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강남구 강남역 사거리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언급한 현수막과 이를 비판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필자 직접 촬영> |
매일 아침 출근길 나의 마음은 늘 불편하다.
회사로 가기 위해선 서울 강남역 사거리를 지나야 하는데, 이곳을 지날 때 마다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하려는 나의 계획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삼성’ 을 둘러싼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인신모욕성의 현수막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선 삼성을 넘어 야당 정치인 저격 등 저급한 정치적 전장터가 됐다.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도 운전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보게 된다. 나는 전혀 원치 않는 언어폭력의 공해에 무방비로 노출된 피해자이다.
시작은 강남역 사거리의 삼성 서초사옥 방향에 무더기로 걸린 현수막들이었다. 이 현수막들에서는 우리나라 대표 기업인이라 할 수 있는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을 ‘강도’ 또는 ‘노동자 냉동폐기 범죄자’로 비하됐고, 삼성은 악질 기업으로 묘사됐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기에 진실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그냥 무방비로 이러한 섬뜩하고 불쾌한 글들에 노출될 뿐이다. 시위대가 틀어 놓은 ‘장송곡’과 노동가요 등은 차량에 음악 볼륨을 높이면 피할 수 있지만 운전하면서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얼마전 비즈니스차 온 외국 손님이 강남역 사거리를 지나며 “저것들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차마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그냥 삼성을 비판하는 글들”이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이러한 현수막이 언제부터 걸렸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꽤 오래전부터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상황이 돌변했다. 한 보수 단체에서 삼성 타운쪽 사거리에 있던 현수막들의 자리에 “깡패노조, 사회암덩어리 노조” 등등의 모욕적 언어로 민주노총의 해체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이재용 부회장이 활짝 웃는 사진과 함께 “삼성힘내라! 이재용 파이팅!”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나란히 걸렸다.
대신 위의 삼성 모욕 현수막들은 반대편 도로로 밀렸다. 졸지에 강남역 사거리가 ‘삼성’을 사이에 두고 보수와 노동계의 이념대결판으로 변해버렸다.
이 부회장을 응원하는 현수막 옆에는 “국민과 함께! 윤석열답게! 자신있게!”라는 문구와 함께 윤석열 대통령의 사진을 담은 현수막까지 나란히 걸렸다. 보도를 보니, 이 보수단체에서 24시간 집회신고를 하고 삼성을 격려하는 현수막들을 내건 것이었다. 이 부회장의 사면을 축하하고 삼성을 격려하는 시민들이면 참여할 수 있는 집회라고 한다.
삼성 비난 현수막에 느낀 불쾌함은 이제 당혹감으로 변했고, 실소를 자아냈다. 지금까지 많은 나라를 방문해 보았지만,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노골적인 찬사와 응원을 담은 현수막을 장기간 내거는 도시와 나라는 본적이 없다. 이게 우리 사회의 민낯이고 수준인가?
또 노동자쪽에서 내건 현수막 옆과 아래쪽에 현수막을 걸고 화살표로 노동쪽 현수막을 가리키며 “돈달라는 소리죠?” “저희 목적은 돈입니다”라는 글을 적었다. 한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웃프다.
이러한 현수막 풍경은 집회가 끝난 뒤에도 한달 이상 이어졌다.
얼마 전부터 강남역 사거리의 현수막의 주인공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재용 부회장에서 더불어 민주당 이재명 대표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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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판하는 보수단체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필자 직접 촬영> |
이 대표를 ‘상습 거짓말쟁이’라고 비하하며 구속수사하라는 플래카드부터 대장동 사건과 이 대표의 관계를 부각시키는 현수막, 공무원노조 해체를 주장하는 현수막 등이 대거 걸렸고, 그나마 삼성사옥 건너편으로 밀려났던 삼성 비난 현수막들은 자취를 감췄다. 현수막 시위 맞대응을 주도한 보수단체가 강남역 사거리의 주도권을 완전 장악한 셈이다.
도대체 가수 싸이가 목놓아 부른 ‘강남스타일’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강남역 사거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서울에서 손꼽히는 경제문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강남역 사거리는 이제 ‘이념대결의 광장’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아주 저급하고 폭력적인 언어로 무장한 구호들이 넘쳐나는 살벌한 공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드는 근본적인 의문. 이런 명예훼손적이고 시민들의 불쾌감을 자아내는 현수막들이 시도때도 없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인지, 경찰과 지방자치단사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이 ‘무법천지’로 변한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인터넷을 찾아보니 쉽게 풀렸다. 이와 같은 현수막은 관할 집회 및 시위 신고만한 채 실제로 열리지 않았거나 이미 종료된 행사에 이용된 것이라고 한다.
옥외광고물법상 현수막은 전용게시대에만 걸 수 있다. 그런데 집회용품으로 신고된 광고물은 옥외광고물법 제8조의 단속배제 대상으로 분류되어 지차제도 손을 놓아 버린 것이다.
경찰에 집회신고한 장소에 현수막을 게시하면 강제 철거도 어렵고, 신고자가 신고를 계속해서 연장하면 현수막을 장기간 내걸 수도 있다고 한다. 구청등에서는 재물손괴 등의 혐의로 처벌될까 두려워 현수막을 떼지 못한다고 한다.
