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미국 정부의 추가 투자 압박 속에서 미국 내 AI 반도체 생산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즈니스포스트>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의 미국 투자를 압박하면서 후공정(패키징) 뿐만 아니라 전공정(웨이퍼 생산)도 일부 미국에서 진행해야 할 필요성을 체감한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SK하이닉스가 국내에도 1100조 원 규모의 추가 투자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한 만큼 최태원 회장은 반도체 제조 비용 부담이 큰 미국 투자에 신중히 접근할 것으로 예상된다.
19일 반도체 업계 취재를 종합하면 SK하이닉스가 나스닥에 미국주식예탁증서(ADR)를 상장한 데 이어 미국 현지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방안까지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태원 회장은 SK하이닉스 ADR 상장 직후 CNBC와 인터뷰에서 "인디애나주 첨단 패키징 시설 외에도 추가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며 "전력과 용수, 인력, 공급망 등 필요한 여건이 갖춰진다면 메모리 생산공장 건설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는 현재 38억7천만 달러(약 5조7천억 원)를 투자해 미국 인디애나주에 AI용 고대역폭메모리(HBM) 패키징 시설을 건설하고 있다. 이르면 2028년 하반기부터 제품을 양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최 회장은 주요 메모리 고객들이 미국에 있는 것을 고려해 패키징은 물론 전공정까지 현지에서 진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전공정은 실리콘 웨이퍼 위에 미세한 전자 회로를 새겨 반도체를 만드는 제조 과정이며, 후공정(패키징)은 회로가 완성된 웨이퍼를 개별 칩으로 자르고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조립한 뒤 최종 품질을 검증하기 위해 테스트하는 단계다.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한 AI 생태계가 미국에 집중되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첨단 메모리 공급망 역시 현지화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에 SK하이닉스도 지난 2월 미국에 AI 솔루션 기업인 'AI 컴퍼니'(가칭)를 설립하며, 미국을 무대로 AI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 (왼쪽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재명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6년 6월29일 청와대에서 열린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기업 투자계획 발표 뒤 손을 잡고 있다. <연합뉴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9일(미국 현지시각) 뉴욕주 클레이 타운에서 열린 마이크론 반도체 공장 콘크리트 타설 기념식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생산시설을 짓게 하고 싶다"며 "한국의 두 메모리 업체와 관련 논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는 임기 말까지 전 세계 반도체의 40%를 미국 내에서 생산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에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지을 경우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한국무역협회(KITA) 국제무역통상연구원에 따르면 미국 내 반도체 제조시설의 운영 비용은 제3국 대비 최대 40%가량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인건비, 허가 비용, 산업 안전 및 보건 규정 비용 등을 고려하면 경제성은 더 떨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 마이크론도 현재 전체 메모리 생산량의 약 90%를 대만, 싱가포르, 일본 등 아시아에서 생산하고 있다.
게다가 이미 SK하이닉스는 국내 용인·청주·광주 생산거점에 총 1100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600조 원, 청주 생산기지에 100조 원, 새롭게 발표한 광주 반도체 클러스터에 단계적으로 400조 원을 투입한다.
천문학적 금액을 국내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상황에서 동시에 미국에도 설비투자를 진행하기에는 재무 여력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또 반도체 생산량을 갑작스럽게 확대하면 향후 공급 과잉 가능성도 커질 수 있다.
이에 국내 투자를 중점적으로 진행하되 빅테크 맞춤형 반도체를 미국에서 생산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는 "미국의 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이미 미국 내 추가 투자를 요청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 빅테크가 주문하는 일부 맞춤형 메모리를 미국에서 생산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