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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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작은 생활용품기업을 유통과 항공, 부동산, 호텔 등 국내외 41개 계열사에 매출 6조 원 규모 중견그룹으로 키워냈다.
1936년 7월22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여고 졸업 뒤 전액 장학금을 약속받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체스넛힐대학에 진학해 화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악바리'로 유명했다. 평균 B학점 이상 받아야 전액 장학금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학시절 4년 내내 한국에 들른 적이 없다.
유학 경험은 훗날 애경그룹이 쉘이나 유니레버 등 다국적기업과 합작을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1970년 17년 동안 비누사업을 이끌어온 남편 채몽인 애경유지 창업주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회사를 맡게 됐다. 막내아들을 낳은지 불과 3일 만이었다.
30년 동안 애경을 진두지휘해 작은 비누회사에서 재계 50위권 기업으로 키워냈다. 백화점과 호텔사업에 이어 제주항공을 통한 항공사업 등 애경그룹의 사업 다각화에도 힘썼다.
여장부로서 면모와 여성성을 살린 리더십을 함께 보여주는 여성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애경 창사 50주년을 맞아 본사 회장실을 비웠고 결재도 큰 아들에게 모두 맡긴 뒤 보고도 받지 않는다.
현재 회장직을 유지하면서 애경복지재단 일만 관여하고 있다.
- 경영활동의 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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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경그룹 회장으로서 ‘주부경영인 신화’ 이룩
장영신은 1987년에 애경그룹 회장을 맡아 2004년 직위를 내려놓을 때까지 애경그룹을 연간 6조 원의 매출을 내는 그룹으로 키워냈다.
장영신은 1993년에 애경유지 공장 부지였던 곳에 애경백화점 구로점을 열고 장남 채형석 부회장에게 사업을 맡기는 등 지속적으로 사업다각화를 이뤄냈다.
장영신은 이렇게 그룹을 키워올 수 있었던 배경에 자녀들을 기르는 모성이 있었다고 말한다. 네 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에 주부CEO로서 포기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정주부였던 장영신은 세탁기가 막 보급되던 시절 비누 대신 합성세제의 수요가 늘어날 것을 예견하고 1975년 대규모 합성세제 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임직원을 존중하며 그룹 이끌어
장영신은 경영의 1원칙을 ‘존중’으로 꼽았다. 그는 2009년 동아일보에 게재한 칼럼에서 “나는 임직원을 대할 때 명령하기보다는 방향을 유도하거나 스스로 생각하도록 이끄는 방법을 썼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하라”보다는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겠느냐. 당신의 생각을 이렇게 보완하면 어떻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국회의원 장영신
장영신은 2000년 3월28일 선거관리위원회에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등록을 마쳤다.
‘유권자 감동의 정치’를 내세우며 많은 지역주민들을 만났다. 민원을 자세히 적어두고 실현 가능성을 따져 우선순위를 정했다.
장영신은 전체 유효 득표수 48.3%로 당선됐다. 2000년 재경위 국감 우수의원에도 뽑혔다.
장영신은 지역구 선거가 끝나자마자 상대 후보로부터 당선무효과 선거무효를 요구하는 소송 2건에 휘말렸다. 2001년 7월 대법원이 선거무효 소송을 받아들였고 장영신은 선거를 다시 해야 했지만 이 일로 1년여 간의 정치인 생활을 마무리했다.
△IMF 이겨내
애경그룹은 1996년 3월 외환위기 전에 조직 개편과 회계제도 개선 등으로 구조조정을 마무리했다. 장영신은 이를 통해 다른 기업들보다 일찍 성장여력을 확보했던 것으로 봤다.
애경그룹은 일본 협력사였던 미쓰비시 가스화학과 다이니혼 잉크화학공업, 이토추 상사 등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들이 낮은 이자에 빌려준 운영자금으로 유동성 위기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애경산업 설립
장영신은 1984년 영국기업 유니레버와 합작해 세운 애경산업 설립을 주도했다.
장영신은 애경에 경영 전권을 줘야한다는 등의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고 업계에서는 이 때문에 합작 가능성이 없다고 봤지만유니레버는 합작회사를 세우기로 했다.
애경산업은 1984년 11월 출범했다. 장영신은 외국기업 임원들 사이에서 ‘터프우먼’이라는 수식어로 불렸다고 한다.▲ 1999년 6월 여경협 창립총회를 주재하는 장영신 회장.
장영신은 1972년 7월1일 처음으로 출근했다. 이후 한 달 뒤인 8월1일 사장에 취임했다.
