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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이인영 통일부 장관

겸손해야 한다 좌우명, 원칙에 충실한 소신파 [2020년]
이상호 기자 sangho@businesspost.co.kr 2020-09-01 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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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이인영 통일부 장관
▲ 이인영 통일부 장관.

이인영은 통일부 장관이다.

2020년 6월 이후 소강상태를 보이는 남북관계 개선에 공을 들이고 있다.

1964년 6월28일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출신으로서 재학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맡았다.

학생운동 단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초대 의장으로 민주화 항쟁 전면에 섰다.

새천년민주당 창립에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원의 계파로 분류된다.

21대 총선에서 서울 구로구갑에 출마해 당선된 4선 의원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재야의 원칙주의자'라는 평을 들었고 원내대표를 지냈다.

의정활동을 하며 노동과 통일에 관련된 정책 행보가 특히 부각돼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경영활동의 공과


△북한과 대화 물꼬 트기 위해 '작은 교역' 추진
이인영은 통일부 장관에 취임한 뒤부터 북한과 교류를 복원하는 데 공을 들였다.

대북제재라는 틀 안에서 북한과 교류를 추진하려면 한국 정부의 운신에도 한계가 있어 '할 수 있는 것'부터 추진해 보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이인영은 북한과 교류를 재개하기 위해 금강산과 백두산의 물, 대동강의 술을 남측의 쌀이나 약품 등 대북제재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로 물물교환하는 ‘작은 교역’을 추진했다..

작은 교역으로 시작해 점차 규모를 늘려 남북관계의 돌파구로 마련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물물교환 계약을 타진한 북한측 기업 ‘개성고려인삼회사’가 유엔 제재대상인 노동당 39호실 산하기관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한 차례 논란이 일었다.

이인영은 2020년 8월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서 제재대상 기업 여부를 인지하고 있었는지, 제재대상 기업임에도 거래를 추진하려 했던 것인지 등 지적을 놓고 "승인을 신청한 지 좀 됐는데도 여태 승인하지 않았으면 이유가 있지 않겠나"라며 "그것(대북제재)을 무시하고 추진할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통일부는 개성고려인삼회사를 제외하고 계속해서 작은 교역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Who Is ?] 이인영 통일부 장관
▲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2020년 7월29일 정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통일부 장관 임명
2020년 6월 들어 북한이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등 남북관계가 악화되자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물러났고 이인영은 유력한 후임 통일부 장관으로 거론됐다.

이인영은 2020년 7월3일 예상대로 통일부 장관에 지명됐다.

통일부 장관에 지명된 뒤 소감을 묻는 말에 “평화로 가는 오작교를 다시 만들 수는 없어도 노둣돌 하나만은 착실히 놓겠다는 마음으로 임하겠다”며 “8천만 겨레와 함께 다시 평화의 꿈과 통일의 꿈을 만들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후 인사청문회를 거쳐 2020년 7월24일 인사청문경과보고서가 채택됐다.

이인영의 통일부 장관 임기는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안을 재가한 7월27일부터 시작됐다.

△21대 총선에서 4선 도전에 성공
이인영은 2020년 4월 21대 총선에서 4선 도전에 성공했다.

서울 구로구갑에 출마해 김재식 미래통합당 후보를 상대로 53.9%의 득표율로 승리를 거뒀다.

이인영은 총선 다음날인 4월16일 "총선 결과는 국난을 이기고 국민의 삶을 지키라는 서릿발 같은 국민의 명령이었다"며 "선거가 끝난 오늘부터 경제와 일자리를 최우선으로 삼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4+1협의체 등으로 돌파해 성과 내고 원내대표 임기 마쳐
이인영은 2019년에 원내대표가 된 뒤 국회 정상화를 시도했으나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했다.

자유한국당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된 선거제 개편안과 사법개편안 등의 철회를 계속해서 요구했으며 황교안 대표는 삭발, 단식 등을 포함한 장외투쟁을 이어갔다.

결국 이인영은 자유한국당과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바른미래당, 정의당, 민주평화당, 대안신당 등과 ‘4+1 협의체’를 구성해 2019년 12월에 선거법 개정안, 공수처 설치법안 등을 처리했다.

이인영은 당시 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에 대응해 임시국회 회기를 짧게 쪼개는 ‘살라미 임시국회’를 열었다.

2020년 1월에는 정세균 국무총리 임명 동의안, 유치원3법 등 처리를 이끌었다.

이인영은 2020년 4월 21대 총선에서 4선 도전에 성공한 뒤 같은 해 5월에 원내대표 임기를 마쳤다.

5월6일 원내대표로서 마지막으로 참석한 최고위원회의에서 임기를 마치는 소감을 놓고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홀가분하게 떠나지만 코로나19 국난이 지속되고 있어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며 "20대 국회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많이 남겨놓고 마무리하게 된 것 같은데 4.3특별법을 비롯해 관련 과거사법들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쉽다"고 말했다.

△민주당 4기 원내대표, 국회 정상화에 힘써
2019년 5월8일 시행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해 결선투표에서 76표를 얻으면서 과반을 넘겨 제4기 원내대표로 당선됐다.

이인영은 당선소감에서 “내 신념과 가치보다 우리 모두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실용과 중도를 저들에게 내주지 않고 우리 것으로 만들어 보이겠다”며 “자유한국당이 극우로 갈 때 신속하게 중원을 장악하고 총선에서 승리하겠다”고 밝혔다.

당선되자마자 국회가 공전 중인 점을 고려해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방문했다. 2019년 5월9일 상견례에서 나 원내대표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되겠다”고 하자 이인영이 “밥을 잘 사주겠다고 하니 나는 밥도 잘 먹고 말도 잘 듣겠다”고 화답했다.

이인영은 나경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야당 원내대표들과 수시로 만나면서 국회 정상화에 힘썼다. 2019년 5월20일에는 국회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나 원내대표와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와 만나 맥주잔을 기울이며 국회 정상화의 해법을 찾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개헌 논의 이끌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남한과 북한이 평화구도로 들어가야 한다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내놓았다. 2017년 12월 남북 주민의 연락을 활성화하는 남북교류협력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고 특사 파견이나 남북 정상회담을 구체적 방법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2017년 1월 개헌을 논의하기 위한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가 문을 열자 민주당 간사를 맡았다. 그 뒤 정부 형태를 논의하는 개헌특위 2소위의 위원장에 올랐다. 2018년 6월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를 같이 시행하자는 주장을 밀었지만 자유한국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2018년 1월에 신설된 국회 ‘헌법 개정 및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의 민주당 간사를 맡았다. 이인영은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3월 공개한 정부 개헌안을 민주당의 개헌안으로 확정한 뒤 야당 정치개혁특별위 의원들과 개헌 논의를 이어갔다.

