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김문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이다.

윤석열정부의 첫 경사노위 위원장을 맡아 근로시간과 임금체계 개편, 노동시장 이중구조 완화 등을 뼈대로 하는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1951년 8월27일 경상북도 영천에서 4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나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나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당한 뒤 25년 만인 1994년 졸업했다.

대학생 때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구로공단에서 미싱사로 일했다. 대학에서 제적된 뒤 여러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에 전념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다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방용석 등과 함께 한국노동자복지회를 조직해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1986년 직선제 개헌 투쟁 주도 혐의 등으로 구속돼 복역하다가 2년6개월 만인 1988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민중당 창당에 참여해 노동위원장을 거쳐 14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혁명의 시대는 갔다"고 말하며 여당인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민자당이 이름을 바꿔 새로 창당한 신한국당 소속으로 15대 총선에 출마해 부천시 소사구에서 당선된 뒤 16대를 거쳐 17대까지 3선 의원을 지냈다.

국회의원을 사임하고 4회 지방선거에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으며 재선에 성공했다. 경기도지사 시절 18대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박근혜 후보에게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6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 불출마를 선언했다. 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구갑에 출마했다가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7회 전국 동시지방선거 때 서울시장 선거에 자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경영활동의 공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에 임명
김문수는 2022년 9월29일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정부, 노동자 대표, 사용자 단체가 고용노동 정책을 함께 협의하는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다. 경사노위 위원장은 장관급으로 임기는 2년이다.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은 브리핑에서 인선 배경을 놓고 "정치력과 행정력을 모두 겸비했고 특히 노동 현장 경험이 많아 정부와 사용자 단체, 노동자 대표 사이 원활한 협의와 의견 조율, 노사 협력·상생의 노동시장 구축 등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 과제를 보다 적극 추진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김문수는 10월4일 취임식에서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대화와 타협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김문수는 취임사에서 "사회적 대화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이 천명한 노동개혁 추진의 중심축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노동개혁의 목적은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함께 노동시장 격차를 줄이고 공정성을 높이는 것"이라며 "노사 사이 대화와 타협을 중심으로 전문가들의 집단지성을 모아 국민적 공감대를 이룰 수 있도록 노동개혁을 차근차근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속가능한 경제사회 발전을 위해 사회적 대화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문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한 뒤 각계의 의견을 청취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김문수는 10월8일 한국노총을 방문해 김동명 위원장 등 한국노총 임원들과 노동 현안을 놓고 간담회를 가졌다.

이어 10월13일 한국경영자총협회를 찾아 손경식 회장을 면담했고, 10월28일 한국중견기업연합회를 방문해 중견기업들의 애로사항을 들었다.

11월3일에는 중소기업중앙회를 찾아 김기문 회장과 간담회를 진행했으며 같은 날 대전에서 열린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소상공인위원회의 '소상공인 계층 사회적대화·정책 간담회'에도 참여했다.
[Who Is ?]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왼쪽)이 2022년 10월6일 여의도 한국노총을 방문해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기도지사 시절
김문수는 제4회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59.68%의 득표율을 얻어 30.75% 득표하는 데 그친 진대제 열린우리당 후보를 누르고 경기도지사에 당선됐다. 제5회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해 52.20%의 득표율을 얻어 47.79% 득표한 유시민 국민참여당 후보를 꺾었다.

경기도지사 재임 중 경기도 최초로 대중교통 환승할인이 적용된 수도권 통합 요금제를 도입했다. 수도권 통합 요금제는 2004년 서울시 대중교통 체계 개편 이후 2년 넘게 지지부진하던 과제였는데, 김문수가 2006년 7월 경기도지사에 취임한 뒤 곧바로 재협상에 나서면서 급진전돼 2007년 7월1일부터 시행됐다.

경기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경기순환버스도 도입했다. 경기순환버스의 운영을 활성화하기 위해 2013년 4월1일 수원시와 의정부시를 최단거리로 빠르게 오가는 경기순환 8401번 노선을 시행했다.

김문수는 2010년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정부의 수도권 간선철도 계획을 수정해 수도권 주요 지점들을 연결하는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를 최초로 기획했다. GTX는 보수정치인인 김문수가 마련했지만 문재인 정부도 주요 교통정책으로 추진했다.

경기도 도정에서 각종 전시행정으로 재정부실을 일으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3년에 경기도에서 연간 예산의 10%에 이르는 1조5천억 원의 재정결함이 발생함에 따라 IMF 사태 이후 처음으로 감액추경이 편성됐다.

