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임종룡 경제부총리 내정자
임종룡 금융위원장(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내정자).


임종룡은 금융위원장이다. 금융정책에 정통한 전문 경제관료로서 조선해운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문제 등 금융개혁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왔다.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2016년 11월2일 내정됐다.

임종룡은 1959년 8월3일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4세 때 상경했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24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재정경제부에서 은행제도과장, 증권제도과장, 금융정책국장을 거쳐 기획재정부 1차관 등 주요 보직을 두루 맡았다.

국무총리실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는 듯 했으나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을 거쳐 금융위원장으로 복귀했다.

‘중재의 달인’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농협금융지주 회장으로 취임 당시 이른바 모피아 출신인 데다 온화한 성격 탓에 농협중앙회의 입김이 센 곳에서 잘 버틸 수 있겠냐는 우려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투자증권 인수를 앞두고 직접 농협중앙회 조합장들에게 인수의 필요성을 설득하면서 취임 6개월 만에 우리투자증권 인수에 성공했다.

직전 회장이었던 신동규씨는 취임 뒤 줄곧 농협중앙회와 갈등을 빚다가 “농협금융은 제갈량을 데려와도 안 될 것”라며 자진사퇴했다. 그러나 임 회장은 뛰어난 중재능력을 보이며 '금융계의 제갈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 금융위원장으로 금융개혁을 주도하고 있다.

2016년 11월 ‘최순실 게이트’ 사태 때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내정됐으나 정국의 혼란으로 청문회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우리투자증권 인수에 성공하면서 농협금융의 비금융권 사업다각화에 성공했다. 농업과 연계된 글로벌 전략으로 ‘네덜란드의 농협’인 라보뱅크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했다. 전체인구 70%가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베트남에 사무소를 지점으로 전환하는 작업도 추진했다.

이처럼 공격적인 행보를 거듭하자 업계는 농협금융에 변화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다. ‘마찰 없는 소통의 리더십’으로 농협금융의 폐쇄적인 조직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워커홀릭’이자 남다른 집중력으로 잘 알려져있다. 청와대 비서관 시절 대통령 주재회의 도중 중간에 나오지 않아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사례는 잘 알려져있다.

기획재정부 재직 당시 비공개투표로 진행되는 ‘닮고 싶은 상사’에 세번이나 선정될 정도로 직원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그는 ‘내가 떠나더라도 후배들이 이 조직을 위해 기여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후배들을 대했다고 밝혔다.

외환위기 때 재정경제부의 금융기업구조개혁반 반장을 맡아 대규모 빅딜과 구조조정에 관여했고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 등을 챙기고 구조조정의 기본적인 형태를 만들어가는 데 공헌했다고 평가받는다.

경제관료로서 경제와 금융정책국을 모두 경험했는데 임종룡은 이런 경력이 정부 고위관직에 오르는데 도움이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청와대에 있으면서 글로벌 금융위기 탈출에 기여했다. 임종룡은 두번의 외환위기를 경험하자 ‘건전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으로 재직할 때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주열 당시 한국은행 부총재보와 은행 자본확충펀드를 만들었다. 농협금융지주 회장이 되고나서는 회사 창업 이래 가장 큰 인수합병을 10개월도 안돼 마무리했다.

당시 ‘금융계의 제갈공명’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는 NH농협금융을 크기 면에서 4대 금융그룹 지위에 올려놨다.

겸손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인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주변을 배려해야 한다’를 항상 마음에 담고 실천한다고 한다. 성경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마음에 담아두고 다닌다.

우리투자증권 인수전을 놓고 당시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경쟁해 이른바 ‘임의 전쟁’이라는 말도 들었으나 선배인 임영록 회장을 이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금융위원장으로 취임한 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정부 산하 9개 금융 공공기관에 2016년 5월30일까지 성과연봉제 확대 도입을 끝냈다. 그러나 예금보험공사를 제외한 8개 금융 공공기관은 노조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개별 직원들의 동의서를 통해 성과연봉제를 도입해 후폭풍이 예상된다.

금융권의 보신주의를 비난하며 금융사 간 경쟁을 통해 국내 금융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시도를 다양하게 했다. 계좌이동제, 인터넷전문은행 도입, 온라인 보험슈퍼마켓 도입, 비대면 실명확인 허용, ISA 제공 등으로 금융사간 경쟁을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소통에 능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업계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금융개혁을 진행해오고 있다.