그러나 정치개혁특별위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6월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의 동시 시행에 필요한 국민투표법 처리기한으로 제시한 2018년 4월23일까지 개헌 합의를 이끌지 못했다. 이인영은 정치개혁특별위 간사에서 사임하면서 한국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내놓았던 정부의 개헌안도 2018년 5월24일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면서 개헌 논의도 가라앉았다.

2018년 8월에 열린 더불어민주당 경선에서 당대표에 다시 도전했지만 이해찬·송영길·김진표 의원에 밀려 예비경선(컷오프)을 넘지 못했다.

2018년 10월 신설된 국회 비상설 특별위원회인 남북경제협력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올랐다. 10월30일 첫 회의에서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가장 높아지고 있는 만큼 여야가 지혜를 초당적으로 모아 실질적 해법을 능동적으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20대 총선에서 대선까지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서울 구로구갑에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나와 득표율 52.02%를 얻으면서 김승제 새누리당 후보(33.93%)를 제치고 3선에 성공했다.

20대 국회에서도 노동정책 마련에 힘써 ‘직장 내 왕따’를 막기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과 서비스업 종사자도 작업중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등을 대표발의했다.

19대 국회에서 대표발의했던 ‘생명안전업무 종사자의 직접고용 등에 관한 법률안’과 최저임금을 통상임금의 50% 이상으로 결정하는 최저임금법 개정안 등을 다시 발의하기도 했다.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 소속돼 있던 2016년 9월 북한이 5차 핵실험을 시행하자 “정부가 제재와 압박 일변도의 정책에 안주해 관성적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적대적 공존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시도를 해봤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2016년 하반기에 들어 국정농단사건이 본격적으로 불거지자 다른 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성명과 기자회견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조속한 퇴진을 촉구했다. 국회에서 박 대통령의 탄핵이 의결되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체제로 전환된 뒤에는 주한미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미뤄야 한다고 요구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에서 국가재정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제18대 대선과 19대 국회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서울 구로구갑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해 이범래 새누리당 후보(45.44%)와 경쟁한 끝에 득표율 52.22%로 당선되면서 국회의원에 재선됐다.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의 경선 과정에서 이인영을 비롯한 민주평화국민연대 인사들은 공식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안철수 무소속 대선후보와 민주당 후보의 연대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인사로도 꼽혔다.

다만 2012년 9월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문재인 후보로 확정되자 이인영은 대선기획단 기획위원을 맡아 선거운동을 도왔다. 2012년 10월 선거캠프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임명된 뒤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 협상에서 문재인 후보측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다.

제18대 대선 패배 이후 김한길 민주통합당 대표가 추진한 중도화 노선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4년 3월 민주통합당과 안철수 후보의 새정치연합이 합당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창당하게 됐을 때 6.15선언과 10.4선언을 정강에서 빼자는 주장에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19대 국회에서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공공기관 개편 등에 목소리를 냈다. 그 뒤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통상임금의 50% 이상을 최저임금으로 결정하는 내용의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2015년 2월에 진행된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경선에 도전해 본선에 올랐지만 당선자인 문재인 의원과 2위 박지원 의원에게 밀려 득표율 3위로 낙선했다.

2016년 1월 박근혜 정부가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등의 노동제도 개편을 추진하는 데 한국노총이 반발하면서 2015년 9월15일 체결한 노사정 합의를 파기했다. 이인영은 보도자료를 통해 “정부와 새누리당의 ‘노동개악’ 처리 과욕이 예상했던 파국을 불러왔다”고 비판했다. 그 뒤에도 정부의 노동정책을 비판하면서 대립각을 세웠다.

이인영은 19대 국회 회기 안에 환경노동위원회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구제하는 법안을 의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새누리당과 의견이 엇갈리면서 결국 무산됐다.

△제18대 총선에서 낙선 이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파란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서울 구로구갑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나와 이범래 한나라당 후보와 다시 맞붙었지만, 득표율 45.4%로 이범래 후보(46.48%)에게 밀려 낙선했다.

총선에서 쓴잔을 마신 뒤 정치 지망생들이 참여하는 ‘정치아카데미’를 열어 보수주의와 공화주의 등을 놓고 전문가들과 토론했다. 스페인으로 떠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2011년 ‘산티아고 일기-사람의 길’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인영은 2010년 7월28일 재보궐선거 당시 고향인 충청북도 충주에 출마해 달라는 민주당 지도부의 요청을 두 차례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2010년 10월 민주당 전당대회에 당대표 및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현직의원이 아니고 조직력도 비교적 부족하다고 평가됐다. 같은 ‘86세대’인 백원우·최재성 후보와 단일화를 약속했지만 백원우 후보의 중도사퇴에도 불구하고 단일화에 실패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다만 이인영은 단일화 실패를 딛고 경선에서 득표율 11.59%로 최종 4위를 차지하면서 민주당 최고위원에 올라 이변을 일으켰다.

2010년 10월 민주당에서 결성된 4대강대운하 저지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비정규직특별위원장도 지냈다. 2011년 7월에 출범한 야권통합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최종적으로 민주통합당 출범에 기여했다.

2011년 4월27일 재보궐선거 당시 야권연대를 주도해 민주당의 경기도 분당을 승리 등을 뒷받침했다. 당시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와 설전을 벌여 주목을 받았다.

2011년 10월26일 시행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처음에는 박영선 민주당 후보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무소속인 박원순 후보로 야권 후보가 단일화되자 이인영은 박원순 후보의 상임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당선에 기여했다.

2012년 2월 민주통합당 대표·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해 ‘젊은 대표’ 이미지를 앞세워 세대교체론과 탈계파론을 주장했다. 최종 결과 5위로 한명숙 대표에게 밀렸지만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국회 첫 입성, 진보 성향 초선 의원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서울 구로구갑에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출마해 득표율 44.72%로 이범래 한나라당 후보(32.69%)를 제치고 당선했다.