2012년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해 도지사 업무를 소홀히 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김문수는 이 두 가지를 다 인정했다.

김문수가 두 번 도지사를 역임하는 동안 경기도의 재정자립도는 2006년 68.8%에서 2013년 60.1%로 떨어졌다. 2014년 제6회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도전한 남경필 새누리당 후보와 김진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는 경기도 재정 건전성과 관련해 김문수에 대해 엇갈린 평가를 내놓았다.

도지사 임기를 마친 뒤에는 새누리당 보수혁신위원장으로 활동했고, 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구갑에 출마했으나 고등학교 후배인 김부겸 후보에게 24.6%포인트라는 큰 득표율 격차를 보이며 패배했다.

이후 개인방송을 통해 보수진영 스피커로서 목소리를 냈다. 제7회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23.34%의 득표율을 얻는 데 그쳐 박원순 서울시장(52.79%)에게 3선을 허용했다.

△정계 입문 및 국회의원 시절
6월항쟁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 김문수이재오, 장기표, 이우재 등과 손을 잡고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과 노동운동 세력 일부를 모아 1990년 민중당을 창당했다.

김문수는 노동자 밀집 지역인 서울 구로구갑의 지구당 위원장을 맡았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김문수는 전국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민중당은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득표율 미달로 해산됐다.

이후 김문수는 택시기사로 일하다가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보수로 전향했다.

김문수는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에 출마했다. 김문수는 39.19%의 득표율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측근인 박지원 후보(37.25%), 현역 국회의원인 박규식 자유민주연합 후보(16.69%) 등을 꺾고 당선됐다.

제16대와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각각 61.62%와 52.94%의 득표율로 여유있게 당선됐다.

김문수는 수도권 전철 1호선 경인선 복복선을 개통시키는 데 힘을 보탰다. 전국 최초 급행열차 개통에도 기여했다. 그 결과로 김문수의 지역구에 있는 송내역에서 구로역까지 이동시간이 7분 단축됐다.

이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해 17대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노동운동
김문수는 운동권의 황태자로 불렸다. 굉장히 전투적이면서 치열한 노동운동가였고, 학생운동의 전설로 남았다.

김문수는 대학생 때 심재권 전 민주당 의원의 권유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대학교 1학년 때 5년 선배인 심재권의 권유로 서울대 학생운동 단체 가운데 하나인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했다.

2학년 때 김근태 전 의원을 따라 공활(대학생들의 공장 체험)을 한 뒤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전태일 열사 사건을 깊게 공부하면서 노동운동에 집중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대학에서 제적된 뒤 청계천 피복공장 재단보조공으로 일했고, 이후 염색공장 등 여러 종류의 공장을 다니며 직공으로 일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공부해 환경관리기사 2급, 안전관리기사 2급 등 국가기술자격을 획득했다.

1976년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에 선출됐지만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영향으로 회사가 노조 해산을 추진했고, 이에 따라 김문수는 노조위원장을 그만두고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이후 구로 동맹파업을 주도했고, 경찰에 체포된 뒤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서대문구치소 수감 중 기소유예로 석방돼 한일도루코로 복직했다.

한국노동자복지회를 조직해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 등을 역임했다. 1986년 인천시 5·3 직선제 개헌 투쟁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복역하다가 2년6개월 만에 1988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Who Is ?]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이 2022년 10월4일 서울 종로구 경사노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노동문제와 관련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야 하는 일이 당면한 과제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추진하는 사회적 대화에 불참하고 있는 민주노총을 설득해 대화의 자리에 나오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 때부터 경사노위 참여를 거부해오고 있다.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온건한 한국노총과 비교해 민주노총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와 노사정 합의를 거부하는 완고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김문수윤석열 대통령이 천명한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근로시간 및 임금체계 개편, 노동시장 이중구조 완화 등을 뼈대로 하는 노동시장 개혁이 제대로 추진되려면 사회적 대화를 통한 노사정 합의가 전제돼야 하는 만큼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김문수는 노란봉투법 및 중대재해처벌법 등 노동 분야 쟁점 사안을 두고 노동계와 큰 시각 차이를 보이고 있어 사회적 대화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문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한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노란봉투법안을 분석해봤는데 논란이 많을 수 있다"며 "노란봉투법은 민주노총의 연봉 많은 사람도 다 해당되는데 그 법으로 하청노동자만 득을 보겠느냐"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기업들의 과도한 손배소 제기)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과 법제화시키는 것은 다른 얘기"라고 말했다.