장영신은 자서전 ‘밀알을 심는 마음으로’를 통해 “당시 나는 왕따였다. 사장이었지만 한동안 직원들은 결재조차 받으러 오지 않았고 이사회에서 임원들이 나누는 얘기를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장영신은 애경유지공업의 지표를 화학분야로 재정립해 대전공장을 준공하고 애경화학을 설립하는 등 기초화학분야로 영역을 넓혔다.
취임한 뒤 1년 만인 1973년에 1차 석유파동(오일쇼크)이 터졌다. 물가가 치솟아 소비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 여파로 유류 가격과 전기요금이 크게 올랐고 애경유화(옛 삼경화성)는 원료 공급이 끊겨 공장을 닫을 뻔했다.
장영신은 원부자재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미쓰비시가스케미컬과 미국 걸프 등을 직접 방문했다. 그 결과 우유비누와 트리오 등 대표 상품의 수출길이 열리게 됐다.
△남편의 죽음 후 경영 일선 나서
남편이 죽고 장영신이 경영에 뛰어들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경영 참여를 만류했다. 당시 애경에서 사장을 맡고 있던 큰 오빠는 임원 몇몇을 데리고 회사를 떠났다.
장영신은 여자 사장 밑에서 일을 못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려는 남자 임원들을 다독여야 했다. 경제인 모임에서 홀로 여자라는 자격지심에 기둥 뒤에 숨어 서 있다 오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 비전과 과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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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과 과제▲ 애경산업 실적. 단위=억 원.
하지만 장영신은 공식적으로 계열사 관련 업무를 2004년부터 애경그룹의 자녀들에게 맡겼다.
장영신은 애경복지재단 일에만 관여하고 있다. 애경복지재단은 △소년소녀가장 지원사업 △사회복지시설 지원사업 △재가노인 지원사업 △무료급식 지원사업 △장학사업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
◆ 평가
재계에서 ‘국내 여성CEO(최고경영자) 1호’ ‘주부 경영의 신화’ ‘재계 맏언니’ 등의 타이틀로 통한다.
임기응변이 뛰어나다.
사내에서 장영신은 ‘호랑이’로 통한다. 화가 나면 직설적으로 퍼붓는 성격과 한번 결정하면 일로매진하는 돌파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카리스마로 주위를 압도하며 인재를 알아보는 눈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조서환 전 KTF 부사장과 인연이 깊다. 한쪽 팔이 없어 번번이 입사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그를 채용한 뒤 믿고 맡겼다.
조 전 부사장은 애경그룹에서 ‘하나로 샴푸’ ‘2080 치약’ ‘다이알비누’ 등을 히트시키며 ‘마케팅 달인’으로 거듭났다. 그는 장 회장을 “그 양반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게 있다”고 평가했다.
애경산업의 화장품사업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애경산업은 2015년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4600억 원, 370억 원으로 2014년보다 15%, 400% 늘어났다. 이는 화장품 사업이 잘 된 덕분이었다.
현재 장영신은 회장 직함만 보유하고 있고 장남인 채형석 총괄부회장에게 애경그룹의 경영 승계가 거의 마무리됐다.▲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이 2011년 2월11일 대전 카이스트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고 수상소감을 밝히고 있다.
-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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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경 ‘가습기메이트’의 독성
2016년 7월 27일 국회 '가습기살균제 사고 진상규명과 피해 구제 및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이하 특위)' 소속 이정미 정의당 의원은 “애경 가습기메이트와 이마트 가습기살균제의 원료물질인 '스카이바이오 에프지'(SKYBIO FG)에서 새로운 독성물질인 DCMIT가 함유된 사실을 확인했다”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2016년 8월 가습기살균제 참사 전국 네트워크는 1997년부터 2016년 3월까지 재직한 애경산업 대표이사를 업무과실, 중과실치사상 혐의로 처벌해달라는 내용의 고발장을 서울중앙지검에 제출했다.
고발장에는 애경산업 고광현 전 대표이사와 장영신 전 대표이사가 포함됐다. 애경은 유해성 논란이 이어지는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 계열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하고 판매했다.
공정위는 2016년 8월 ‘판단불가’에 해당하는 심의절차 종료 결정을 내렸고 과징금과 검찰 고발 등 제재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를 놓고 공정위가 애경을 봐주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공정위는 2018년 2월에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재조사하며 애경과 SK케미칼, 이마트에 억대 과징금을 부과했다. 또 애경 법인과 함께 고광현 전 애경 대표이사, 김창근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이사를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장남의 회삿돈 횡령 혐의
장남 채형석 부회장은 2008년 12월 회삿돈 횡령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검찰에 따르면 채 부회장은 2005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회사공금 20억 원을 개인 용도로 사용한 혐의를 받았다. 또 2005년 11월 대구 유천동에 있는 대한방직의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설범 대한방직 회장에게 15억여 원을 준 혐의를 받았다.