성품이 온화하고 다정해 인기가 많다. 일을 할 때는 치밀하고 강하게 추진하지만 합리적 리더십으로 직원들이 잘 따르는 편이다.

그러나 금융위원장으로서 사소한 것에 몰두하고 큰 틀의 금융개혁에 손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 부채문제나 금산분리 강화, 거래소 지주사 전환 등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금융소비자의 권익 증진과 기업 구조조정의 신속한 추진, 가계 대출 관리, 금융사의 영업환경 개선 등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임종룡의 금융개혁은 금융소비자 중심이 아니라 금융사 중심으로만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남은 임기 동안 금융시장을 안정화하는데 주력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81년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1980년대 후반 산업합리화 당시 해운산업 합리화와 국제그룹 해체 업무 등을 주도했다.

1999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 은행제도과 과장에 올랐다. 외환위기 당시 금융기업구조조정개혁반장을 맡으면서 은행합병 등을 도맡았다. 이어 금융정책국에서 증권제도과장, 금융정책과장종합정책과 과장을 역임했다.

2002년 전윤철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의 권유로 경제정책국 종합정책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 당시 장관은 “한쪽에 너무 치우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임종룡을 평가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주영국대사관 참사관을 지낸 후 2007년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 국장에 올랐다.

2009년 대통령실 경제비서관, 2010년 기획재정부 제1차관, 2011년 국무총리실장을 역임했다.

33년 공직생활을 마치고 2013년 6월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이 됐다.

농협금융지주 회장에 재직하다 2015년 3월 소규모 개각으로 금융위원장에 임명됐다.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의 뒤를 이어 국내 금융산업의 개혁을 도맡아 추진해왔다. 취임 일성으로 ‘금융개혁’을 내세웠다.

2015년 12월 청와대가 3기 경제팀을 짤 때 경제부총리로 임종룡이 유력한 후보로 거명됐으나 유일호 전 국토부 장관이 경제부총리에 오르면서 금융위원회에 남게 됐다.

2016년 11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내각이 교체되면서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내정됐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김병준 총리 카드를 사실상 포기하겠다는 뜻을 내보이며 거취는 불분명한 상황이다.

◆ 학력

영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2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오리건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석사를 마쳤다.

◆ 가족관계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둘도 공직에서 일하고 있다.

KBS에 근무했던 PD 출신 부인 최순형씨 사이에 1녀를 뒀다. 사람들이 딸을 놓고 똑같이 생겨 ‘구공탄’이라고 한다며 전형적인 ‘딸바보’ 모습도 보인다.

딸은 아버지와 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와 현재 IT관련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 가족관계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둘도 공직에서 일하고 있다.

KBS에 근무했던 PD 출신 부인 최순형씨 사이에 1녀를 뒀다. 사람들이 딸을 놓고 똑같이 생겨 ‘구공탄’이라고 한다며 전형적인 ‘딸바보’ 모습도 보인다.

딸은 아버지와 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와 현재 IT관련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어록


“정책은 진정성과 일관성, 신속성이 필요하다. 얼마나 진정성있게 정책을 만드는 지와 만들어진 정책을 일관성있게 유지하는지가 중요하다. 다만 경제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대기비행이 아닌 시계비행을 해야한다.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추듯이 신속하게 안내해 경제주체가 불확실성을 느끼지 않도록 움직이겠다.”(2016/11/03,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내정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기본적인 제 철학은 ‘결코 성장을 위해서 투기를 허용하지 않겠다’라는 점이다. 부동산 투기를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경제적 폐해다. ”(2016/11/02,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내정된 뒤 기자회견에서)

"성과연봉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노조가 여전히 동의하지 않고 있고 조직 내 갈등도 해소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이런 과정은 금융 공공기관의 낡은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불가피한 진통으로 볼 수 있으나 기관장들이조직 안정과 갈등 치유에 최선을 다해달라." (2016/06/02, 금융 공공기관장 간담회에서)