중대재해법에 대해선 "독소조항이 많고 문제가 많은 법"이라며 "법이 과도하기 때문에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고 한국에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 평가
[Who Is ?]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오른쪽)이 2022년 9월3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위촉장을 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통신사진기자단>

한국 노동운동계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20년 이상 노동운동을 하며 1980년대 노동운동을 대표했다.

전태일 열사의 모친 이소선 여사 역시 생전에 장기표와 함께 김문수를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 김문수가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이 된 지 한참 지난 뒤에도 이소선 여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차라리 잘했다 생각했다. 그 나쁜 놈들한테 고개 한 번 숙여서라도 문수도 이제 국회의원을 한 번이라도 해야 하지 싶다. 우리 기표도 그렇게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과 1980년대에 노동운동을 함께 했다. 서울노동운동연합에서 김문수는 지도위원, 심상정은 중앙위원장이었다. 그러나 이후 김문수는 성장 중심, 심상정은 분배 중심으로 노선을 달리했다. 심상정김문수를 두고 "동지 시절 전설이었다. 운동권의 황태자이자 하늘 같은 선배였다"고 회고했다.

김문수이재오 등과 함께 민주자유당에 합류하며 전향해 노동운동계 및 진보진영에 큰 충격을 줬다. 이후 보수정당 계보에 속하게 된 운동권 출신들은 김문수이재오를 따라 넘어간 사람들이다. 이들이 "오직 김문수 선배만 믿고 간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했을 정도로 운동권에서 김문수는 절대적 존재였다.

김문수는 이런 선택과 관련해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소련을 비롯해 공산주의권 국가들의 몰락을 지켜본 뒤 당장의 급진적 사회주의보다는 성장에 자원을 집중하되 복지도 함께 따라가야 한다는 온건론으로 노선을 선회한 것"이라고 밝혔다.

직선제 개헌 투쟁 주도 혐의 등으로 구속돼 1986~88년 감옥에 있으면서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고 사상의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김문수는 노동운동가 출신이지만 노동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자신의 유튜브 채널인 '김문수TV'에서 하이트진로 본사에서 농성하는 화물연대 노조원들이 부른 노래를 두고 "(노래 가사 중) 해방이라는 것은 노동해방을 의미하는데 하이트진로를 빼앗아 국유화시키자는 것"이라며 "사유재산 제도를 없애 노동자들이 해방되도록 하려는 사회주의자들의 구호"라고 비판했다.

또 '불법파업에는 손배(손해배상) 폭탄이 특효약'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김문수는 대중교통 분야에 관심을 많이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지사 시절 대중교통 정책과 관련해 여러 성과를 냈다. 교통행정 하나만큼은 김문수가 이명박 전 서울시장보다 낫다는 평가도 있다.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정치와 행정에 대해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고 개인 비리 등 잡음이 없는 편이어서 여당이 위기에 몰렸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조커 같은 카드라는 평가가 있었다.

하지만 경기도지사 시절 남양주 소방서에 전화를 걸어 119 신고 접수 요원에게 관등성명을 대라고 요구한 사건으로 정치적 타격을 크게 입었다.

15대 총선에서 부천 소사구에 출마해 '불이 나면 소방차 다음으로 김문수가 온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부지런하게 지역을 누빈 끝에 여의도에 입성할 수 있었다. 활발한 지역구 행보로 험지인 부천에서 노무현 탄핵의 역풍도 뚫고 3선까지 해냈다는 말이 나온다.

2016년 20대 총선이 다가오자 대구 수성구갑 출마를 선언했다. 대구와 가까운 영천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지만 정치적 기반은 경기도인 데다 대선 후보로까지 꼽히던 인물이 험지가 아닌 텃밭에 출마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선거 결과 보수의 성지라는 대구 수성구갑에서 김부겸 민주당 후보에게 크게 밀리며 낙선해 정치적 위상이 크게 깎였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해 23.2% 득표율로 2위에 그쳐 낙선했다. 현직 시장인 박원순 후보(52.8%)에게 크게 밀렸지만 당초 목표가 안철수 후보를 이기고 2등을 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구 수성갑에서 패배로 정치인생을 마무리했다면 텃밭에서조차 참패해 몰락한 거물 정치인으로 기억될 뻔했으나 당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의 요청에 따라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 자유한국당이 서울 2위를 탈환하도록 하면서 어느 정도 명예 회복에 성공했다.

