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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 레시피] 영화와 현실, '가스라이팅'과 '마약'이라는 괴물의 얼굴들

이현경 muninare@empas.com 2023-10-27 08:3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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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 레시피] 영화와 현실, '가스라이팅'과 '마약'이라는 괴물의 얼굴들
▲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는 영화 ‘가스등(Gaslight)’(조지 쿠커, 1944)에서 유래했다. 보석을 훔치기 위해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고 아내를 정신적으로 취약한 사람으로 만드는 남편의 행동에서 파생된 말이다.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조작해서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한 뒤 마음대로 조정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사진은 영화 가스라이트 공식 트레일러. < Rotten Tomatoes Classic Trailers 유튜브 채널 화면 갈무리 >
[비즈니스포스트] 최근 며칠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 뉴스의 키워드는 ‘가스라이팅’과 ‘마약’이다.

재벌을 사칭하는 고전적인 사기 수법에 성별까지 속이는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졌고 평소 전혀 짐작을 할 수 없었던 의외의 인물이 마약 사범으로 수사 선상에 올랐다. 가스라이팅과 중독은 인간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자율성을 박탈한다.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는 영화 ‘가스등(Gaslight)’(조지 쿠커, 1944)에서 유래했다. 보석을 훔치기 위해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고 아내를 정신적으로 취약한 사람으로 만드는 남편의 행동에서 파생된 말이다.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조작해서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한 뒤 마음대로 조정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당시 인기 스타 잉글리드 버그만이 아내 폴라 역을 맡았고 사건을 해결하는 경찰로는 조셉 코튼이 출연했다. 

폴라는 밤마다 거리에 가스등이 켜질 무렵이 되면 다락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음을 듣는데 남편은 그녀를 환청을 듣는 정신병 환자로 몰아간다.

교묘하게 조작된 일상의 사건들이 쌓여가자 폴라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스스로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른다. 가로등이 가스등이었던 영국 런던의 고풍스러운 풍경, 몽환적인 분위기의 화면, 극적인 반전 등이 인상적인 고전영화다.

영화나 드라마는 사회 현실을 때론 한 발 느리게 때론 한 발 빠르게 반영한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들에서 특이한 현상이 눈에 띤다. ‘7인의 탈출’(SBS), ‘최악의 악’(디즈니+), ‘힘쎈여자 강남순’(JTBC) 같은 최근 드라마에는 마약이 주요 소재로 사용된다. 

과거 마약은 드라마의 소재로 거의 쓰이지 않았다. OTT플랫폼이 많아지다 보니 드라마의 수위도 높아지고 소재도 다양해져서 나타난 현상일 수 있지만 마약이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우리 사회 깊숙이 퍼졌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막장 드라마의 극을 달린 ‘7인의 탈출’에는 마약 파티를 벌이고 환각에 취해 집단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소위 상류층 인사들이 이성을 잃고 광기에 휩싸여 발악하는 모습은 드라마로 만들다 보니 과장되었겠지만 현실과 완전히 괴리된 판타지로만 느껴지지 않아 더 그로테스크했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최악의 악’은 필름 느와르 성격의 액션 드라마이다. 마약 수사를 위해 범죄 조직에 언더 커버로 잠입한 경찰(지창욱)을 중심으로 어린 나이에 조직을 장악한 보스(위하준), 두 남자가 동시에 사랑하는 여자(임세미) 사이의 갈등이 드라마에 긴장을 부여하는 핵심 요소다. 

전형적인 무거운 액션과 멜로가 혼합된 최악의 악과 정반대로 코믹 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에도 마약은 중요한 소재이다. 여자주인공(이유미)이 고아로 몽골에서 홀로 성장해 강남 부자 엄마(김정은)와 극적으로 상봉하고 남자친구(옹성우)의 마약 수사를 돕는다는 줄거리다. 

‘힘쎈여자 도봉순’(JTBC, 2017)에 이은 시즌2로 가문 대대로 여자들이 괴력을 갖고 있다는 설정은 같지만 드라마의 배경이 외국으로 확장되었고 힘만 센 게 아니라 점프 능력도 갖춘 것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두 드라마에서 특기할 사항은 마약의 불법 유통이 국제적인 커넥션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영화에서 마약이 중요 소재 중 하나로 다뤄진 것은 2000년 이후이다. 한국에서는 취약했던 스릴러 장르의 성장과 마약청정국이라는 이미지가 조금씩 무너지는 현상이 공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사생결단’(최호, 2006), ‘아저씨’(이정범, 2010)가 2000년대 마약 소재 범죄 영화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다.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마약 조직을 검거하는 이야기를 다룬 사생결단에서 마약에 중독된 젊은 여성을 연기한 배우 추자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인간의 바닥을 보여줬다. 

‘여자 아이를 보호하는 외로운 아저씨’라는 대중서사의 흥행공식을 제대로 펼친 공전의 히트작 아저씨에서는 어린 아이들을 유괴해 개미굴에 가둔 뒤 마약 배달을 시키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대낮에 인형 뽑기 기계에 마약을 던지기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아저씨(원빈)와 더불어 관객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고등학교 앞에서 마약이 든 음료를 건넨 사건의 공판이 열렸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제는 부산의 낙후된 뒷골목 셋방이나 변두리 어두침침한 다락방이 아니라 강남 고등학교 앞에 마약이 출현했다니 무섭다.

자신이 심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과 ‘마약’에 대해 어느 때보다도 복잡다단한 생각에 빠지게 만든 한 주였다. 이현경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다. 평론집 '영화, 내 맘대로 봐도 괜찮을까?'와 '봉준호 코드', '한국영화감독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등의 공저가 있다. 단편영화 '행복엄마의 오디세이'(2013), '어른들은 묵묵부답'(2017), '꿈 그리고 뉘앙스'(2021)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영화에 대해 쓰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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