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정부가 기금형 퇴직연금의 적용 범위를 DC형뿐 아니라 개인형 IRP까지 확대하고 전문 수탁법인의 법적 책임도 강화하면서 금융권 퇴직연금 시장의 경쟁 방식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기존 금융회사와 맺은 개별 계약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퇴직연금 시장에 여러 사업장의 적립금을 공동 운용하는 수탁법인이 본격적으로 진입하면 장기 수익률과 전문 운용역량이 경쟁력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운용손익이 가입자에게 귀속되는 만큼 수탁법인의 책임 강화가 실질적 가입자 보호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제도 안착의 관건으로 꼽힌다.

▲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2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고용노동부와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간 당정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는 29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퇴직연금 기능강화 방안'에서 "기금형 퇴직연금제도는 확정기여형(DC)과 개인형퇴직연금제도(IRP)에 적용되며, 한 사업장 내에서 계약형과 기금형 퇴직연금을 복수 설정하거나 다수의 기금형 퇴직연금을 설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번 방안은 고용노동부와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가 참여하는 당정협의를 거쳐 마련됐다.

아울러 정부는 "퇴직연금 시장규모, 변동성을 감안하여 현재 70%인 개인형퇴직연금제도(IRP)의 위험자산 투자 한도를 단계적으로 완화하고, 확정기여형(DC)·개인형퇴직연금제도(IRP)·중퇴기금의 투자가능상품을 확대한다"면서도 "법률에 가입자 이익 최우선의 원칙을 규정하고, 의무위반 시 수탁법인의 손해배상책임 및 가입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명시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11월 중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개정안을 마련하고 12월 국회 본회의 통과를 추진한다는 방침도 내놨다.

이번 개편의 핵심은 가입자가 직접 금융상품을 선택하는 기존 DC형·IRP의 운용방식을 전문 수탁법인이 적립금을 공동 운용하는 기금형으로 보완한다는 데 있다. 정부는 이를 통해 기존 계약형을 유지하면서 기금형을 활성화해 가입자 선택권을 넓히고 전문적인 자산배분과 규모의 경제를 통한 운용 효율성 제고를 기대하고 있다.

기금형 도입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퇴직연금 시장은 이미 500조 원을 넘어섰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5월20일 발표한 '2025년 우리나라 퇴직연금 투자 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4천억 원으로 전년도 말보다 69조7천억 원(16.1%) 증가했다. 이 가운데 확정급여형(DB)은 228조9천억 원(45.7%), DC형은 141조6천억 원(28.2%), IRP는 130조9천억 원(26.1%)으로 기금형 적용 대상인 DC형과 IRP의 합산 적립금은 272조5천억 원에 달한다.

이렇게 퇴직연금 시장이 성장하는 가운데 적립금의 운용 효율성은 개선 과제로 남아 있었다.

지난해 말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중 원리금보장형 비중은 75.4%로 실적배당형 24.6%를 크게 웃돌았다. 다만 원리금보장형 비중은 DB형에서 91.9%로 높았고 DC형과 IRP에서는 각각 67.0%, 55.7%로 집계돼 제도별 차이를 보였다. 전체 퇴직연금의 연간 수익률은 6.47%로 제도 도입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정부는 장기적인 노후소득 확보를 위해 운용 효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 김정호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장(가운데)이 2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고용노동부와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간 당정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는 수탁법인 설립 주체에 따라 금융기관 개방형, 연합형, 공공기관 개방형의 세 가지 모델을 병행해 추진하기로 했다.

금융기관 개방형은 금융회사가 단독 또는 컨소시엄으로 수탁법인을 설립하는 방식이며, 연합형은 복수 사용자나 전국단위 노사단체 등이 참여하고, 공공기관 개방형에는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 등이 포함된다.

이에 따라 기존 은행·증권·보험사 중심의 퇴직연금 시장에서 전문 수탁법인들의 운용성과 경쟁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말 퇴직연금 적립금의 금융권역별 점유율은 은행 52.0%, 증권사 26.2%, 보험사 20.9%로 집계됐으며 향후 기금형 도입에 따른 적립금 이동 규모는 신규 수탁법인의 운용성과와 가입자 선택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금융권에서는 금융상품 공급과 적립금 유치뿐 아니라 장기적인 자산배분 전략, 운용비용 절감, 위험관리 역량 등이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가 될 것으로 바라봤다.

다만 운용 주체의 전문화가 곧바로 가입자 보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수탁법인의 책임과 감독체계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기금형은 전문기관이 가입자를 대신해 자산을 운용하는 구조여서 정보 비대칭과 이해상충, 도덕적 해이 등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정부는 가입자 이익 최우선 원칙을 법률에 명시하고 수탁법인의 의무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책임과 가입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도입하기로 했다. 특히 운용과 이해상충 관리, 설명의무 위반 등 핵심 영역에서는 입증책임을 전환해 수탁법인이 의무 위반과 손실 사이의 인과관계가 없거나 고의·과실이 없음을 입증하도록 할 방침이다.

자산보관과 기준가 산출 등은 외부에 위탁하도록 하고 투자정책 결정 등 핵심 업무는 수탁법인이 직접 수행하도록 해 운용 과정의 교차검증과 책임소재 명확화도 추진한다. 정부는 수탁법인의 성과를 평가·공시하고 과도한 수수료 책정을 통제하는 방안도 마련할 계획이다.

다만 수탁자책임 강화가 모든 투자손실을 보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보호장치의 실효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수탁법인의 의무 위반에 따른 손실은 손해배상책임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정상적 투자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장손실이 원칙적으로 가입자에게 귀속된다.

이에 따라 정부가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탁법인의 책임과 감독체계가 어떻게 구체화될지 주목된다.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고용노동부와 환노위 간 당정협의에서 "당면 과제 중 퇴직연금 제도 개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특히 20년만에 노사정이 단계적 의무화, 기금형 퇴직연금 활성화에 뜻을 모았다는 점이 매우 의미 있는 성과"라며 "오랜 논의 끝에 어렵게 이뤄낸 사회적 합의인만큼 구체적 제도개선 입법 성과로 이어나가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석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