의원이 된 뒤 국가보안법 폐지를 적극 주장했다. 2004년 당시 이라크에 파병한 자이툰부대의 주둔 연장에 반대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한나라당 주도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 민주노동당 등이 참여하는 ‘개혁 연정’을 주장하면서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17대 국회 당시 열린우리당의 ‘재야파’ 또는 ‘김근태계’로 평가됐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원이 2006년 1월 전당대회에 출마했을 때 이인영이 핵심참모로 꼽히기도 했다.

2006년 한국과 미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을 때 헌법재판소에 위헌 심판을 청구했던 여야 의원 23명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2007년 열린우리당의 내부 갈등이 커질 때 김근태 의원과 천정배 의원이 진보 성향의 신당 창당을 추진할 때 이인영도 적극 참여했다. 이에 따라 2007년 6월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했다.

△정계 입문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의 창립에 참여하면서 정치권에 입문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권에 수혈한 ‘젊은 피’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서울 구로갑에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을 받아 출마했다. 당시 김기배 한나라당 후보과 치열한 득표경쟁 끝에 1804표 차이로 석패했다.

당시 득표율을 살펴보면 김기배 후보 49.07%, 이인영은 47.02%다. 정계에 갓 들어온 정치신인이 3선 의원 출신인 김기배 후보와 치열하게 맞붙으면서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그 뒤 새천년민주당의 원외 지역정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03년 민주당 원내외위원장들과 함께 ‘남북경협 지속발전을 위한 범국민 운동’을 제안하는 등 통일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전대협 초대 의장 출신 민주화운동가
1984년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한 뒤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1987년 3월에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돼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고려대학교 서창캠퍼스에서 ‘혈서 유세’를 펼쳐 주목받기도 했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당시 합법·대중적으로 운동을 진행해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5월에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를 결성해 의장을 맡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한열 열사가 1987년 7월5일 사망한 뒤 장례식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전국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국 대학생조직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1987년 8월19일 창립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첫 의장을 맡았다. 그 뒤에는 10여 년 동안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등의 재야단체에서 시민운동을 했다.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Who Is ?] 이인영 통일부 장관
▲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2020년 8월1일 '2020 통일걷기' 행사에 참가해 강원도 양양군 38선 휴게소를 출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인영은 2020년 6월 이후 소강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중단된 남북 사이 대화부터 복원시켜야 한다.

이인영은 2020년 8월19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어떤 상황에도 남북 사이 대화는 계속돼야 한다”며 대화 의지를 내보이기도 했다.

이인영은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취임 직후부터 금강산과 백두산의 물, 대동강의 술을 남측의 쌀이나 약품 등 대북제재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로 교환하는 ‘작은 교역’을 시도했다.

하지만 물물교환 계약을 협의해 온 북한측 기업인 ‘개성고려인삼회사’가 유엔 제재 대상인 노동당 39호실 산하기관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인영은 첫 시도부터 제동이 걸리자 2020년 8월22일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최근 제 마음도 많이 급하고 답답하다”고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이인영은 정부 내에서 통일부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역할도 맡았다.

통일부는 1990년에 장관이 부총리로 격상됐을 정도로 위상이 높았고 1998년에 장관급으로 낮아진 뒤에서도 통일부 장관 자리는 주요 정치인들이 선호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이후 통일부의 위상이 크게 낮아졌다. 정권의 대북정책 기조와 남북관계의 부침, 국제정세의 변화에 점차 청와대 국가안보실 등에 주도권을 잃어갔다.

통일부는 2020년 6월 들어 남북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까지 받았다.

당시 김연철 전 장관은 퇴임사에서 “통일부가 권한에 비해 짊어져야 하는 짐이 너무나 무거웠다”고 말하기도 했다.

통일부에서는 민주당 원내대표까지 지낸 유력 정치인인 이인영이 김 전 장관의 후임으로 지명되자 기관 위상을 높여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인영은 통일부 장관에 임명된 다음날인 7월28일 실국장회의를 열고 “남북관계의 공식적이고 대중적 영역에서 통일부가 중심이 되는 위상과 역할을 분명히 확립할 것”이라며 “소극적 의지나 보조적 태도에서 탈피해 달라”고 말했다.

◆ 평가
[Who Is ?] 이인영 통일부 장관
▲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2020년 8월7일 경기도 연천군 군남댐을 방문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좌우명처럼 쓰고 있다. 정치인으로서는 신영복 전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에게 받은 ‘국민이 가라는 길을 가겠습니다’를 좌우명으로 잡았다.

어렸을 때는 비교적 내성적이었다고 회상하지만 성남초등학교 시절 어린이회장을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점심시간에 독서반에서 활동하면서 삼국지와 초한지 등을 읽었다.

학창시절에 청소년적십자(RCY) 모임 활동도 오랫동안 했다. 당시 모임에서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과 현재도 계속 교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아버지와 같은 초등학교 교사나 교수가 될 것을 희망했지만 현실에 눈을 뜨면서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용납되지 않는 문제를 보면 어떻게든 해결하려 애쓰는 성격으로 평가된다.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인영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첫 의장을 맡았다. 당시 전대협 부의장은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전대협 3기 의장인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도 친분이 있다.

민주당의 ‘586(50대, 1980년대 학번, 1960년대 출생)’ 운동권 그룹을 대표하는 인사로 꼽힌다.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원과 각별한 사이라 ‘김근태계’로 분류되고 있다. GT의 분신이라는 말도 듣는다.

1988년 김성환 현 서울 노원구청장이 인재근 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통해 김근태 전 의원을 이인영에게 소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때부터 김 전 의원을 ‘정치적 스승’처럼 모시게 됐다.

김근태 전 의원의 권유에 따라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게 됐다. 당시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송영길·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함께 참여했다.

1999년 월간지 ‘말’의 별책부록 ‘21세기 한국의 희망 386 리더’에서 우상호 민주당 의원과 이인영의 관계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욱 가깝게 지냈다’고 표현됐다.

김근태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가족과 함께 임종을 지켰다. 김 전 의원의 장례식에서 맏상제 역할을 맡았다.

김근태계 인사들이 주로 몸담은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를 지지 기반으로 삼고 있다. 민주당 진보성향 의원들의 정치행동·정치의견 모임인 ‘더좋은미래’의 지지도 받고 있다.

