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렛 미 인은 따돌림과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외로운 소년이 옆집에 이사 온 소녀를 만나고 친구가 되는 이야기가 기본 줄거리이다. 어려운 형편에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는 아들에게 세심하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 사진은 영화 '렛 미 인' 스틸컷. <네이버 영화>
성년이 될 때까지 양육을 한다고 보면 그 기간은 20년가량 된다. 평균 수명이 60세 정도였던 20세기 중반에는 인생의 삼분의 일이 양육 기간일 정도로 인생 주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개인적으로 양육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준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렛 미 인’(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과 ‘비바리움’(로컨 피네건, 2020)이다.
몇 년 전부터 극장가에 재개봉 영화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데 렛 미 인도 최근 재개봉됐다. 제작 국가, 장르, 시대는 제각각이지만 재개봉작들은 작품성을 인정받거나 입소문을 통해 널리 알려진 작품들이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렛 미 인은 스웨덴 제작이고, 동명 제목인 렛 미 인(매트 리브스, 2010)으로 영국에서 리메이크 됐다. ‘렛 미 인’은 장르로 따지만 뱀파이어 호러지만 주인공 소녀가 뱀파이어라는 설정을 제외하면 배경이나 내용은 매우 사실적이다.
뱀파이어는 서양에서 오랫동안 인기 있는 소재로 ‘노스페라투’(F.W.무르나우, 1922)를 필두로 다양한 양식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왔다.
‘드라큘라’(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93)처럼 고전적인 스타일부터 청소년 영화로 재해석한 ‘트와일라잇’(캐서린 하드윅, 2008)까지 뱀파이어 이야기는 꾸준히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렛 미 인은 따돌림과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외로운 소년이 옆집에 이사 온 소녀를 만나고 친구가 되는 이야기가 기본 줄거리이다. 어려운 형편에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는 아들에게 세심하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
시골 마을 풍경이나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 등 사실적인 공간 배경에 이질적인 요소가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이웃집 소녀가 뱀파이어라는 점이다. 뱀파이어 소녀는 매일 얻어맞는 소년에게 용기를 주고 맞더라도 ‘더 세게 쳐버려’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아름답고 슬픈 소년, 소녀의 성장과 우정 이야기로 볼 수 있는 이 영화에서 ‘양육’이라는 행위의 본질을 생각하게 해 주는 존재는 소녀의 아버지이다. 13살 소녀와 중년의 아저씨이니 당연히 모두 아버지와 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둘은 친구이다. 뱀파이어 소녀는 계속 13살에 머물러 있고 인간인 소년은 나이를 먹어 어느덧 중년이 된 것이다.
소녀는 뱀파이어라서 인간의 피를 먹어야 한다. 그러려면 살인을 해야 하는데 이와 관련해 죄책감을 갖고 있는 소녀는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굶주렸을 때만 흡혈을 한다.
소녀의 식량을 구해 오는 일은 중년의 남자가 하고 있다. 양육에 있어 가장 기본은 먹을 것을 구해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남자는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소녀의 배고픔을 못 본 척 할 수 없어 남자는 피를 구하러 나가지만 매번 너무나 괴로워한다.
물론 이 영화는 과장된 거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모든 부모는 자식을 양육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가 고통스런 현실과 마주하고 견뎌야 하는 면이 있다.
SF 영화인 ‘비바리움’은 공간적 배경이나 내용 모두 비현실적이고 상징적이다.
결혼을 앞두고 집을 구하려는 커플이 부동산 중개인을 따라 기이한 마을로 들어가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모두 똑같은 구조로 지어진 집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 마을에서 중개인은 전시용 집을 보여준다.
신혼부부가 살기에 딱 좋을 것 같은 집을 정신없이 둘러보던 커플은 어느 순간 중개인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마을을 빠져나오려 했지만 커플의 자동차는 결국 그들이 구경한 집 앞으로 도돌이표처럼 돌아온다. 미궁에 빠진 두 사람은 마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헛수고로 마감된다.
텅 빈 마을에 갇힌 커플에겐 주기적으로 음식 박스가 배달된다. 아무 맛도 없는 똑같은 음식을 살기 위해 먹던 두 사람은 어느 날은 음식이 아닌 다른 박스를 받는다.
놀랍게도 박스에는 아기가 들어있고 아기를 잘 키우면 그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아이는 사랑스럽지도 않고 감정도 느껴지지 앉는 로봇 같은데 커플이 하는 행동을 흉내 낸다.
현실에서 양육은 힘들기도 하지만 보람되고 기쁨을 느끼는 일인데, 이 영화에서 양육은 끔찍해 보인다.
‘비바리움’은 커플이 길러낸 아이가 사회의 일원이 되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사회의 일원이라고 하지만 실은 부속품처럼 표현된다.
작은 동물을 사육하기 위해 만든 서식지라는 뜻의 비바리움은 커플이 갇혀 살아가는 집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양육의 최종 목적이 사회 구성원을 길러내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 영화는 양육의 의미를 정말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이를 기르면서 느낄 수 있는 짜증, 분노, 절망을 다 모아둔 것 같은 내용이라 보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지만 ‘양육’이라는 단어의 무게감만큼은 처절하게 체험할 수 있게 만든다.
과거에 비해 양육의 개념도 환경도 달라졌겠지만 부모의 숙명인 양육에 담긴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는 두 편의 영화였다. 호러와 SF라는 판타지 장르라 비현실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 그렇기 때문에 양육의 본질을 선명하게 되새겨볼 수 있었다. 이현경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다. 평론집 '영화, 내 맘대로 봐도 괜찮을까?'와 '봉준호 코드', '한국영화감독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등의 공저가 있다. 단편영화 '행복엄마의 오디세이'(2013), '어른들은 묵묵부답'(2017), '꿈 그리고 뉘앙스'(2021)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영화에 대해 쓰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