여성에 대해 다소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2010년 10월8일 “청바지 한 장, 예쁜 아가씨 하룻밤”, 11월 2일 “소녀시대, 쭉쭉빵빵”, 2011년 22일 “변사또가 춘향이 따먹으려고”, 2014년 12월 29일 “여성들이 대체로 활동 폭이 남자보다 좁다” 등 여성비하 발언을 지속적으로 해 비판을 받았다.

정치적 행보를 놓고 철새라는 비판도 듣고 있다.

김문수는 2012년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불통 대통령이 될 것"이라며 박근혜 경선 후보를 거세게 비판했다. 하지만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당권이 친박에게 넘어가자 태도가 바뀌었다. 그러다가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직후엔 비박계 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관해 논의하는 비상시국위원회에 참가했다.

이후 다시 입장을 바꿔 비상시국위원회 인사 대부분이 바른정당으로 빠져나갈 때 자유한국당에 잔류했고, 2017년에 신념과 양심을 이유로 탄핵 반대 집회에 참여했다.

김문수는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에서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등 극우적 정치색을 보였다. 2020년에는 자유한국당에서 탈당한 뒤 전광훈 목사와 함께 극우 성향의 자유통일당을 창당하고 대표로 활동했다. 자유통일당을 이끌다 우리공화당과 합당해 공동대표에 올랐지만 합당 18일 만에 노선 차이를 이유로 탈당했다.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중학교 동창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3선개헌 반대 시위를 하다 제적됐다가 복적돼 대학입시를 치를 수 있었다.

경기도지사에 재선된 뒤 2010년 취임식과 2014년 퇴임식을 의정부시 가능역 한솥나눔 119무료급식센터에서 급식 봉사로 갈음했다.

종교는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노동계에 몸담으면서 환경기사, 택시기사 등 국가기술자격증 7개를 취득해 보유하고 있다.

어린 시절 가난했기에 소원이 갱죽 대신 세 끼 쌀밥을 먹어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공부를 잘해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입학식에 맨발에 검정고무신, 군복을 물들인 검정바지를 착용하고 참석했다. 대학 시절 용두동 판자집에서 생활했다.

사건사고
[Who Is ?]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이 2022년 10월31일 경기도 수원의 한 식당에서 노동계 인사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있다. <뉴스1>

△국가애도기간 술자리 논란
김문수는 이태원 참사로 지정된 국가애도기간 중인 2022년 10월30일 경기도 수원의 한 식당에서 노동계 인사들과 1시간 반가량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소주와 맥주를 마셨다.

정부 관료와 여야 정치인들이 저녁식사 모임 등을 자제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비판 여론이 일었다.

이에 대해 김문수는 "오래 전에 약속된 저녁 자리다. 나는 술을 못 먹는다. 먹은 게 없다"며 "어제는 그분들이 만나자고 해서 간 거다. 그분들은 밥 먹으면서 반주를 한다든가 했지만 나는 술을 먹은 게 없다. 식사하지 말라는 그런 게 있냐"고 해명했다.

이수진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국가애도기간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냐. 세월호 참사 당시 자작시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재해 빈축을 사고 사과했던 일을 까맣게 잊은 것 같다"며 김문수를 비판했다.

△색깔론 발언으로 국정감사장에서 퇴장당해
김문수는 2022년 10월12일 오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설전을 벌였다.

윤건영 의원은 김문수 위원장의 "윤 의원이 종북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주사파 운동권 출신 윤건영은 반미·반일 민족의 수령님께 충성하고 있다"는 과거 발언과 관련해 "(제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수령님께 충성하고 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느냐"고 물었다.

김문수는 "그런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야당 의원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발언 취소하라", "사과하라"고 하는 등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윤 의원은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애초에 질문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답변을 듣고 나니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라며 정회를 요청했다.

민주당 소속인 전해철 환노위원장은 김문수가 국회를 모욕했다고 판단해 감사 중지를 선포했다. 이후 환노위 국감은 오후에 다시 열렸다.