2005년 애경백화점 주차장 부지를 사들여 주상복합상가를 지은 나인스에비뉴 대표의 자금 대출을 돕고 6억 원을 받은 혐의도 받았다.
채 부회장은 2010년 이명박 정부의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호화콘도 구입
재미블로거 안치용씨는 장영신이 2008년 5월 미국 뉴욕 맨해튼에 콘도를 하나 구입했다고 밝혔다. 장영신은 200만 달러 상당의 콘도를 산 지 하루 만에 되팔아 재산을 해외로 빼돌려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양도세와 100만 달러 이상 주택에 부과되는 맨션택스등 5만5천 달러의 세금을 내고 복비로만 6%인 12만 달러를 지출했다고 안씨는 전했다.
- 경력/학력/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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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
1970년 7월12일 남편인 채몽인 애경그룹 창업자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살던 장영신은 경영참여를 결심했다. 종로 낙원동에 있던 경리학원에 찾아가 복식 부기, 재무제표 보는 법을 공부했다.
1972년부터 1997년까지 애경유지공업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1985년 애경그룹 회장에 올랐다. 외부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초대회장을 맡았다.
1999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맡았다.
2005년 3월부터 2006년 2월까지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을 겸임했다.
2001년 10월부터 애경복지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 10월부터 한국과학기술원 이사를 겸임하고 있다.
◆ 학력
1955년 경기여고를 나와 1959년 미국 체스트넛힐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체스트넛힐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1994년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학 명예박사, 2011년 카이스트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희수연(77세) 때 찍은 가족 사진.
아버지 장회근와 어머니 문금조씨의 4남 4녀중 막내딸이다.
아버지는 대지주 집안의 아들로 일본 와세다대에서 영문과를 졸업했다. 어머니도 당시 일본 귀족학교인 쓰다여대 영문과를 나왔다.
6·25 전쟁이 터지자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장영신은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돈 안 들이고 대학에 가는 방법을 찾았다. 외국어 능력을 인정한 교장이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하게 했다.
남편 채몽인 선대회장과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이웃사촌이다.
채 회장은 ‘애인경천(愛人敬天)’ 정신에 입각해 국민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애경이란 이름을 지었다.
장영신의 3남1녀가 모두 애경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장남 채형석 애경 총괄 부회장과 차남 채동석 애경그룹 애경산업 대표이사 부회장, 삼남 채승석 애경개발 사장, 장녀 채은정 애경산업 부사장이 장영신의 자녀들이다.
장남인 채형석 부회장은 사실상 회사 경영권을 확보하자 장 회장과 달리 공격경영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채 부회장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어머니에게 “엄마, 걱정마. 학교 앞에서 학생들 상대로 뽑기 장사하면 되잖아”라며 어머니를 위로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1993년 9월10일 애경백화점 구로 개점식 인사말에서 “이 백화점을 돌아가신 아버님께 바칩니다”고 말해 장 회장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큰 딸 채은정 부사장은 외숙모 소개로 안용찬 제주항공 대표이사 부회장과 결혼했다. 맏사위 역시 장 회장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다.
안 부회장은 1995년 애경산업 사장에 오른 뒤 2006년 생활항공부문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2012년부터 제주항공 경영총괄 부회장을 맡고 있다.
삼남 채승석 사장은 한성주 전 SBS 아나운서와 1999년 결혼했으나 5개월 만에 이혼했다.
손녀인 채수연씨는 2016년 4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외손자 선동욱씨와 결혼했다. 채은정 애경산업 부사장과 안용찬 애경그룹 부회장의 장녀이자 장영신의 외손녀인 안리나씨도 SPC그룹의 2세인 허희수 부사장과 결혼했다.
◆ 상훈
1994년 자랑스러운 경기인상, 1995년 국민훈장과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99년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했다.
2004년 한국경영사학회 제11회 창업대상을 받았다.
2009년 미국 체스트넛힐대학의 '2009년 눈부신 업적을 남긴 졸업자' 상을 받았다.
2017년 11월3일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제1회 여성기업인 명예의전당 헌액자'에 선정됐다.
◆ 기타
저서로 2010년에 낸 자서전 '스틱투잇(Stick to it!)'과 1994년에 낸 '밀알 심는 마음으로'가 있다.
유학 시절 동양인 여성 치고 큰 체격과 노래솜씨로 눈길을 모았다. 대학 합창단원으로 활동했고 필라델피아 오페라하우스와 협연한 '나비부인'의 프리마돈나를 맡기도 했다. 지금도 그는 음악회와 발레 관람이 취미다.