2011년에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야권연대에 적극 참여하는 과정에서 당시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측근으로 평가된 적도 있다.

좋아하는 노래는 ‘그날이 오면’이다. 2008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도중 밤길을 혼자 걸으면서 ‘그날이 오면’을 불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친문재인’계로 꼽히진 않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18대 대선에 출마했을 때 선거대책위원회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친문재인계 인사인 전해철 민주당 의원과도 가까운 사이로 알려졌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엘리트 학생운동가 출신으로서 타협보다는 원칙에 충실하고 자기 주관이 강한 사람으로 꼽혔다. ‘강성 원리주의자’라는 부정적 평가도 나온다.

다만 민주당 안에서는 비교적 중립적 행보를 보여 다른 계파로부터 거부를 덜 받는 인사로도 꼽히고 있다.

2015년 1월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인영을 도전정신과 역동성을 갖춘 인사로 꼽았다.

취미는 등산이다. 20대 국회의원들의 바둑 동호회인 ‘국회기우회’ 회원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꾼 태몽은 목화가 소담하게 피는 내용이었다고 전해진다.

2019년 5월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을 앞두고 경제 전문가로 꼽히는 최운열·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시각을 배우는 등 유연성을 강조하는 행보를 보였다.

당대표 경선에 주로 출마하다가 원내대표 경선에 나서게 된 이유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2019년 1월 당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무덤에 있어야 할 ‘386세대’의 운동권 철학이 21세기 대한민국의 국정을 좌우하고 있다”고 주장한 데 모욕감을 느꼈다는 점을 들었다.

2008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스스로를 성찰한 내용을 담아 2011년 ‘산티아고 일기’를 펴냈다.

2011년 ‘진보 보수 마주보기’에서 김재원 한나라당 법률지원단장과 함께 여러 사회현안에 관련해 진보와 보수 양쪽의 관점에서 논의를 나눴다.

2017년 8월3일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를 출발해 8월15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 도착하는 민통선 횡단을 다른 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릴레이로 진행한 경험을 ‘2017년 통일 걷기, 민통선을 걷다’로 펴냈다.

종교는 개신교다. 서울 고척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정보통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쓴 논문 제목은 '대통령선거에서 인터넷의 정치커뮤니케이션 특성에 관한 연구 : 16대와 17대 대통령선거를 중심으로'다.

사건사고
[Who Is ?] 이인영 통일부 장관
▲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2020년 7월23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선서문을 송영길 위원장에게 전달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통일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통합당의 공세
이인영은 2020년 7월 통일부 장관 인사청문회를 거치는 과정에서 아들의 스위스 유학비용과 관련된 논란에 맞닥뜨렸다.

통합당에서는 이인영이 아들의 병역문제를 비롯해 스위스 유학자금 출처등 과 관련된 인사청문회 자료제청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일부 언론 등에서는 이인용의 아들이 스위스 바젤 디자인학교에 유학하면서 학비만 연 2만5천 달러를 지출하는 등 호화 유학생활을 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통일부는 7월15일 통합당 등의 공세에 "해당 학교의 인터넷 홈페이지만 확인해도 학비가 연 2만5천 달러가 아니라 연 1만 스위스 프랑, 당시 한화로 약 1200만 원임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며 "악의적 왜곡 보도에 유감을 표한다"고 반박했다.

7월16일에는 "(이인영 아들의)14개월 동안 월세 등 체류비는 모두 3천62만 원"이라는 해명을 내놓기도 했다.

이인영 아들의 병역문제와 관련해 카트레이싱을 즐기는 등 척추질환으로 군면제를 받았음에도 신체활동에 지장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는 지적도 나왔다.

통일부는 "이인영 아들의 척추질환은 일상생활이 가능하며 적당한 운동은 권장되는 병"이라며 "카트는 일반인 누구나 면허 없이 탈 수 있으며 논란이 된 영상은 이인영 아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동영상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연출된 장면"이라고 해명했다.

이인영은 인사청문회에서 태영호 통합당 의원으로부터 '사상전향' 관련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태 의원은 청문회에서 “많은 사람이 저에게 사상전향 했느냐고 물어보는데 저는 첫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며 "후보자도 언제 ‘주체사상 신봉자 아니다’라고 공개선언 같은 것 한 적 있나"라고 물었다.

이인영은 "저는 태 의원처럼 남에서 북으로 가거나 북에서 남으로 온 게 아니지 않나"라며 "그런 저에게 사상전향을 역으로 묻는 건 아무리 청문위원이라도 온당하지 않고 아직 남쪽 민주주의와 관련된 이해도가 떨어지는 거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다"고 응수했다.

△김수현과 '관료 말 안 들어' 논란
이인영이 2019년 5월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당정청 을지로 민생현안회의가 시작되기 전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했던 이야기가 논란에 올랐다. 당시 두 사람은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사담을 나눴다.

당시 이인영이 "정부 관료가 말을 덜 듣는 것은 내가 다 해야..."라고 말하자 김수현 실장은 "정부가 (출범) 2주년이 아니라 4주년 같다"고 대답하면서 구체적 사례로 버스 파업사태를 들기도 했다. 이때 이인영은 "단적으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1개월 없는 사이에 자기들끼리 이상한 짓을 많이 했다"며 "잠깐만 틈을 주면 엉뚱한 짓을 한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 노동조합은 버스 파업사태의 책임이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에 있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등에서도 '레임덕'을 고백한 것과 다름없다며 공세를 펼쳤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이인영과 김수현 실장의 대화내용이 사실에 맞지 않다고 본다면서 진화에 나섰다. 김현미 장관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나는 당신들을 믿는다"며 국토부를 추슬렀다.

△‘586 세대’ 놓고 이동학과 공개 논쟁
이인영은 ‘586 세대(50대, 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이 때문에 2015년 7월15일 이동학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586 세대를 비판하는 글인 ‘586 전상서’에서도 이인영을 직접적으로 겨냥했다.

당시 이동학 혁신위원은 586세대가 후배그룹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고 우리 사회의 새로운 의제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인영에게 다음 총선에서 약세지역에 출마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인영은 2015년 7월1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지역구를 바꿔도 혁신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면서 불편한 심정을 나타냈다. 이동학 혁신위원에게 혁신위원회의 방향을 노동문제와 같은 가치 추구로 바꿔야 한다고 응수하기도 했다.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의 고발
2012년 12월16일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와 선대본부장을 맡은 이인영을 서울 남부지방검찰청과 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했다.