오후 국정감사에서 전용기 민주당 의원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종북 주사파라고 생각하나'라고 질문하자 김문수는 "문 전 대통령 본인이 신영복을 존경하는 대한민국 사상가라고 했는데 굉장히 문제가 많은 발언"이라며 "신영복 선생은 저의 대학교 선배로서 그분의 주변에 있는 분하고 같이 운동을 했기 때문에 신영복 선생을 존경한다는 사람은 김일성주의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신영복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라고 한다면 확실하게 김일성주의자"라고 거듭 강조했다.

김문수의 이 발언으로 국감이 파행에 이르자 전해철 위원장은 김문수가 국정감사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해 김문수를 국정감사장에서 퇴장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박근혜 옹호하며 서강대생과 설전
김문수는 2014년 12월2일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손호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초청으로 서강대 한국정치론 전공수업에서 강연하다가 대학생들과 설전을 벌였다.

김문수는 “박정희 딸이라고 동문인 박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국민투표로 뽑은 대통령이 창피하냐”고 물었다.

이에 일부 학생이 “네”라고 대답하자 “‘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육이 잘못된 것”이라며 “조상 욕하고 대통령 욕하는 지성은 참 지성이 아닌 가짜 지성”이라고 주장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SNS에 부적절한 글 올려
김문수는 2014년 4월17일 세월호 참사 현장을 방문하고 자신의 트위터에 '밤', '진도의 눈물', '가족', '캄캄바다' 등의 시를 올려 논란을 일으켰다.

밤이라는 시에는 “어린 자식 / 바다에 / 뱃속에 / 갇혀 있는데 / 부모님들 / 울부짖는 밤”이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런 시들을 트위터에 올린 것은 사고 피해자나 가족들을 고려하지 않은 부적절한 행위라는 비난이 김문수에게 쏟아졌다.

김문수가 사고 현장에서 피해자 부모에게 “여기는 경기도가 아니라 경기도지사로서 한계가 있다”고 대답한 것에도 질타가 쏟아졌다.

논란이 커지자 김문수는 시를 삭제하고 “진도 현장에서 이틀간 느낀 참담하고 비통한 제 심정을 짧게 표현한 것”이라며 “제 진심과 달리 오해를 초래하게 돼 무척 안타깝다”고 해명했다.

△'도지삽니다' 논란
김문수는 2011년 12월19일 병문안 차원에서 남양주시의 한 요양병원을 찾은 가운데 남양주소방서에 두 차례 긴급전화를 걸어 관등성명을 대라고 요구했다.

김문수는 전화로 그가 도지사 김문수라고 말했다. 첫 번째 전화를 받은 소방관은 장난전화로 생각하고 끊었다. 그러자 김문수는 두 번째 전화를 걸어 앞에 전화 받은 사람의 관등성명을 요구했지만 전화를 건 용건은 말하지 않았다.

이후 김문수는 경기도 소방재난본부에 개선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전화를 받은 두 소방관은 징계성 전보 조치를 당했다가 그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뒤 원대복귀됐다.

경기도 소방재난본부는 관내 소방관들에게 김문수의 목소리를 익히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가 그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해당 이메일을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쪼개기 후원금 사건 연루
김문수는 2011년 3월 버스회사를 운영하는 KD운송그룹의 계열사들로부터 노조원 명의로 1인당 10만 원씩 모두 2억9천여만 원의 후원금을 후원회 계좌로 송금받았다.

이에 대해 ‘쪼개기 후원금’이라는 비난이 일자 김문수는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도 없는 쪼개기 후원금을 받을 이유가 없다. 선거 때 후원금이 남아서 오히려 당에 반납했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검찰은 수사 후 KD운송그룹 노조위원장 등 8명을 불구속기소했지만 김문수는 관련 자금인지 몰랐다는 이유로 기소하지 않았다.

경력/학력/가족
◆ 경력
[Who Is ?]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김문수가 1988년 민가협(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 행사에 참석해 ‘양심수 전원 석방’을 외치고 있다.

1976년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에 선출됐다.

1992년 노동인권회관 소장을 맡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경기 부천시 소사구)에 당선됐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경기 부천시 소사구)에 당선돼 재선에 성공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에 당선(경기 부천시 소사구)돼 3선이 됐다.

2006년 경기도지사에 당선됐다.

2010년 경기도지사 재선에 성공했다.

2020년 자유통일당 대표를 맡았다.

2020년 자유공화당 공동대표가 됐다.

2022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 학력

1964년 영천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67년 경북중학교를 나왔다.

