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수출통제 반도체에서 AI서비스로 확대, 전문가들 "'소버린 AI' 국가 필수 전략자산 부상"

▲ 미국 정부의 인공지능(AI) 모델 접근 제한을 계기로 한국에서도 독자적 AI 역량과 국제 협력을 병행하는 '소버린 AI' 전략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제미나이 생성 이미지>

[비즈니스포스트] 미국 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최첨단 인공지능(AI) 모델에 대한 외국인 접근을 제한하면서, 글로벌 AI 경쟁의 기준이 기술 개발과 활용 중심에서 보유와 통제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동안 AI 경쟁이 누가 더 뛰어난 모델을 개발하고 이를 빠르게 활용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앞으로는 핵심 AI 기술을 직접 보유하고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도 독자적 AI 역량을 확보하는 한편 국제 협력을 병행하는 '소버린 AI' 전략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5일 정보통신업계 취재를 종합하면 AI 기술이 더 이상 단순한 산업 기술이 아니라 국가 안보와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전략자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미국 정부는 최근 앤트로픽의 최첨단 AI 모델인 페이블5와 미토스5에 대해 미국 내외 외국인과 외국 국적 직원의 접근을 제한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앤트로픽은 12일(현지시각) 입장문을 통해 “미국 정부는 국가안보 권한을 근거로 미국 내외를 불문하고 모든 외국인에 대해 페이블5 및 미토스5 접근을 중단하라는 수출통제 지침을 발령했다”며 “정부는 이른바 ‘탈옥(모델의 안전장치와 제한을 무력화하는 우회 기법)’할 수 있는 방법을 인지하게 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그동안 미국이 반도체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AI 인프라를 중심으로 수출 통제를 강화해 온 데서 나아가 AI 모델과 서비스 자체로 통제 범위를 확대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AI 주권이 미래 국가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번 조치는 앤트로픽의 글로벌 AI 보안 협력체인 ‘프로젝트 글래스윙’에 참여하고 있는 해외 기관들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앤트로픽은 글래스윙 참여 대상을 15개국 150여 개 기관으로 확대했다. 국내에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SK텔레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등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참여 확대 발표 직후 미국 정부가 외국인 접근 제한 조치를 시행하면서 글래스윙에 참여 중인 국내 기관들의 미토스 활용에도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염흥열 순천향대학교 정보보호학과 교수는 비즈니스포스트와 통화에서 “지금까지 미국 정부가 AI 혁신과 활용 확대에 방점을 뒀다면, 이번 조치는 AI의 위험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며 “특히 미국 정부가 국적을 기준으로 접근을 통제한 만큼, 한국 기업과 연구기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염 교수는 이번 사태가 소버린 AI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앞으로는 자체적으로 AI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 소버린 AI 체제를 마련할 필요성이 커질 것”이라며 “단순히 모델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생력 있고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함께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한국이 독자적으로 글로벌 AI 경쟁력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염 교수는 “현재 상황에서 우리나라만의 독자적 생태계로 글로벌 AI 모델 기업들과 경쟁하기는 상당히 어려울 수 있다”며 “결국 외교적 노력과 함께 어떤 국가 또는 기업과 연합할 것인지에 대한 정부와 산업계의 전략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

곽진 아주대학교 사이버보안학과 교수는 이번 조치가 AI 모델의 '전략 자산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곽 교수는 “소버린 AI의 핵심은 결국 통제권 확보에 있다”며 “이번 조치는 ‘성능이 뛰어난 AI 모델’이 국가 안보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다른 프론티어 AI 모델들도 전략 자산으로 지정돼 수출 통제나 접근 제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정부가 추진 중인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독파모) 사업의 전략적 가치도 높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정부는 독파모 사업을 국가 AI 생태계 구축과 미래 AI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핵심 전략 사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선정 기업에는 GPU, 연구개발 자원 등을 집중 지원해 글로벌 빅테크와 경쟁할 수 있는 국가대표 AI 기업을 육성한다는 것이 정부의 목표다.

현재 독파모 사업에는 LG AI연구원, SK텔레콤, 업스테이지, 모티프테크놀로지스 등 4개 컨소시엄이 참여하고 있다.

독파모 사업은 6개월마다 단계 평가를 통해 참여 팀을 압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오는 8월 2차 평가를 실시한다.

곽 교수는 “독파모 사업의 실효성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독파모가 갖는 의미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며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도 전략 자산으로서 외부의 수출 통제 흐름 속에서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AI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글래스 윙과 같은 국제 협력 프로그램에 참여해 선제적으로 정보를 확보하는 것은 중요하다”면서도 “최근 수출 통제 분위기를 보면 특정 기업의 AI 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로 가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춘식 서울여자대학교 정보보호학과 교수는 미국과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자체 역량 확보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미국 정부를 외교적으로 설득해 협력을 이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동시에 자체 AI 기술 확보를 위한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본과 규모 측면에서 한국이 독자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는 쉽지 않은 만큼, 동맹국과 협력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며 “AI뿐 아니라 방산 분야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만큼, 외교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면서 동맹국으로서 통제된 범위 안에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협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금융 분야의 AI 보안 협력 확대 필요성을 제기했다.

박 교수는 “일본의 경우 금융 분야 기관들이 글래스 윙에 참여하고 있는데, 국내에서도 금융보안원 등 관련 기관들의 참여 확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앤트로픽과 협력도 지속적으로 확대해 금융권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승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