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갈등, 미국 금리인상과 환율급등에 따른 비용부담 증가 등 국내 기업들은 코로나19 이후 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국내 대기업 총수들의 소식 가운데 상당 부분은 ‘2030 부산세계박람회(엑스포)’를 유치를 위해 어느 나라의 대통령 등 해외 정치인을 만났다는 내용이 차지한다.
 
[기자의눈] 국제정세 급변에 기업 '생존' 위기, 정부가 짐 되지는 말아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이 2022년 9월13일 파나마시티에 위치한 대통령궁에서 라우렌티노 코르티소 파나마 대통령을 만나 ‘2030년 세계박람회’ 부산 개최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고 있다. <삼성전자>


부산엑스포 유치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그렇다고 쳐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5대 그룹 총수들 모두 전해지는 동정의 절반 이상이 부산엑스포와 관련한 것이다.

특히 이 부회장은 8월15일 특별사면을 받은 뒤 대통령 특사로 임명돼 최태원 회장과 함께 ‘투톱’ 체제로 부산엑스포 유치 지원에 전사적 역량을 동원하고 있다. 이에 정치권이 엑스포 유치를 위해 이 부회장을 사면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정부가 엑스포 유치를 위해 대기업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이 ‘생존’을 걱정하는 상황에 놓인 지금 기업 총수들 모두 정치적 이벤트인 엑스포 유치에 동원되는 현 상황은 정상적이지 않다.

기업인들이 현재 느끼는 위기감은 최고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21일 해외출장을 마치고 김포공항으로 돌아오면서 ‘연내 회장 승진 계획이 있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회사가 잘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는데 이는 현재 경영상황이 자신의 회장 승진을 고민할 때가 아니라는 의미로 읽힌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생존'이라는 단어까지 썼다.

최 회장은 21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특파원 간담회에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지금은 이익보다 급한 게 생존”이라며 “기업 혼자서 해결하는 게 말이 안 되고 (정부의) 더 넓은 선택이나 지원, 협업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더 직접적으로 위기의식을 표현했다.

삼성그룹과 SK그룹은 지정학적 역학구도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기업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올해 상반기 역대 최대급 실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질 수 있다는 긴장감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특히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주도하는 '칩4' 반도체 동맹 참여 여부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위상이 한순간에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우리나라가 칩4에 참여해 중국을 자극하면 국내 기업은 최대 반도체 수출국을 잃을 수 있다. 만약 칩4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첨단산업 공급망에서 배제돼 반도체 기술력 약화가 초래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아직도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만과 한국을 방문해 칩4 동맹을 강화하려는 미국 권력서열 3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휴가를 이유로 만나지 않으면서 미국과 관계에서 매우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일본과 대만을 포함하는 칩4 동맹에서 한국이 가장 약한 고리라는 평가를 받는 상황에서 이런 윤 대통령의 태도는 국내 기업들에게 리스크 요인으로 부각됐다.

또 윤 대통령은 21일 미국 뉴욕에서 유엔(UN)총회 관련 행사를 마친 뒤 비속어를 써 미국 주요 언론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기업들이 복잡한 국제 역학관계 속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정부가 적극 지원해도 모자란 시기에 정부가 속앓이의 원인을 제공하는 모양새다. 

정부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완화법(감축법) 보조금 대상에 현대자동차 등 국내 기업이 제외된 것과 관련해서도 법안 통과 뒤에야 미국정부와 실무 협의에 착수하는 등 늑장 대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완화법은 이미 발효된 만큼 정부의 뒤늦은 대처가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미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와 전기차 등 핵심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법안들을 제정하고 중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 배터리 기업에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와 비교하면 우리 정부의 정책적, 외교적 움직임은 너무 안일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국내 기업들은 지정학적 갈등에 고환율, 고금리, 고물가 등 ‘3고’ 현상이 이어지며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시기에 기업들이 정부에 천문학적인 보조금이나 특혜를 원하는 게 아니다. 기업은 기업의 몫을 할테니 정부는 정부의 몫을 최선을 다해 해달라는 게 기업인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정부는 기업을 포함한 국가적 이익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니 최소한 짐이라도 되지는 말아야 한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이던 3월 6개 주요 경제 단체장과 만남에서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방해 요소를 제거하는 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행보를 살펴보면 정작 정부가 기업 활동에 큰 방해가 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