“등산을 하면서 두 그루의 나무가 하나가 된 연리목(連理木)을 본 적이 있다." "각기 다른 나무가 서로를 압박하다가 맨살끼리 고통스럽게 닿아 서로의 세포가 섞여야만 한 몸이 되듯, 노사가 진정성 있게 다가가 맨살을 부딪치며 유기적으로 화합해야한다." (2016/06/02, 금융 공공기관장 간담회에서)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핀테크다. 정부와 금융투자업계, 핀테크 업체가 호흡을 맞춰가야 한다.” (2016/06/01, ‘2016 한국 자본시장 컨퍼런스’ 축사에서)

"우리 경제의 환부를 치유하고 경쟁력을 되찾기 위해 신속하고 적극적인 기업구조조정이 이제 피할 수 없는 과제라는 인식을 갖고 최근에는 해당 기업과 산업의 상황에 따라 3가지 트랙으로 나누어 구조조정을 추진 중이다." "정부는 국책은행 자본 확충, 회사채시장 안정, 실업대책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지원해 나가겠다." (2016/05/26, ‘2016 한국금융미래포럼’에서)

“농협이라는 큰 우산 밑에서 다소 폐쇄적으로 길들여진 직원들에게 야성과 자신감을 가지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제 곧 명실상부한 4대 금융지주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 (2014/07/24,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농협금융은 은행•보험을 통한 유통은 어느 금융그룹보다 강하지만 증권•자산운용을 통한 제조와 운용이 부족하다” “증권업계 1등으로서 전통과 전력을 가지고 있고, 역동적인 DNA를 보유한 우투증권이 농협금융에 가장 필요하고 적합한 대상이라고 판단했다.” (2014/07/16,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우리투자증권에 방문해 부서장회의에 참석하며)

“할머니는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 보성군수, 그 다음이 보성농협 지부장인 줄 아셨어요. 그래서 저한테 지부장을 해 보라고 하셨죠. 제가 농협금융 회장이 돼서 소원을 들어드린 것 같아 뿌듯하더군요.” (2014/06/20,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나랏일은 사명감이 없으면 안 된다. 아버지는 늘 제게 집안일보다 나랏일이 먼저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지켰다 생각하고 스스로 위안한다.” (2014/06/20,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하던 일을 마무리 짓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질문을 듣고)

“금융지주가 중장기 전략을 세우면 계열사들이 따라오도록 하되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겠다.” (2014/06/12, 취임 1주년을 맞아 연 기자간담회에서)

“농협은 다른 금융지주와 달리 상업성과 공공성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에 나한테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또 당시 농협은 누군가가 나서서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위급한 시기였다. 화려하지 않고 남들 보기에 편하지 않은 자리일지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라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2013/10/04,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지금까지는 농협중앙회 테두리 안에 있다 보니 직원들이 다른 금융기관과 경쟁관계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주사가 출범하는 그때부터 전쟁터로 나간 것이다. 농협인이 아니라 은행인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직원들의 야성(野性)을 불러일으켜 경쟁력을 갖추도록 할 것이다.”(2013/08/11,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농협금융이 우리나라 근간이 되는 금융기관이라는 생각으로 회장직을 수락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에 따른 해석은 앞으로의 성과에 따라 보여주겠다.” (2013/06/11, 농협금융지주 취임사를 낭독하며)

“신경(信經) 분리와 농협중앙회의 문제는 별개다. 농협중앙회가 농협금융지주의 지분을 100%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견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다.”(2013/06/07, 농협중앙회와 농협금융지주 사이의 권한 논란을 놓고)

◆ 평가

우리투자증권 인수에 성공하면서 농협금융의 비금융권 사업다각화에 성공했다. 농업과 연계된 글로벌 전략으로 ‘네덜란드의 농협’인 라보뱅크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했다. 전체인구 70%가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베트남에 사무소를 지점으로 전환하는 작업도 추진했다.

이처럼 공격적인 행보를 거듭하자 업계는 농협금융에 변화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다. ‘마찰 없는 소통의 리더십’으로 농협금융의 폐쇄적인 조직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워커홀릭’이자 남다른 집중력으로 잘 알려져있다. 청와대 비서관 시절 대통령 주재회의 도중 중간에 나오지 않아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사례는 잘 알려져있다.

기획재정부 재직 당시 비공개투표로 진행되는 ‘닮고 싶은 상사’에 세번이나 선정될 정도로 직원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그는 ‘내가 떠나더라도 후배들이 이 조직을 위해 기여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후배들을 대했다고 밝혔다.