1970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당했다가 25년 만인 1994년 서울대를 졸업했다.

◆ 가족관계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이었던 1981년 9월 구로공단 내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었던 설란영과 결혼했다.

외동딸 김동주씨는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를 나와 사회복지사로 일했다. 2012년 외손자가 태어났다.

◆ 상훈

2012년 11월2일 지방자치단체 에너지 절감 유공으로 국무총리표창을 받았다.

◆ 기타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을 때 배우자 명의의 대구 수성구 아파트 등 재산 4억9252만 원을 신고했다.

1971년 신체검사에서 중이염으로 면제 판정을 받았다. 중이염으로 면제를 받을 정도면 후유증으로 청력장애가 있을 텐데 김문수가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병역기피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김문수는 "당시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국군보안대 요원에 끌려가 강제징집돼 국군 통합병원에서 중학교 3학년 때 걸렸던 중이염이 악화돼 징집면제 판정을 받았다"고 해명했다.

'80년대를 꿰뚫는 양심수 104인의 항소이유서'(1992), '아직도 나는 넥타이가 어색하다'(1995), '지옥철 대통령도 같이 타봅시다'(1996), '맨발로 쓴 일기장'(2003), '나의 길 나의 꿈'(2006), '나는 자유를 꿈꾼다 규제감옥 경기도에서'(2008), '나는 일류국가에 목마르다'(2009), '어디로 모실까요? 나는 경기도 택시운전사'(2010), '김문수 스토리 靑'(2011) '김문수는 말한다'(2012) 등의 책을 출간했다.

어록
[Who Is ?]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 2017년 3월11일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인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서울 한빛광장에서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 주최로 열린 태극기 집회에 참가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대 민법의 절대 원칙은 소유권이다. 공산주의가 소유권을 다 박탈해서 국가만 커지고 개인은 자유가 없어진다. 그렇게 가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소유권을 존중하면서 노동권을 같이 존중해야 한다. 한쪽은 자꾸 줄이고 한쪽은 키우면 어렵지 않겠나." (2022/10/13,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신영복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라고 한다면 확실하게 김일성주의자다.” (2022/10/12,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국당은 더 강력한 투쟁으로 문재인 대통령을 끌어내고 조국을 감옥으로 보내는 데 더 힘차게 나서주길 바란다." (2021/09/17,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며 열린 삭발식에서)

"지금이 일제시대도 아닌데 웬 '항일 죽창투쟁'을 선동하나. 지금 우리나라가 마땅히 친미, 친일을 해야지 친북, 친공을 해서 되겠나. 정권을 잡은 친북 주사파들이 김정은과 하나되고 트럼프와 아베는 물리치자고 한다. 이건 망하는 길이다. 지금은 '토착 왜구'를 물리칠 때가 아니라 '토착 빨갱이'를 몰아내야 할 때다." (2019/07/22, 페이스북에서 청와대와 여당의 일본 수출 규제를 비판하며)

"문재인 '촛불정부'인 줄 알았더니 '산불정부'네요. 촛불 좋아하더니 온 나라에 산불, 온 국민은 홧병." (2019/04/06, 강원도 산불 사태와 관련해 페이스북에)

"지금 누가 젊은이들에게 헬 조선을 말하고 절망을 가르치느냐. 세월호처럼 죽음의 굿판을 벌이고 있는 자들은 물러가라. 불평불만을 가르치고 선동하고 못사는 나라라고 자살을 부추기고 죽은 자들은 아름답다고 하고 산 자들은 욕되다라고 하는 더러운 역사를 끝내야 한다." (2018/05/31, 서울광장에서 열린 서울시장 출마 출정식에서)

"수성갑은 험지다. 때문에 이한구, 주호영 의원 등 대구지역 의원 12명이 저에게 수성갑 출마 요청을 한 것이다. 대구는 새누리당의 심장이다. 대구 정치 1번지 수성갑을 내주고서 새누리당의 정권 재창출은 어렵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둡다. 뭉치면 반드시 승리한다." (2016/01/05, 대구 수성구갑 출마와 관련해 페이스북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여러분 동문 아니냐. 박정희의 딸이라고 동문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나 같으면 당연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창피하냐." (2014/12/02, 서강대학교 강연에서)

“우리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나라를 지킨 이승만 대통령 동상 하나 세워야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주신 박정희 대통령 동상도 광화문에 세워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를 가장 위대하게 만든 사람을 욕하는 이런 역사 가지고 선진국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014/11/25, 새누리당 당원 대상 강연에서)