영어와 일본어 실력이 좋다. 2006년 일흔이 넘은 나이에 취미 삼아 중국어 공부에 도전했다. 자녀들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는 취미도 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경기여고 동문이다.
시간 개념이 투철하다. 약속시간보다 최소한 10분 먼저 도착하는 습관이 있다.
제주도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경기여고 재학시절 6·25때 제주로 피난가 1년 동안 지낸 적이 있다.
장영신은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된 일로 “아이들이 잘 자라주고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애경그룹은 경영권 분쟁이 많은 재계에서 보기 드문 형제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채형석 부회장과 채동석 부회장은 10년 넘게 한사무실을 쓰면서 우애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6년 7월 19일 장영신은 손주들에게 주식을 증여했다. AK홀딩스는 19일 장영신이 자신의 보유주식 10만주(지분율 0.75%)를 손주 7명에게 무상증여했다고 밝혔다. 애경그룹 3세들이 지주사인 AK홀딩스 주식을 소유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식을 받은 손주들은 1984년~1994년생으로 아직 그룹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녀 6명이 1만3333주씩 받았고 손주 7명 가운데 유일한 남자인 장손 채정균씨는 다른 손주들과 달리 1만 여 주를 추가해 2만2002주를 받았다.
2009년 4월에 유방암 수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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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리 애경은 최고의 성과를 이루었다. 출시 5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 원조 주방세제 ‘트리오’가 국민에게 여전한 사랑을 받고 있으며 화장품 ‘Age20’s’가 연매출 1천억의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면서 생활뷰티기업으로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 (2017년 연간 CSR보고서에서)
“수년 동안 어려웠던 화장품사업에서 역대 최고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달성하며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냈다.” (2016/03, 임직원 전원 모임에서)
“뿌리깊은 나무는 어떤 세찬 비바람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60년 동안 생활용품·유통·항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쉼 없는 성장과 도약을 해 온 애경인의 개척자 정신에 남다른 긍지를 느낀다. 인생에 희로애락이 교차하듯 경제 역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한다. 잘 나갈 때 어려울 때를 대비하고, 힘들 때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담담하고 의연하게 대처해 나간다면 이루어내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014/06/08, 애경그룹 창립 60주년 기념사에서)
“선택과 집중으로 효율성을 강화하고 신사업을 적기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해 경영계획을 실현해 나가겠다. 시장 다변화와 업태혁신 등을 통해 수익성을 더욱 확대하고 인재육성에도 역점을 두겠다.” (2012/01/15, 애경그룹 2012년 신년사에서 사업부문별 목표를 발표하며)
“이공계 기초학문이 국가 경쟁력을 살리는 길이다. 카이스트가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이공계 고급 두뇌 양성에 더욱 힘써 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발전기금을 전달하게 됐다. 이 기금이 안정적 학업환경 조성과 학생들의 복지향상에 사용되기를 바란다.” (2011/05/02,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30억 원을 기부하며)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남보다 강하거나 남보다 잘난 것이 아니라 그 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고 묵묵히 노력한다는 것이다. 긍정적 생각으로 꾸준히 노력하면 어떤 어려운 목표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경험으로 확인했다.” (2010/12/13, 기업경영 40주년을 맞아 자서전 ‘스틱 투 잇(Stick to it)!’을 출간하며)
“CEO는 힘들어.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해야 해요. 그렇게 반대를 무릅쓰고 CEO가 됐는데 잘못되면 여성의 수치라고 생각했다. 꼭 성공해서 ‘여성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경기여고 동창들도 “네가 잘못되면 학교 망신”이라고 열심히 응원해줬다.” (2009/12/08, 미주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우리 어머니는 자식뿐 아니라 손자 손녀에게도 늘 존댓말을 썼다. 성장기에 있는 자녀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질책을 100번 하기보다 더 낫다.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09/10/21, 동아일보 칼럼에서)
“애경은 50년 전 우리 국민이 무엇 하나 쓸 만한 생필품이 없던 시절에 유지사업을 시작해 꽃을 피웠다는 점에서 남다른 긍지를 느낀다.” (2004/06/08 애경그룹 창립 50돌 맞아 CI(기업이미지)를 변경하며)
“나도 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전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볼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모성에서 출발했고, 남편의 유업을 그냥 버려둘 수 없다는 아내로서의 의리, 애경 종업원에 대한 책임감 등이 복합돼 운명적으로 기업경영을 맡아야겠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서 무모한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1994/01/01, 자서전 ‘밀알 심는 마음으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