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허인철 오리온 부회장이 인수합병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신세계그룹에서 굵직한 인수합병을 성공시켜
이명희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허 부회장이 인수합병에 지나치게 조심스럽다는 평가를 받는 오리온의 기조를 바꿔낼지 주목된다.
29일 오리온에 따르면 28일 서울 용산구 오리온 본사에서 국내외 증권사 애널리스트를 대상으로 ‘최고경영자 주관 증권사 간담회’가 열렸다.
간담회에는
허인철 부회장이 직접 나왔다. 그는 프리젠테이션을 맡아 애널리스트를 대상으로 오리온 주요 사업국의 동향과 중장기 전략 등을 발표했다.
오리온에 따르면 허 부회장이 애널리스트 앞에 서서 오리온의 방향성을 직접 설명한 것은 4년 만이다. 허 부회장은 2017년과 2018년에도 이 같은 방식으로 오리온의 미래를 설명했다.
허 부회장이 오랜만에 직접 주관한 데서 오리온이 이번 간담회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짐작이 된다.
그는 우선 오리온의 주요 사업국인 한국과 중국, 베트남, 러시아의 사업 동향을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한국에서는 가격 인상보다는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중국에서는 주요 제품 증량 등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고 하반기부터는 신제품을 늘려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베트남은 기회가 많은 시장으로 꼽았다. 공격적 영업과 신제품 출시로 올해 베트남에서만 매출 4천억 원을 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장기적으로 간편대용식 제품 수출을 통해 베트남 간편대용식시장에 진출하겠다는 청사진도 내놨다.
러시아에서는 애초 5월부터 가동하려고 했던 새 공장을 6월 말부터 운영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전쟁 탓에 일부 글로벌 기업들의 사업 철수가 이뤄지는 것을 기회요인으로 판단하고 이번 기회에 딜러망을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간담회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은 질의응답 시간에 나왔다.
허 부회장은 오리온의 인수합병 계획을 묻는 질문에 “식품사업에 한정해 한국과 중국, 베트남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매물을 살펴보고 있다”고 대답했다.
인수합병에 좀처럼 뛰어들지 않는 기업으로 유명한 오리온의 전략이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오리온은 과거 중국과 러시아, 베트남 등 해외 시장에 진출할 때 직접 법인을 설립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롯데제과와 크라운해태그룹 등이 해외에 진출하며 현지 기업을 인수하며 진출했던 것과 대비된 행보였다.
물론 오리온이 인수합병에 아예 나서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리온은 2015년 비식품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홈플러스 인수전에 뛰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사모펀드에 밀려 인수후보에서 탈락하며 고배를 마셨다.
2016년에는 제주향토기업 제주용암수를 인수하며 글로벌 물시장 진출 전략을 밝혔고 2020년 10월에는 바이오사업 진출을 선언하며 인수합병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여태껏 오리온에 뚜렷한 성과를 가져다준 인수합병 사례는 사실상 없다.
이런 흐름을 살펴보면 허 부회장의 발언은 앞으로 오리온의 인수합병 시계가 빨리 돌아갈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허 부회장의 발언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유통업계에서 유명한 인수합병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허 부회장은 신세계그룹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로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신세계그룹의 성장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인수합병에서 여러 성과를 내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가 신세계 경영지원실장으로 재직하던 2008년 이마트의 월마트코리아 인수작업을 맡아 일주일 만에 협상을 끝내고 한 달 안에 모든 절차를 마무리한 것은 유통업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허 부회장이 주도한 월마트코리아 인수는 이마트가 국내 최대규모의 대형마트로 입지를 다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이 밖에도 신세계 드림익스프레스 매각(2008년), 파주프리미엄아웃렛 부지 매입(2008년), 신세계와 이마트의 인적분할(2011년), 센트럴시티 인수(2012년) 등에 깊숙하게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 부회장은 이런 역량을 인정받아 2012년 말 신세계그룹 정기 임원인사에서 이마트 대표이사 사장에 발탁됐다.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의 각별한 신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인사였다는 평가가 당시 신세계그룹 안팎에서 나왔다.
허 부회장은 이후 2014년 1월 이마트 대표이사에서 돌연 사퇴했다가 자리에서 물러난지 6개월 만인 2014년 7월 오리온 부회장으로 영입됐다.
당시 오리온 이외의 여러 식품기업이 허 부회장에게 러브콜을 보냈을 정도로 그의 역량은 이미 식품업계 안팎에서 두루 인정받고 있다.
오리온이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면서 최초로 부회장 직함을 달아준 인물이 바로 허 부회장이라는 사실도 그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