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어 유럽도 전기차 지원 차별하나, 현대차 기아 ‘이중고’ 가능성

▲ 현대자동차와 기아가 미국과 유럽의 보호무역 확산에 따라 정책적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나온다. 현대차 전기차 주력모델 '아이오닉5' 생산라인.

[비즈니스포스트] 유럽연합(EU)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지급 차별에 반발해 다양한 방식으로 설득에 나섰지만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오히려 유럽이 미국을 뒤따라 자체적으로 보호무역주의 법안 도입을 추진하면서 현대자동차와 기아가 미국 및 유럽시장에서 ‘이중고’를 겪을 수 있다는 전망도 고개를 든다.

영국 가디언은 30일 논평을 내고 “미국 바이든 정부의 전기차 정책은 유럽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유럽도 불평을 멈추고 자체적으로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유럽연합은 북미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에 반발해 다양한 채널을 활용하며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미국의 전기차 지원 정책에 대응 방안을 찾는 태스크포스(TF)가 유럽연합 내에 신설됐고 미국을 공정무역 위반으로 WTO(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른 시일에 조 바이든 대통령과 직접 만나 전기차 보조금 차별에 관련한 유럽연합 및 현지 자동차기업의 의견을 전달한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그러나 가디언은 마크롱 대통령의 이런 노력이 미국의 정책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바라봤다. 바이든 정부가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유럽이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대신 자체적으로 지원 프로그램을 신설하는 등 다른 방식으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유럽연합이 이에 맞춰 실제로 유럽 내 자동차기업을 위한 보조금 지원 프로그램 신설을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은 점차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티에리 브에통 유럽연합 집행위원은 현지시각으로 29일 독일에서 열린 산업 콘퍼런스에 참석해 “미국의 전기차 보조금 정책에 수동적으로 대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유럽 자동차기업들이 미국 정부의 차별적 지원에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본격적으로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시행 계획을 추진하겠다는 의미다.

마크롱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유럽의 자체 지원 프로그램 도입에 더욱 불씨를 당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가 유럽판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필요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10월 프랑스 현지언론과 인터뷰에서 직접적으로 “중국과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에 유럽이 뒤처질 수 없다”며 “유럽 내 제조기업을 위해 지원금을 축적해 둬야 한다”고 언급했다.

결국 마크롱 대통령이 유럽연합 대표로 나서 바이든 대통령과 전기차 지원 정책에 관련해 의견을 교환하는 일은 유럽의 유사한 지원 정책 도입에 명분을 쌓기 위한 목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이어 유럽도 전기차 지원 차별하나, 현대차 기아 ‘이중고’ 가능성

▲ 유럽시장에서 판매되는 기아 전기차 'EV6'.

가디언은 유럽의 주요 지도자들이 자유무역 시대가 끝났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미국의 정책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권고도 내놓았다.

이런 변화는 이미 미국의 차별적 전기차 지원 정책으로 보조금 지급이 중단돼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대차와 기아에 이중고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이 모두 현대차와 기아 전기차의 주요 시장이었던 만큼 보호무역 법안 확대에 따라 두 지역에 수출하는 전기차 판매에 불이익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유럽이 미국과 같이 유럽 내 공장에서 생산된 전기차 또는 유럽 기업의 전기차에만 보조금 지급을 추진한다면 현대차와 기아의 가격 경쟁력은 상대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유럽의 전기차시장 규모는 현재 미국을 두 배 가까이 앞서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가 받을 수 있는 잠재적 타격도 그만큼 클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와 기아의 10월까지 유럽시장 전기차 누적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14% 늘어나며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도 1~3분기 기준으로 현대차와 기아 전기차 합산 점유율은 테슬라에 이어 2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전기차사업에서 미국과 유럽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셈이다.

현대차와 기아가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의 보호무역주의 기조를 돌파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세계 전기차시장에서 성장 기회를 놓칠 위기에 처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유럽연합 등 막강한 세력이 주도하는 글로벌 전기차시장 판도 변화에 한국 정부와 기업들이 맞설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제약이 클 수밖에 없다.

유럽의 전기차 지원법 도입을 주장하는 유명 인사들의 목소리는 점차 확산되고 있다.

세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현지시각으로 29일 정치전문지 폴리티코가 주최한 콘퍼런스에서 “유럽도 미국과 같은 규모의 전기차 지원 정책을 실행하며 더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