대통령에 이어 1925년 2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경험했던 첫 번째 임기와는 달랐다.
그는 1차세계대전 종전 뒤 독일이 선택한 국민적 영웅이었고, 대통령 후보로 추대돼 당선됐다.
프로이센 융커 귀족 출신인 그는 퇴역해 있다가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현역으로 복귀했다. 러시아군의 갑작스런 참전으로 수세에 몰려 있던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2개 군을 격파해 영웅으로 떠올랐다.
영웅에게 대통령 당선은 당연한 것이었다. 취임 후 상황도 좋았다. 독일은 종전 후 정치적 경제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정신을 못 차렸지만, 1925년부터는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1929년 시작된 세계대공황은 막 체력을 회복하던 독일경제를 다시 빈사 상태로 몰아갔다. 실업률이 급격히 상승했고, 기업은 연쇄도산했다. 1932년 5월에는 독일 중앙은행인 제국은행까지 파산위기에 몰렸다.
측근들의 추앙에 못이기는 척 85세의 나이로 3대 대통령에 올랐지만 힌덴부르크는 혼란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아이디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치매 증상이 있다"는 말이 돌만큼 무기력한 노령의 대통령에게 전 총리 파펜이 속삭였다. "후임으로 적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후보는 힌덴부르크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후보의 평판이 너무 좋지 않았고, 자존심도 허락치 않았다. 자신은 독일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영웅이었지만, 상대는 사병 출신의 격 떨어지는 듣보잡 정치인이었다. 그런 하찮은 사람을 총리로 임명해 총리로 마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었다.
▲ 파펜은 정치적 복수에 눈이 멀어 히틀러를 끌어들였다.
파펜은 달콤한 말을 하는 재주가 있었다. "당신의 정치적 기반인 재계는 강력한 우파 정권이 수립돼 정국이 안정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다. 그가 위험하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가 통제할 수 있다. 나를 부총리에 임명해 달라. 부총리로서 내가 그를 견제하고 위험을 통제하겠다. 그를 총리에 앉히는 것은 다만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그를 이용하는 것이다."
힌덴부르크는 망설였다. 하지만 별 대책도 없이 집권 2기를 시작한 그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무엇보다 재계도 원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결국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새로운 총리 임명안에 서명했다. 이렇게 해서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제24대 총리가 탄생했다. 바로 히틀러였다.
당연하지만 파펜은 전혀 히틀러의 상대가 못 됐다. 견제와 통제는 능력 밖이었다. 집권하자마자 히틀러는 파펜 따위는 대놓고 무시했다. 집권한지 불과 두 달 후 히틀러는 전권위임법을 통과시켰다. 의회는 물론 헌법마저 무시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고, 7월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8월에는 총리와 대통령직을 통합하는 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총통 자리에 올랐다.
그 다음은 익히 알려진 그 대로다. 그 후 1945년까지 12년간 총통 히틀러가 몰아간 독일의 운명은 참혹했다.
흔히 조직이 잘 되려면 훌륭한 인재를 뽑아야 한다고 한다. 현대의 기업 경영자들은 핵심인재를 찾아, 천재적 인재를 구하기 위해 세계를 누빈다.
좋은 인재를 얻으면 수년간 지지부진하던 사업이 활로를 찾을 것이고, 기술적 난제도 풀리면서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한 번 시장에서 인정받으면 소비자의 신뢰가 생기고, 소비자의 신뢰는 브랜드가 되어 다시 시장위치를 강화한다.
인재는 조직이 성공으로 갈 때, 가장 중요한 첫 단추다.
1차세계대전 후 독일에 좋은 인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패전한 뒤 천문학적 배상금에 시달렸다. 전쟁의 최대 피해국 프랑스는 강경했다. 다시 전쟁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약소국으로 독일을 만들어 놓으려 했다. 배상금을 마련하려 화폐발행이 증가하자 그 유명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불어 닥쳤고 독일은 엉망이 됐다.
하지만 독일은 그걸 용케 벗어났다. 1923년 새로운 화폐 '렌덴마르크'를 등장시켜 기적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았고, 1924년에는 미국의 중재를 끌어들여 배상금을 대폭 할인받는 '도스안' 도출에도 성공했다.
그런데 왜 독일은 결국 실패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일까? 문제는 좋은 인재 부족이 아니었다. 핵심 결정구조에 나쁜 인재가 있었다는 게 화근이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당시 인기는 있었지만 정권을 장악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버려 두면 사라질 수도 있었던 극단주의 세력이었다. 그 히틀러를 파펜이 세상 밖으로 꺼내 놓았고 힌덴부르크가 도장을 찍어 주었다. 파펜과 힌덴부르크가 모든 것을 망쳐 놓았다.
독일은 대공황의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560만 모든 국민의 1/3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겨우 위기에서 벗어나던 공화국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파펜은 조국의 위기탈출 보다는 개인적 복수에 눈이 멀었다. 힌덴부르크는 어쩌다 대통령에 올라 8년째 대통령을 하고 있었는데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19세기형 장군' 출신의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데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힌덴부르크는 이 정파, 저 정파에서 내 놓는 수습방안들 중 괜찮아 보이는 것을 고르는 '검토자'로 자기 역할을 끝냈다. 힌덴부르크는 파펜의 안을 선택했고, 이로서 두 사람은 역사에 파시스트 정권 수립의 산파로 기록됐다.
▲ 나쁜 인재도 쓰기 나름이라는 생각은 틀렸다. 기업에서 나쁜 인재 1명은 치명적이다. 6월29일 오전 서울 중구 티마크그랜드호텔에서 열린 '2022 제1차 관광기업 미니잡페어 in 서울'에서 채용 면접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1명의 좋은 인재가 조직의 성공을 담보하기는 어렵다. 1명의 좋은 인재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분야일 뿐이다.
당연히 조직엔 좋은 인재가 많이 필요하다. 조직에는 많은 기능이 있으며, 기능들이 잘 수행되려면 좋은 인재가 많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손흥민은 케인이 있을 때 최고의 성적을 내며, 케인도 손흥민이 있을 때 그렇다.
나쁜 인재는 다르다. 나쁜 인재의 독성에는 한계가 없다. 조직 안에 들어온 나쁜 인재는 순식간에 좋은 인재의 노력과 성취를 파괴한다. 아무리 숫자를 나열하고 더하고 곱해도 '0'을 만나면 결과는 '0'으로 귀결된다. 나쁜 인재는 숫자 '0'과 같이 모든 것을 '무'로 만든다.
조직은 생물이고 생명이다. 나고 자라기도 하지만, 시들고 쇠퇴할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찬란하지 못해도,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는 잎이 나고 꽃이 피는 날을 기약할 수 있다. 하지만 죽으면 어떤 가능성도 없다. 조직에서 생존은 따라서 성공보다 더 중요하다.
생존이 조직의 최대 미션이라면 필수조건은 나쁜 인재를 조직 안에 들이지 않는 것이다. 1명의 나쁜 인재는 조직 소멸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1932년 독일은 정반대였다. 바이마르공화국은 절대 선택하지 않았어야 할 나쁜 인재 파펜을 선택했고, 파펜은 1919년 나치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한 후 1933년까지 14년 동안 규제의 사슬에 묶여 있는 히틀러를 겁도 없이 국민 앞에 풀어줬다.
나쁜 인재도 쓰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나쁜 인재를 이용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모험이다. 그들에게는 치명적 독이 있다." 진국영 커리어케어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