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박원순 서울시장
박원순 서울시장

박원순은 1956년 3월 26일 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났다.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했으나 긴급조치 명령 9호 위반으로 제적당했다.

1979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고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구지검 검사를 거쳐 1983년 변호사로 개업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1995년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맡으면서 사회운동가로 전업했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상임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등 새로운 시민단체를 창립해 상임이사로 활동하며 시민운동 분야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2011년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퇴하자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안철수와 단일화에 성공하고 민주당 및 민주노동당 후보와 경선에서 승리해 무소속으로 범야권 단일 후보가 됐다. 2011년 10월 26일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꺾고 서울시장이 됐다.

2014년 6.4지방선거 서울시장 야권 후보로 출마해 정몽준 새누리당 후보에 이겨 재선에 성공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어떤 사건이든지 한번 맡게 되면 끝을 보는 성실한 성격 때문에 매우 좋은 평판을 얻었다.

포스코 사외이사 시절 검소하며 소탈한 모습 때문에 포스코가 오히려 의전에 어려움을 겪었다. 1년에 7번 열리는 이사회에 참여하는 다른 사외이사들은 차를 타고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입장했으나, 박원순은 지하철과 택시를 이용해 포스코까지 와서 걸어왔다. 회사는 본사 어느 입구로 올지 몰랐기 때문에 입구마다 박원순 변호사의 사진을 돌려 안내를 지시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박원순의 행색이 너무나 초라해 경비원이나 포스코 직원 누구도 그를 이사로 생각하지 않아 안내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서울시장 박원순에 대해 시민들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뉴타운 출구전략과 용산국제업무지구 등에서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2013년 노량진 배수지 수몰사고와 방화대교 진입로 붕괴사고 등 악재가 잇따랐지만 수습과정에서 기민하게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끊임없는 소통을 중시해 '시민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시장'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새누리당 김성태의원과 뉴데일리로부터 전임시장 오세훈이 하던 전시행정을 그대로 답습하고 인기위주의 정책들을 내놓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80년 6월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1982년 6월 사법연수원(제12기) 수료 후 검사직을 지망하여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1년 뒤 1983년 8월 검사를 그만 두고 서울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1986년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을 맡았으며, 같은 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전신인 ‘정의실천법조인회’에 조영래 변호사 등과 함께 참여했다. ‘권인숙성고문사건’, ‘보도지침사건’, ‘구로동맹파업사건’, ‘박종철고문치사사건’ 등 여러 시국사건 변론에 참여했다. 이후 1988년 결성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에서도 학술간사로 활동했다.

사학도로서 한국현대사 연구자들과 뜻을 모아 1986년 민간 학술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했고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한겨레신문사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91년 돌연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선진국들의 사례를 보려 했다.

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박원순은 시민운동가로 변신했다. 1994년 9월 10일 ‘참여연대’를 결성해 2002년까지 사무처장 및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법률지식을 활용한 ‘합법적’ 형태의 시민운동을 전개했다.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맑은사회만들기 운동, 재벌개혁을 위한 소액주주운동, 부패정치인 낙천낙선운동,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등을 이끌었다. 특히 ‘2000년 총선 부패정치 청산 시민연대’를 구성해 상임집행위원장 자격으로 부패 정치인 낙천•낙선 운동을 벌였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상가임대차보호법’ 등의 입법화에 기여했다. 국민연금 노령수당 반환소송을 승소로 이끌어 `생활 최저선'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참여연대가 확실히 자리잡자 2000년 1% 나눔운동을 위한 ‘아름다운 재단’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재단이 궤도에 오르자 2002년 중고 생활용품을 기증받아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아름다운 가게’를 설립해 상임이사를 맡았다.

2006년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희망제작소’를, 2009년 제3세계 가난한 농부들을 돕는 공정무역 커피회사 ‘아름다운 커피’를 각각 세웠다. 2004년부터 5년간 포스코 사외이사로 재직했으며 이외에도 풀무원홀딩스 사외이사, 웅진 비상임이사를 맡았다.

2011년 8월 26일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퇴해 보궐선거가 예정되자 박원순은 출마를 선언했다. 처음 5% 내외의 미미한 지지율로 출발했으나 출마를 고심하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부터 단일화 양보를 받아내며 단번에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10월 3일 민주당 박영선 의원, 민주노동당 최규엽 의원과 범야권 단일화 후보 선출 경선에서 승리했고 10월 26일 선거에서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 학력

경상남도 창녕에서 중학교까지 다녔고 서울에서 유학중이던 친형을 따라 상경해 1971년 서울의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74년 서울대학교에 지원해 낙방했으나 1년 뒤 재도전하여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1975년 5월 유신체제에 항거해 할복한 김상진 열사 추모식에 참여했다가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4개월간 투옥되었으며 서울대에서 제적당했다.