서초구가 전문가 자문을 거쳐서 ‘용기를 내어’ 지난 7월 강남역 사거리 주변과 서울회생법원 앞 등 3개 구역 현수막 50여 개를 철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다시 내걸린 불쾌한 현수막을 보고 피곤해한다. 상황이 이쯤 되면 법과 행정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이 틀림없다.
앞으로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보수와 진보 노동계쪽에선 강남역 사거리를 ‘현수막 점령’하기 위해 구청에 집회신고 부킹 경쟁이 벌일 것이고, 아마도 순번을 달리하며 ‘현수막 전쟁’을 이어갈 것이다. 현지 거주자나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불쾌한 메시지에 ‘원치않는’ 노출을 당하리라.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이 강남역 사거리의 ‘삼성’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현대자동차 강남 양재사옥 인근도 각종 노조와 시민단체들이 내건 현수막과 핏빛 글씨로 총수 일가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시위 판넬이 거리를 도배하고 있고, 서울 수하동 동국제강 본사 앞에도 산재로 사망한 하청업체 직원의 분향소와 현수막이 걸려있다. 대기업 사옥 뿐 아니라 재벌총수들의 집 부근에도 시위 집회가 일상화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억울한 사연이 있는 산재피해자나 해고 근로자들의 ‘사회적 호소’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에 대해 사회가 포용할 수 있는 선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기업과 기업인,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저주’를 담은 듯한 원색적인 문구의 현수막, 장송곡을 비롯한 확성기 세례 등등은 ‘표현의 자유’로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은 것이 아닐까.
▲ 서울 서초구 강남역 사거리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응원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필자 직접 촬영> |
나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건강함을 잃고 있다고 본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지도록 강요받고 있다. 건강한 토론이 이뤄지는 공론장은 사라지고 욕설과 비난이 난무하는 광장이 이를 대신한다.
기업들도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두 손을 든 것 같고, 경찰과 지자체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물리적인 폭력 등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면 눈을 감는다.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표현의 자유’는 아주 중요한 인권이지만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보호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들이 있다. 그 중 특정 계층 또는 그룹에게 원색적 저주와 비난을 담고 있는 현수막의 내용과 가장 법적으로 가까운 것은 ‘혐오표현’(hate speech)가 아닐까 싶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향한 잔인하고 폭력적인 언어, 몸짓, 파괴 행위의 사용’으로 다른 사람을 비하하고 비인간적으로 만들려는 것’으로 정의한다. 물론 혐오표현은 인종, 민족, 국적, 성정체성 등을 이유로 행해지는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발언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치적 의견까지도 넓게 해석하기도 한다.
헌법재판소는 혐오표현 제한에 대한 타당한 법리를 제공하고 있다. 2019년 11월 헌법재판소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중 차별과 혐오표현을 금지하고 있는 조항이 ‘표현의 자유 침해’한다는 청구를 기각했다. 당시 헌재는 혐오표현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허용되는 의사표현이 아니며, 민주주의의 장에서 허용되는 한계를 넘는 것으로 민주주의 의사형성의 보호를 위해서도 제한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지난 여름, 문재인 전대통령의 평산마을 사저 앞에 보수 단체 등이 몰려가 확성기를 틀고 시위를 벌여 정치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다. 문 전대통령 사저 시위 이후 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부랴부랴 집시법 개정안을 경쟁하듯 내놓았다.
대부분 ‘악의적 표현으로 청각 등 신체나 정신에 장애를 유발할 정도의 솜을 발생해 신체적 피해를 주는 행위 금지’, ‘집회 및 시위현장에서 과도한 욕설과 혐오표현을 반복적으로 송출해 다른 사람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들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법안들은 이후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다. 언론의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지난 8월 대통령 경호처가 문 전대통령 사저 경호를 강화하겠다고 밝히면서 사저 반경 300m까지 경호 구역이 넓어져 당장의 시위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일수도 있다.
나는 문 전대통령의 사저 시위 문제로 촉발된 정치권의 관심이 제발 용두사미가 되지 않길 바란다. 이번 기회에 그간 모두가 방치해왔던 비이성적이고 일그러진 시위 문화를 정상화시켜야 한다. 많은 시민들에게 폭력적 언어로 파괴된 일상의 평온함을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한다. 정치적 의사표현을 위한 집회나 시위 등은 충분히 허용되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법과 행정의 공백을 이용한 ‘장기간’의 현수막 전쟁, 확성기 전쟁은 이제 사라졌으면 한다.
법과 제도의 공백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 못한다면 이를 빨리 메꾸면 된다. 이를 방치하고 외면하는 사이 우리가 공들여 만들어 온 민주주의는 점점 병들어 갈 것이다. 오늘은 느닷없이 기업 대표를 난도질 하는 현수막이, 내일은 기업인을 찬양하는 현수막이 걸리는 우리 시대의 웃픈 현실도 제발 여기까지였으면 한다. 이태희 CUE코리아 대표
대학졸업 후 30년간 언론(한국일보)과 공무원(방송통신위원회), 국제기구(TEIN), 글로벌 기업(마이크로소프트) 등 공공과 민간의 영역을 넘나들며 사회의 ‘새롭고 긍정적인 변화’를 추구해왔다. 2020년부터 글로벌 마케팅·테크놀로지 기업인 CUE Group의 한국 대표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변화의 지향-사상의 자유시장과 인터넷의 미래'(나남, 2010)이 있으며, 몇 권의 공저와 학술논문들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