문재인 후보측이 12월15일 서울 광화문 유세에서 불법 행사용 소품을 무차별적으로 나눠줬다는 혐의를 주장했다.

△이보은씨 공안기록 조회 논란
2009년 10월 당시 최규식 민주당 의원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검찰과 경찰이 2008년 6월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이인영의 부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인영의 공안기록도 조회했다.

당시 이인영의 부인 이보은씨는 미국산 쇠고기의 고시 철회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열었던 여성 환경단체의 간부로서 검거됐다.

경찰은 이보은씨의 신상을 ‘시위사범 전산입력 카드’에 기록하는 과정에서 이인영과 아버지인 이해학 목사 등의 공안사범 처벌 기록을 함께 조회한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최규식 의원은 “헌법이 금지한 ‘연좌제’에 해당되는 위헌이자 반인권적 행태”라며 “경찰은 책임자를 문책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체포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가 사망하자 2월7일 국민추도대회와 3월3일 평화대행진 등에 적극 참여했다. 그해 5월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87년 5월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창립에 참여했다가 그해 6월1일 구속됐다. 민주화 항쟁 시위가 크게 열렸던 그해 6월10일에는 구치소로 향하는 호송차 안에 있었다. 6월17일에 구속이 취소되면서 감옥에서 풀려났다.

1987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뒤에 집회시위법과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한 차례 더 구속돼 1988년 6월30일 징역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형을 받았다가 1988년 12월21일 특별사면됐다.

경력/학력/가족
◆ 경력
[Who Is ?] 이인영 통일부 장관
▲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2020년 8월1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장관 집무실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와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87년 제20대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됐다. 그 뒤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1987년 제1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1988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간사를 맡았다.

1993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동우회의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97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조직국장을 지냈다.

1999년 한국청년연합회(KYC) 지도위원을 맡았다.

1999년 새천년민주당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청년위원장을 맡았다.

2002년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중앙선거대책위원회에서 인터넷선거특별본부 기획위원장을 지냈다.

2003년 한반도재단 동북아전략연구소에서 소장으로 일했다.

2004년 5월 제17대 총선에서 서울 구로구갑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2010년 10월부터 2011년까지 민주당 최고위원을 맡았다.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상임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2012년 1월부터 2012년 5월까지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2012년 5월 제19대 총선에서 서울 구로구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2012년에 제18대 대선에 출마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2016년 5월 제20대 총선에서 서울 구로구갑에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2018년 10월부터 제20대 국회 남북경제협력 특별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재임했다.

2019년 5월부터 2020년 5월까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맡았다.

2020년 4월 제21대 총선에서 서울 구로구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2020년 7월 통일부 장관이 됐다.

◆ 학력

충청북도 충주에서 성남초등학교과 충주중학교를 나왔다.

1983년 충청북도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년 재수해 1984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88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9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정보통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성공회대학교 ‘희망의 인문학과정’ 1기를 수료했다.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같은 기수다.

◆ 가족관계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1988년에 별세했다. 2남2녀 가운데 막내다.

장인은 경기도 성남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해학 성남주민교회 목사다. 이해학 목사의 어머니인 한맹순 권사도 여러 민주화 집회에 참여했고 ‘맹순할매 억척 기도일기’를 펴냈다.

아내 이보은씨와 사이에서 아들 이규찬씨를 뒀다. 이보은씨는 농부들이 직거래로 다품종 소량생산 농작물을 판매하는 농부시장 '마르쉐'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 상훈

2003년 제1회 박종철인권상을 받았다.

2007년 제9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백봉신사상을 받았다.

◆ 기타

2020년 7월 통일부 장관 인사청문회를 위해 국회에 제출한 재산신고 내역에 따르면 본인과 배우자, 모친, 아들 명의로 모두 10억758만 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부동산은 배우자 명의로 시가 2억3100만 원의 서울 구로구 아파트, 모친 명의로 시가 9100만 원의 충북 충주시 아파트 등이다.

예금은 본인 명의 1억8872만 원, 배우자 명의 4억884만 원 등이다.

그밖에 본인 명의로 서울 구로구 사무실 전세권 3천만 원, 1580cc 니로 하이브리드 승용차 1981만 원, 아들 명의 채무 3천만 원 등도 신고했다.

이인영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구속돼 옥살이를 했다. 이 때문에 수형으로 병역이 면제됐다.

아들은 척추측만병증으로 2016년 5급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아 현역 복무가 면제됐다.

‘나의 꿈 나의 노래’(2007), ‘산티아고 일기-사람의 길’(2011), ‘진보 보수 마주보기-젊은 한국을 위한 뉴코리아 플랜’(2011), ‘2017 통일 걷기, 민통선을 걷다-12박13일의 기록’(2017) 등 저서 4권을 썼다.

어록
[Who Is ?] 이인영 통일부 장관
▲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2020년 8월1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북한 개별관광 허용 등 남북교류 재개를 위한 시간' 토론회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국 정부는 남한과 북한, 미국 사이 대화를 지지했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중국의 건설적 역할과 협력 의지를 강조해 왔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중국 정부의 노력을 높게 평가하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협력해 주기를 기대한다. 어떤 상황에도 남북 사이 대화는 계속돼야 한다. 우리 정부는 대화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2020/08/19, 정부서울청사 장관 집무실에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를 만나)

“한미 워킹그룹은 그 운영과 기능을 재조정·재편하면서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정책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역할을 명확히 지향해나가야 한다. 워킹그룹이 남북관계를 제약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일각의 우려를 불식할 수 있을 것이다. 한미워킹그룹 2.0시대를 함께 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20/08/18, 정부서울청사 장관 집무실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경색된 남북관계를 푸는 데 도움이 된다면 백번이라도 주저하지 않겠다.” (2020/07/23, 국회에서 열린 통일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이태규 국민의당 의원이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특사로 평양을 방문할 의사가 있느냐”고 묻는데 대답하며)

“평화로 가는 오작교를 다시 만들 수는 없어도 노둣돌 하나만은 착실히 놓겠다는 마음으로 임하겠다. 8천만 겨레와 함께 다시 평화의 꿈과 통일의 꿈을 만들고 싶다.” (2020/07/03, 통일부 장관으로 지명된 뒤 소감을 밝히며)