1979년 10‧26사건으로 유신체제가 종식되고 이듬해 각 대학의 제적생 복교조치에 따라 서울대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박원순은 1979년에 단국대학교 사학과로 입학해 1985년 2월 졸업했다.

1991년 8월 런던정경대 국제법과정(LSE)에서 1년간 수학해 디플로마를 취득했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에서 1년간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2005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방문교수 자격으로 한국 시민사회에 대해 강의했다.

◆ 가족관계

박원순은 경남 창녕의 가난한 농가에서 부친 박길보의 2남 5녀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969년 7월 당시 13살인 박원순은 일제강점기 사할린에서 실종된 작은할아버지의 양손으로 입양됐다.

1982년 강난희와 결혼해 슬하에 1남(박주신) 1녀(박다인)를 두었다. 부인 강난희는 1999년 인테리어회사 ’P&P디자인‘을 설립했다. 한 때 대기업의 일을 수주할 정도로 규모를 키웠으나 지금은 사세가 크게 위축돼 직원 7~8명 수준의 작은 회사로 운영되고 있다.

장남 박주신은 2011년 공군에 입대했으나 허리디스크로 4일 만에 귀가조치돼 그 해 4급 판정을 받았다. 이 때문에 ‘MRI 바꿔치기’, ‘대리 신검’ 등 병역의혹이 제기되었으나 2012년 2월 22일 공개신검을 통해 ‘4급 MRI기록’이 본인의 것임을 확인했다.

◆ 상훈

시민운동가로서 활동하는 동안 1998년 한국여성단체연합 제10회 올해의 여성운동상, 2002년 서울지방변호사회의 공익봉사상, 2003년 시민의 신문 올해의 상과 희망 이웃돕기 유공자 포상식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2006년 만해 한용운의 사상과 정신을 기리는 제10회 만해 대상 실천 부문에서,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부문에서 각각 수상했다. 2009년 불교인권위원회에서 주관하는 불교인권상을 받았다.

학술 분야에서 저술활동도 인정받아 2002년 제15회 심산상, 2007년 제21회 단재상을 수상하였다.

◆ 상훈

시민운동가로서 활동하는 동안 1998년 한국여성단체연합 제10회 올해의 여성운동상, 2002년 서울지방변호사회의 공익봉사상, 2003년 시민의 신문 올해의 상과 희망 이웃돕기 유공자 포상식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2006년 만해 한용운의 사상과 정신을 기리는 제10회 만해 대상 실천 부문에서,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부문에서 각각 수상했다. 2009년 불교인권위원회에서 주관하는 불교인권상을 받았다.

학술 분야에서 저술활동도 인정받아 2002년 제15회 심산상, 2007년 제21회 단재상을 수상하였다.

어록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고 시민운동에 뛰어들 결심을 할 수 있었다."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4개월간 투옥됐던 당시를 회고)

“'탐욕'이라는 열차에 올라탔으나… 열차에서 내리면서 세상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우선 물질에 대한 집착이 없어졌다.” (1991년 멘토 조영래 변호사의 죽음을 계기로, 성공한 변호사 생활을 접고 영국유학을 떠난 당시를 회고)

“국민이 국가의 잘못된 법 제정과 집행에 책임을 묻지 못한다면 국민의 기본권은 계속 침해당할 수밖에 없다.” (2000/4/30 택지소유상한법 위헌 판결이 나자, 입법기관인 국회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벌어진 사상 초유의 사태에 대해)

“평범한 시민의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모든 진리는 현장에 있다고 믿습니다.” “희망은 희망을 보고자 하는 이들에게만 보인다는 겁니다.” (2006/11/14 주간경향과 인터뷰에서 희망제작소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하며)

“몇 마디 저한테 물어보고 그 다음에 너무 갑자기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저는 양보하겠습니다라고 얘기해서 저도 사실 놀랐죠.” “아무리 신뢰관계가 있다 해도 저보다 10배나 더 되는 지지도를 갖고 있던 분이 정말 아무 조건 없이 ‘더 잘 할 수 있다’고 하는 (내 말) 한마디로 양보한다는 게 사실 또 믿기 어려운 그런 일이다.” “안 교수가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의 공공적 이익을 위해서 해왔던 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태도였다고 본다.” (2011/9/7 안철수 원장의 서울시장 단일화 양보 다음날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인터뷰에서)