외환위기 때 재정경제부의 금융기업구조개혁반 반장을 맡아 대규모 빅딜과 구조조정에 관여했고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 등을 챙기고 구조조정의 기본적인 형태를 만들어가는 데 공헌했다고 평가받는다.

경제관료로서 경제와 금융정책국을 모두 경험했는데 임종룡은 이런 경력이 정부 고위관직에 오르는데 도움이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청와대에 있으면서 글로벌 금융위기 탈출에 기여했다. 임종룡은 두번의 외환위기를 경험하자 ‘건전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으로 재직할 때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직면했을 때 이주열 당시 한국은행 부총재보와 은행 자본확충펀드를 만들었다. 농협금융지주 회장이 되고나서는 회사 창업 이래 가장 큰 인수합병을 10개월도 안돼 마무리했다.

당시 ‘금융계의 제갈공명’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는 NH농협금융을 크기 면에서 4대 금융그룹 지위에 올려놨다.

겸손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인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주변을 배려해야 한다’를 항상 마음에 담고 실천한다고 한다. 성경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마음에 담아두고 다닌다.

우리투자증권 인수전을 놓고 당시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경쟁해 이른바 ‘임의 전쟁’이라는 말도 들었으나 선배인 임영록 회장을 이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금융위원장으로 취임한 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정부 산하 9개 금융 공공기관에 2016년 5월30일까지 성과연봉제 확대 도입을 끝냈다. 그러나 예금보험공사를 제외한 8개 금융 공공기관은 노조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개별 직원들의 동의서를 통해 성과연봉제를 도입해 후폭풍이 예상된다.

금융권의 보신주의를 비난하며 금융사 간 경쟁을 통해 국내 금융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시도를 다양하게 했다. 계좌이동제, 인터넷전문은행 도입, 온라인 보험슈퍼마켓 도입, 비대면 실명확인 허용, ISA 제공 등으로 금융사간 경쟁을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소통에 능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업계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금융개혁을 진행해오고 있다.

성품이 온화하고 다정해 인기가 많다. 일을 할 때는 치밀하고 강하게 추진하지만 합리적 리더십으로 직원들이 잘 따르는 편이다.

그러나 금융위원장으로서 사소한 것에 몰두하고 큰 틀의 금융개혁에 손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 부채문제나 금산분리 강화, 거래소 지주사 전환 등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금융소비자의 권익 증진과 기업 구조조정의 신속한 추진, 가계 대출 관리, 금융사의 영업환경 개선 등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임종룡의 금융개혁은 금융소비자 중심이 아니라 금융사 중심으로만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남은 임기 동안 금융시장을 안정화하는데 주력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 기타

어릴 적 축구와 야구를 좋아하고 공부는 뒷전이었다고 한다.

대학 진학 후 회계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공직에 몸담는 것이 좋겠다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공직을 선택했다.

좌우명은 ‘진정성’이다. 부친으로부터 ‘진솔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활철학을 배웠다고 한다. 그럴 경우 누구나 다 설득할 수 있고 누구나 다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는 지론을 지니고 있다.

시력이 좋지 않아 방위로 1983년 군복무를 마쳤다.

연세대 상경대 동문으로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서승한 전 국토교통부 장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있다.

임영록 전 KB금융지주 회장과 절친한 선후배 사이다. 임 전 회장과 1987년 산업금융과에서 사무관으로 첫 인연을 맺은 뒤 상당기간 공직생활을 같이했다. 밤샘 근무 후 힘들 때면 두 사람이 과천에서 자주 볼링을 쳤다고 한다.

역대 관료 가운데 첫 손에 꼽힐 정도로 축구실력이 우수했다고 한다. 그는 축구를 통해 재무부 시절 동료애와 목표를 달성하는 문화를 배웠다. 당시 십자인대가 끊어지고 연골이 파손되어도 축구장에 있을 만큼 축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한다.

2015년 기준으로 재산 20억4천만 원을 보유해 경제부처 장관 가운데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했다. 이는 전년과 비교해 1억4700만 원 늘어난 것이다. 본인과 배우자 소유 아파트 3채의 가액 9억6200만 원, 예금은 9억3100만 원으로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