“20대 국회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많이 남겨 놓은 것 같아 아쉽다. 제주4·3특별법을 비롯해 관련 과거사법을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매우 아쉽다. 코로나19 국난 극복을 위해 필요한 법들이 10여 개 남았는데 마무리 하지 못하고 다음 원내대표에게 넘겨야 할 것 같다.” (2020/05/06, 원내대표로서 마지막으로 참석한 최고위원회의에서)

“늦어도 4월 중에는 추가경경예산안 처리를 마치고 5월 초에는 모든 국민이 긴급재난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서민경제에 소중한 마중물을 부어 들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 (2020/04/20, 최고위원회의에서 긴급재난지원금을 놓고)

“황교안 대표가 ‘가슴을 울린다’고 하는 만큼 (박 전 대통령의 서한은) 도로 새누리당이 된 것을 알리는 정치선언문이다. 우리 국민 중에 다시 박근혜 시절로 돌아가자는 주장에 동의하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국민에게 탄핵당한 대통령이 옥중정치로 선거 개입하는 행위는 묵과하기 어렵다. 국정농단 반성은커녕 국민 분열시키는 선동에 전직 대통령이 나선 건 안타까운 일이다.” (2020/03/05,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위성정당은 냉정하게 판단하면 시대정신하고는 명백하게 역행하는 흐름이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에서 위성정당을 추진하면 우리 국민의 30% 범위 안에서는 파괴력이 있을 것이다. 자유한국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20~25% 정도 이동해서 위성정당을 선택하면 비례대표 의석 47석 가운데 절반 혹은 그 이상을 결과적으로 자유한국당이 획득할 수도 있다.” (2020/01/15,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서 자유한국당이 추진하는 위성정당을 놓고)

“반칙과 특권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민주주의의 큰 숙원이다. 독단과 특권에 의존한 권력정치의 낡은 굴레를 던지고 투명하면서 공정한 권력기관 시스템을 구축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대에 진입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는 정부 수립 이래 반복됐던 군부, 수사기관, 정보기관과 같은 권력기관의 견제 받지 않는 특권을 마침내 해체하기 시작했다는데 가장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2019/12/31,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공수처법의 본회의 통과를 놓고)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유한국당을 포함하는 합의의 길을 포기하지 않겠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다. 대화와 타협의 틀이 열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국회법이 정해 놓은 절차에 따라서 또 다른 길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에 동의한다면 더불어민주당은 협상에 매우 유연하게 나설 것이다. 주말에도 휴일에도 대화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 (2019/11/28,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검찰개혁의 이정표를 만들었다. 혼신과 열정을 쏟은 조 장관의 역할은 불쏘시개 그 이상이다. 민주당은 더 강력하고 확실한 검찰개혁을 추진할 것이다. 하늘이 두 쪽 나도 검찰개혁을 완수하겠다.” (2019/10/15,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한국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려는 일본의 의도대로 되기에는 우리경제가 매우 튼튼하다. 우리경제 기초여건(펀더멘탈)은 굳건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기술격차가 50년이라는 일부 주장도 가짜로 판명났다. 근거 없는 불안에 빠져서 스스로 흔들리는 것이 일본이 노리는 것이다.” (2019/08/08 국회에서 열린 원내 정책조정회의에서)

“이강인 선수에 대한 조명이 한창이다. 그의 패스는 속도와 거리, 타이밍의 삼박자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고 한다. 정치권이 이강인 선수와 같은 모습을 갖춰야 한다. 산불과 지진으로 고단한 재해 주민, 미세먼지 없는 내년 봄을 기다리는 시민들, 미국과 중국의 경제전쟁 여파로 예고된 수출전선의 먹구름, 경제 침체에 직면한 위기의 자영업, 중소기업, 청년실업 등 어려운 한국경제에 이강인 선수의 자로 잰 듯한 패스처럼, 또 신 내린 퍼팅과 같은 패스처럼 적재적소에 정확한 규모로 타이밍을 맞춰 추가경정예산을 투입하는 역할을 국회가 해야 한다.” (2019/06/13, 민주당 정책조정회의 모두발언에서)

“여당 원내대표로서 야당 원내대표에게 동생 취급을 받으면서도 낮은 자세로 국회 정상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머니가 진짜 누나를 먼저 두 명이나 낳아줬다. 누나가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내가 노력했다. 그 정도로 정성을 다해 예의를 갖춰 노력하고 있다. 이런 점도 한편에서 알아줬으면 좋겠다.” (2019/06/04,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우선 말 잘 듣는 원내대표가 되겠다. 내가 고집이 세다는 평가가 많은데 원내대표를 하면서 불식해 나가겠다. 이번 선거를 준비하면서 많이 달라졌고 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 인생 최고의 칭찬이었고 기뻤다. 까칠한 이인영이 아닌 선후배의 중간에서 심부름 잘 하는 이인영이 되겠다.” (2019/05/08, 더불어민주당 제4기 원내대표로 당선된 뒤 소감에서)

“내가 이념적으로는 가장 선명하지만 일을 풀어가는 방법에 있어선 그 누구보다 유연하다. 더불어민주당 안의 주류와 비주류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2019/05/01,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미래정당으로 거듭나겠다. 세대혁신을 촉진하겠다. 진보는 꼰대, 보수는 꼴통이라는 낡은 이미지에서 먼저 벗어나겠다. 다양성, 포용성, 역동성에 기반하는 더욱 강력한 여당을 만들겠다. 빼기와 나누기가 아니라 더하기와 곱셈의 용광로 감성을 다시 일깨워 내겠다.” (2019/04/21,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일간베스트’ 수준의 잡스런 얘기가 국회 본회의장에 난무할 수 없도록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2019/03/12,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수석대변인’이라고 말한 점을 비판하면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우리는 가치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1차 진보의 길로 당을 혁신해 집권할 수 있었다. 이제 2차 진보의 길을 열어야 한다.” “2차 진보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을 살리는 경제진보의 길이다. 재벌중심 이윤독점의 불평등 경제를 중소기업·자영업과 이윤공유의 상생경제로 바꿔내는 게 핵심이다. 2차 진보의 또 다른 축은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다. 노동과 복지가 낭비 아닌 포용적 성장의 핵심이라는 인식과 정책의 대전환을 이끌어내야 한다.” (2018/07/21,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는 페이스북 글에서)

