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리포트 5월] 두산그룹이 신세계그룹에 던지는 힌트, 정용진 '익숙함'과 결별할 때 비로소 산다

▲ 신세계그룹은 2026년 3월16일(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리플렉션AI'와 한국에 국내 최대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짓는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자리에는 정용진 신세계 회장(오른쪽 두번째)과 미샤 라스킨 리플렉션AI CEO(왼쪽 두번째),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가운데)이 참석했다. <신세계그룹>

[비즈니스포스트] 두산그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1896년 종로의 '박승직 상점'에서 출발한 이들의 역사는 무려 130년에 이른다.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강산이 열 번도 더 바뀌었다지만 두산이 여전히 재계의 한 축을 지탱하는 비결은 단 하나. 바로 '지독한 변신'이다.

두산의 변신은 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포목점으로 시작해 해방 후 맥주 사업으로 첫 번째 옷을 갈아입었다. 1990년대 초반 '낙동강 페놀 사건'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선 그룹의 모태와도 같은 소비재 사업을 통째로 도려냈다.

당시 버거킹, KFC, 네슬레 등 일반인에게 친숙한 사업을 모두 매각하고 중공업 기업으로 변신했을 때 세상은 이를 '무모한 도박'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결단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두산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변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2010년대 중반, 친환경 에너지라는 거센 파도가 덮치자 두산은 다시 한번 주력이던 중공업 사업에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룹의 핵심 회사인 두산중공업의 이름을 에너지와 지속가능성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두산에너빌리티'로 바꾼 것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를 파괴해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두산은 다시 한번 기회를 잡고 있다.

두산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냉정하다.

주력 사업을 전환해야 할 '골든타임'을 놓친 기업에 미래는 없으며 살점뿐 아니라 뼈까지 내주는 고통 없이는 진화도 없다는 사실이다.

최근 신세계그룹의 행보를 보면 바로 이 두산그룹의 처절한 변신 DNA가 겹쳐 보인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지난 10년 동안 유통의 전장이 기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격변기를 온몸으로 마주했다.

"오프라인조차 잘하는 온라인 회사"가 되겠다며 SSG닷컴을 키우고, 3조4천억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G마켓을 인수할 때만 해도 그의 시선은 이커머스 패권을 어떻게 장악하느냐에 고정돼 있었다.

그러나 시장은 예상보다 훨씬 냉혹했다. 무려 3370만 계정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건으로 난리가 난 와중에도 고객들이 다시 쿠팡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실은 유통의 문법이 이미 바뀌었음을 시사한다.

재계 순위 9위인 신세계그룹의 수장으로서 정 회장이 느꼈을 고뇌는 이 지점에서 깊어졌을 것이다.

너무나 익숙한 유통 전쟁터에서 소모적인 물량공세를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판 자체를 뒤흔들 새로운 엔진을 장착할 것인가.

정 회장의 선택은 후자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인공지능(AI)이 있다.

지난해 말 백악관 인사들과 만나 미국의 AI 전략을 살피고 온 정 회장의 행보는 단순한 견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통이라는 낡은 외피를 벗고 '테크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그 연장선에서 3월 발표한 국내 최대 규모의 AI 데이터센터 구축 청사진은 신세계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정 회장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다.

물론 내부의 당혹감도 적지 않다. "유통 회사가 왜 AI냐"는 의구심부터 10조 원대로 추정되는 천문학적 투자비에 대한 염려까지 리스크는 도처에 널려 있다.

하지만 정 회장은 "AI 없는 미래 산업은 생존할 수 없다"며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 체질을 바꾸겠다는 이 승부수의 끝이 어떻게 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역사는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위기의 순간, 가장 익숙한 성공 방정식을 미련 없이 버리고 가장 낯선 미래를 껴안은 기업만이 세기를 건너 살아남았다는 것을 말이다.

실행의 몫은 이제 정 회장에게 넘어갔다.

두산이 '에너빌리티'로 거듭나며 생명을 연장했듯, 신세계그룹의 AI 데이터센터가 훗날 그룹의 100년을 책임질 신수종 사업의 거대한 뿌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남희헌 유통&4차산업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