“우리 국민은 자신들이 직접 뽑고 싶어 한다.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나 같은 것으로, 대통령보다 국회의원들이 더 욕을 먹는 현실에서 의원들이 뽑는 총리나 장관을 국민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2014/10/22, 동국포럼2014 강연에서 개헌에 반대하며)

“대한민국 정치를 쇄신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 만일 대통령이 되면 과감하게 지방에 책임과 권한을 넘겨주겠다. 지방자치 없는 국민 행복은 없으며, 대통령의 행복도 없다.” (2014/03/26, 경기도지사 3선 도전 포기 이유를 설명하며)

“박 대통령보다 먼저 1994년 입당했고 한 번도 탈당을 하거나 해당 행위를 한 적이 없다. 내가 제일 고참인데 나보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람들은 건망증에 걸린 것 같다.” (2014/01/28, 기자간담회에서)

“지난 한 해가 매우 중요했는데 임기 초반 대통령이 내내 답답했다. 경제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귀중한 취임 초기 1년을 허송세월했다. 경제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세무조사가 계속됐고 과도한 복지적 요구 등으로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지난해 2.8% 성장했다는데 사실 기업이 투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2014/01/24, 경기도 내 기관장 모임 월례회에서)

“결식아동과 저소득층 아이들의 급식은 계속될 것이지만 빚을 내면서까지 모두에게 무상급식을 할 수는 없다. 부모님들의 깊은 이해와 적극적 협조를 당부드린다.” (2013/08/16, 무상급식 지원 중단을 선언하며)

“박 당선인은 통일신라 진성여왕 이래 1125년 만의 최고 여성 권력자다. 여성 대통령은 주변 4개 최강국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역사적 여성 대통령으로서, 세계가 주목하는 여성 대통령으로서 모든 분께 희망을 주는 대통령이 되길 바라고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능가하는 업적을 남겨주길 바란다.” (2012/12/26, 인터뷰에서)

“연쇄살인범이나 성폭행범 등 반인륜적인 범죄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자가 이미 60명인데 대통령부터 사형집행을 안 하고 있다.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사형집행을 미루는 게 누굴 위한 인권이냐. 형집행 효과가 있느냐며 자꾸 해괴한 궤변으로 말장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기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기에 극복 안 되는 소수의 병적 상태, 특이 상태인 자들에 대해서 다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2012/09/04, 경기도청 월례회의에서 반인륜적 흉악범죄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며)

“역사적 사실이니까 5.16 자체가 군사쿠데타냐 군사혁명이냐 크게 논란이 될 게 있겠느냐. 쿠데타나 혁명이나 둘 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당시 박정희 장군을 비롯한 본인들이 권력을 빼앗은 역사적 사건이다.” (2012/07/13, 라디오에서 5.16을 평가하며)

“우리나라의 국사는 잘못됐고, 우리나라와 북한의 국사는 여러 측면에서 다르다. 공무원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이 필요한 만큼 이를 위해 교육용 국사교과서 출간을 추진할 계획이다.” (2012/06/04, 경기북부청사 월례조회에서 공무원용 국사교과서를 출간하겠다고 밝히며)

김문수는 자금, 인력, 조직이 없다. 대세론도 없다. 나는 정치적 기교를 모른다. 김문수는 정치세력을 등에 업고 나온 것이 아니다. 오로지 뜨거운 가슴과 대한민국을 변화시키려는 맑은 신념만을 가지고 나섰다.” (2012/04/22, 대선 출마 의지를 밝히며)

“나는 도지사 김문수입니다. 여보세요. 이름이 누구요. 도지사가 누구냐고 묻는데 답을 안 해.” (2011/12/19, 남양주소방서에 긴급전화를 걸어)

“춘향전이 뭡니까. 변 사또가 춘향이 따먹으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2011/06/27, 한국표준협회 최고경영자 조찬회에서)

“심심하면 포격도발을 해오겠다고 위협하는 북한에 '까불면 죽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 (2011/03/08, 파주 임진각에서 군의 대응태세를 점검하며)

“국민에게 큰 불편을 끼치며 촛불집회에 나섰던 이들은 사과해야 한다. 데모하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사사건건 반대하면 안 된다.” (2010/05/30, 경기도지사 후보로서 성균관대 총학생회장단과 가진 간담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