“(개헌은) 더 좋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열고자 하는 일이다. 일부는 개헌을 통해서 (민주당이) 장기집권하려고 한다는데 그것은 박정희와 전두환 같은 군사 독재자들이 하는 짓이다. 우리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2018/02/04, 국회 기자간담회에서)

“개헌행 열차는 종착역 없이 달리는 설국열차가 아니다.” (2017/12/25, 국회 기자간담회에서 2018년 6월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의 동시 시행을 반대하는 자유한국당을 놓고)

“북한은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을 즉각 중단해야 하고 핵으로는 북한의 운명을 지킬 수 없다. 미국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한반도 밖의 미군 전력을 이용해 ‘외과의사 수술식’으로 도려내는 서지컬 스트라이크도 한국민의 의지와 맞지 않는다.” “우리 정부도 당면한 위기를 풀어헤칠 담대한 구상을 북측에 제안했으면 좋겠다. 감 떨어질 때를 기다리지 말고 우수천석(雨垂穿石·떨어지는 빗방울이 돌을 뚫는다)의 심정으로 정상회담 및 특사교환을 실천해야 한다.” (2017/08/15, ‘2017 통일 걷기’ 민통선 횡단을 마친 뒤)

“6월 항쟁은 1987년판 촛불혁명이고 2017년 촛불혁명은 6월 항쟁의 2017년판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와 국민 주권 측면에서 본질은 하나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항쟁은 더욱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의 결과다. 그에 반해 촛불 혁명은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들이 아주 많이 광장에서 모여 이뤄낸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2017/06/09, YTN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과 전화 인터뷰에서)

“우선 왜 이런 불신의 상황이 초래되었는가.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가 키운 일이다. 우선 (최순실씨로부터) 연설문 자문 정도를 받았다고 했는데 요컨대 부정, 비리, 농단 이런 것들이 걷잡을 수 없이 나왔다. 시중에서 양파는 껍질을 벗길수록 작아지기라도 하는데 이건 껍질을 벗기면 벗길수록 더 커진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검찰 조사에 응하겠다고 해놓고 결과적으로 그러지 않았다. 이런 불신을 키워온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였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2016/11/30, YTN 뉴스에 출연해)

“서울 구로구갑에서 지역구를 옮기라는 (이동학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의 주장) 이면에 내 지역구가 서울에서 좋은 지역구라는 편견이 있다면 솔직히 불편하다. (구로구갑은) 아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운동권 시절의 이상이 숨 쉬던 구로라서 찾아갔던 지역구였다. 구로구을에 비해 구로구갑인 내 지역구는 참 많은 지역 편차가 있었고 지지기반도 약했다.” (2015/07/16, 이동학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이 2015년 7월15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인영에게 지역구를 옮겨 출마해야 한다고 요청한 점을 놓고)

“나는 변화와 혁신이고 문재인 후보는 현실이고 안주다. 이인영은 커다란 가능성이고 문재인은 작은 안락함이다.” (2015/01/13,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경선에서 맞붙게 된 문재인 후보를 평가하면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들은 창업자인데 그 후예들은 그렇지 못하다. 김 전 대통령은 반독재 민주화의 길을 컴컴한 군부독재 시절에도 내어 정권 교체를 이뤘다.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장벽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창업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정작 그 후예들은 유산 상속자처럼 패권, 계파, 지역에 안주하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2015/01/05,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경선을 앞두고 YTN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에 출연해서)

“중도화로 보수를 막아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문제다. 진보는 삶의 진보, 유연한 진보, 점진적 진보, 생활의 진보로 걸어왔었고 이를 고수했어야 했다.” “중도화 경쟁은 우리에게 불리할 수 있다. 중도화 경향은 우리 스스로의 혼란만 자초한 꼴이다. ‘이 바보야, 문제는 중도가 아니라 진보를 제대로 못해서야’라는 지적을 따갑게 받아들여야 한다.” (2014/02/20, ‘야(野)! 민주당! 민주당의 혁신방향과 과제’ 토론회에서)

“야권의 통합은 정방향인데 야권의 분열이나 분립은 그에 반하는 방향이다. 야권의 분열은 어떤 경우에도 피했으면 좋겠다. 특히 정당의 모습으로 나눠져서 나타나는 일은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013/11/20, MBC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후보 단일화는) 새누리당에게 참 나쁜 선거전략이겠지만 국민에게는 참 좋은 선거전략이다.” (2012/11.02,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대선후보 단일화를 추진하는 점을 놓고 새누리당에서 ‘나쁜 선거전략’이라는 주장이 나오자)

“과반수로 총선 승리할 수 있었던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기회를 놓쳤다. 분하고 또 분하다. 그러나 조속히 당을 수습하고 대선승리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내고야 말겠다.” (2012/04/12, 제19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좋지 못한 결과를 거둔 점을 놓고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아름다운 별이 졌다. 김근태의 깃발은 내려졌지만 수천만 수백만 가슴 속에 해방 횃불로 타오른다. 그의 이름을 민주주의 역사의 성장에 새기겠다.” (2011/12/30,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원이 별세하자 애도를 나타내면서)

“젊은 대표가 출현하면 야당이 바뀌고 그러면 대한민국이 바뀐다. 20∼40대가 호응하는 젊은 민주당이 되면 50대 이상의 국민까지도 우리를 다시 신뢰할 수 있다.” (2011/12/21, 민주통합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경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원래 책을 쓰려고 걸었던 길은 아니다. 더군다나 일기 형식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 번쯤은 어느 운동권 정치인의 고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보가 트렌드로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시대정신이고, 시대의 선택이다. 진보를 위해 끊임없이 그 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 신념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2011/11/10,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산티아고 일기’를 쓴 이유를 질문받자)

“나는 지금부터 통일의 길을 걷고자 한다. 우리는 아무리 늦어도 20년 안에 통일을 해야 한다. 복지국가의 길도 20년쯤이면 도달할 수 있다. 꿈같은 얘기지만 아득한 800km의 그 길을 걷고 또 걸으니까 끝이 보였듯 나는 반드시 통일과 복지의 종착점에 도달하겠다.” (2011/11, ‘산티아고 일기’에서)

“중립을 지켜야 할 서울시장이 이번 주민투표를 기획하고 주도했다는 일을 고백했다. 아이들의 먹는 것으로 불장난하는 일은 그만해야 한다.” (2011/05/17, 오세훈 서울시장이 전면 무상급식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를 강행할 의사를 밝히자)