“드디어 새로운 서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2011/10/3 범 야권 단일화 후보 선출 경선에서 승리한 직후)

“시민은 권력을 이기고, 투표가 낡은 시대를 이겼습니다. 상식과 원칙이 이겼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선택한 것입니다.” (2011/10/27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후 발표한 당선사례에서)

"그분들(강용석과 동조세력)이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해 상식적 사회를 만들어 볼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겠다." (2012/2/23 시청 브리핑실 기자회견장에서 아들 박주신의 ‘MRI 바꿔치기 의혹’을 제기했던 강용석 등에 대해)

◆ 평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어떤 사건이든지 한번 맡게 되면 끝을 보는 성실한 성격 때문에 매우 좋은 평판을 얻었다.

포스코 사외이사 시절 검소하며 소탈한 모습 때문에 포스코가 오히려 의전에 어려움을 겪었다. 1년에 7번 열리는 이사회에 참여하는 다른 사외이사들은 차를 타고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입장했으나, 박원순은 지하철과 택시를 이용해 포스코까지 와서 걸어왔다. 회사는 본사 어느 입구로 올지 몰랐기 때문에 입구마다 박원순 변호사의 사진을 돌려 안내를 지시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박원순의 행색이 너무나 초라해 경비원이나 포스코 직원 누구도 그를 이사로 생각하지 않아 안내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서울시장 박원순에 대해 시민들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뉴타운 출구전략과 용산국제업무지구 등에서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2013년 노량진 배수지 수몰사고와 방화대교 진입로 붕괴사고 등 악재가 잇따랐지만 수습과정에서 기민하게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끊임없는 소통을 중시해 '시민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시장'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새누리당 김성태의원과 뉴데일리로부터 전임시장 오세훈이 하던 전시행정을 그대로 답습하고 인기위주의 정책들을 내놓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 기타

1978년 8월부터 8개월간 고향에서 보충역으로 복무해 병역의무를 마쳤다.

1979년 장충식 당시 단국대 총장이 신원보증을 서 줘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데모로 복역한 학생을 받아주는 대학은 없었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장충식 총장은 박원순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

투옥된 경력이 있음에도 운좋게 검사로 임용됐지만 6개월 만에 사표를 썼고, 6개월 뒤 검찰을 떠났다. 그는 '사람 잡아넣는 일'이 체질에 맞지 않은 데다 폭탄주 등 강압적 조직문화에 거부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박원순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멘토는 사법연수원 12기 동기였던 조영래 변호사다. 박원순 변호사는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권인숙 성고문 사건’을 비롯한 여러 시국사건 변론에 나서면서 인권변호사의 첫 발을 내디뎠다. 이를 계기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박원순을 시민운동가의 길로 인도한 것도 조영래 변호사였다. 1990년 12월 조영래 변호사는 임종 직전 “박 변호사,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이제 좀 눈을 돌려봐”라고 박원순에게 조언을 건넸다. 박원순은 다음해 8월 집을 팔아 역사문제연구소에 기부하고 영국유학을 떠났다. 이후 그는 성공한 변호사로서 삶을 버리고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한편 `돈 되는 사건'도 맡아 "돈을 꽤 잘 벌었다"고 한다.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 재정적으로 큰 기여를 했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선거에서 선거자금이 부족했던 박원순은 2010년 6•2 지방선거 당시 국민참여당 대표 유시민이 경기지사 후보로 나서면서 활용했던 ‘유시민 펀드’를 모방해 '박원순 펀드'를 발행했다. '박원순 펀드’는 모금 하루 만에 목표액인 33억 원을 넘기며 52시간 만에 조기마감되었다. 모금된 펀드는 선거자금으로 쓰고 12월 25일 이전에 원금과 이자(연리 3.58%)를 투자자들에게 돌려줬다. 최종 입금액은 38억8500만원이며 입금에 참여한 시민들은 모두 5778명이었다. 1인당 평균 67만 원을 낸 셈이며, 시간 당 모금액은 6300여 만원이었다.

박원순 저격수 강용석 전 의원과 경기고-서울대 법대 선후배 사이로 수년간 참여연대에서 함께 일했다. 강 의원은 1998~2003년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의 집행위원을 지냈다.

강용석 전 의원과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러나 강 전 의원의 장인 윤재기 전 국회의원과 막역한 사이다. 윤재기 전 의원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검사 출신으로 ‘아름다운가게’를 후원하는 등 30년 넘게 박원순 시장과 친분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강용석 고소사건 이후 강용석과 장인 윤재기의 사이가 나빠졌다. 강용석 전 의원 참여연대 활동을 시작한 것도 장인 윤재기의 권유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