“내 판단의 기준은 옳고 그른 것이다. 옳다는 것은 신념이 걸리는 문제다. 대신 한 번 결정하면 바꾸지 않는다.” (2011/05/16,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진보는 시장과 돈의 전일적 지배로부터 사람과 공동체의 가치를 지켜내는 것이자 범람하는 상품의 논리로부터 노동의 숭고한 가치와 일하는 사람들의 보람을 지켜내는 것이다.” (2011/05/13, 한겨레 인터뷰에서)

“삼국지의 주유는 적벽대전에서 화공을 결정한 뒤 (같은 편인) 제갈량을 제거하고자 했다. 우리는 주유의 이런 용렬함을 넘어야 한다. 연대와 연합에서 누가 승자가 되느냐는 작은 문제다.” (2011/04/13, 4.27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야권연대를 통한 단일화 효과가 크지 않다는 관측이 나오자 지지를 호소하면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억지로 딴청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고통 분담은 못할망정 초과이익과 기대 이상의 이익도 최소한 나누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의 총수로서 너무 인색한 모습이다. 중소기업와 고통을 함께 나누고 동반성장을 모색해 우리 경제의 새로운 생태계를 구성하는 데 공감한다면 억지로 딴청부릴 일은 아니다.” (2011/03/11,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건희 회장이 전날 ‘이익공유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한 점을 비판하면서)

“만약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이런 사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아마 북한의 무력 사용은 준엄하게 규탄하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확전에 반대했을 것이다. 평화적 해결 방법을 모색하면서 남한과 북한의 무력 사용 중단을 촉구했을 것이다.” (2010/11/24, 북한의 연평도 해안포 사격 사건이 일어나자)

“민주당은 변화를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공과를 떠나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당심의 결과다. 민주당이 건강하고 희망이 있다는 반성이 나온다.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저변에 국민 마음과 고단한 서민 삶이 있다. 그 삶을 개선하는 진보와 복지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정치혐오를 하는데 정치는 서민들에게 복이 됐으면 좋겠다. 복의 정치가 복지의 길이다.” (2010/10/04, 민주당 경선에서 최고위원으로 뽑힌 다음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민주당의 현재고 나와 젊은 정치인들은 민주당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보다 대중적 인지도가 떨어질진 몰라도 진보개혁의 일관성과 진보민주 대통합의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는 신뢰를 놓고 보면 나에게도 상당히 큰 힘이 잠재적으로 있다고 생각하고 나 역시 적극 역할을 맡겠다.” (2010/09/15, CBS라디오 ‘이종훈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민주당 경선에 함께 출마한 손학규·정세균 전 대표와 정동영 의원과 경쟁을 질문받자)

“단지 나이가 젊은 사람들이 당 지도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마음가짐, 소통과 혁신, 그리고 진보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새로운 지도부가 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010/09/06, BBS라디오 ‘아침저널’ 인터뷰에서 ‘86 세대(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가 민주당 지도부에 올라야 하는 이유를 질문받자)

“당시에는 사람들 가슴 속에 사회 정의가 짓밟히고 유린되는 점을 향한 분노,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학살자를 향한 분노가 있었고 민주사회에 대한 열망도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정서적·정신적 공유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화나 토론이 아니었다. 왜 나가야 하는지 설득하기보다 용기를 내도록 선동하는 게 필요했다. 그래서 목청이 높아지고 손짓이 강렬해졌다. 내 안에 있는 것을 토해내는 일과 사람들 가슴속 분노를 터뜨리는 일이 일치된 과정이었지 사람들에게 없는 분노를 심는 게 아니었다. 의식을 세뇌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용기를 터뜨리는 과정이었다. 그때는 그게 필요했을 뿐이고 나는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 아니다.” (2007/06/25, 신동아 인터뷰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의 죽음이다. 보편적 가치가 왜곡될 때 국민의 폭발력이 어떠했는지 경험하지 않았나.” (2007/01/13, 서울신문 기사에서 박종철 열사의 서거 20주기를 하루 앞둔 소감을 질문받자)

“무조건 모이자는 차원을 넘어 정책과 이념적 정풍운동을 분명히 하면서 통합과 재편의 순서를 밟아야 한다.” “여권은 전략적으로 불분명하고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6월 항쟁 당시의 프레임(개념구도)이 ‘반독재 민주대연합’이었는데 지금은 ‘반보수우경화 중도개혁대연합’과 ‘비신자유주의 신중도연합’으로 지향되고 승화돼야 한다.” (2006/12/12, 열린우리당 ‘한국적 제3의길 연구회’에서 개최한 ‘6월 항쟁 20주년 회고와 전망’ 토론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지역통합을 위한 진정성이나 절박성에 공감하지만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고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진보를 위한 개혁 연정이 더욱 바람직하다. 지역 구도를 넘어 통합하기 위한 연정이라면 한나라당이 파트너로서 필요하지만 개혁을 위한 연합이나 연정이 필요할 때 (한나라당은) 대단히 미흡할 수 있다.” (2005/07/30,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대연정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평생을 법과 상관없이 살아왔다. 하지만 최근 여러 사람들이 권하기도 했고 의원 활동은 입법행위를 통해 구체화된다는 걸 알았다. 또 입법이 헌법 정신의 구현이라는 측면도 강한 만큼 새삼스럽지만 (헌법을) 공부하게 됐다.” (2004/09/20,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최근 헌법학 개론서를 사들여 공부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국가보안법은 폐지 수순에 가 있다. 반드시 폐지될 것이고 폐지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다만 적절한 타이밍을 고려하고 있을 뿐이다.” (2004/07/09, 내일신문 기사에서)

“지역주의가 되살아나 선거 의미가 훼손된 일에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국민 다수는 헌법을 유린한 부패 정치 세력을 심판했다. 국민이 강한 나라, 국민 참여가 보장되는 정치를 만드는 데 노력하겠다.” (2004/04/15, 제17대 총선에서 당선한 뒤 연합뉴스의 당선자 인터뷰에서)

“‘386(30대, 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 세대 특성상 문제 제기를 하려면 정면으로 하지 왜 음모를 꾸미겠느냐.” (2003/07/28,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당시 불거졌던 ‘386 음모론’을 반박하면서)
koreaw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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