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에는 특정 인물을 재현하는 수준이 인류학자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사진은 이수지씨가 연기하는 모습. <유튜브 채널 ‘핫이슈지’ 캡쳐>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최근 ‘딸과 함께 봄을 걷다! 황정자 씨의 따뜻한 외출’이라는 영상이 올라왔다. 이수지가 직접 엄마 황정자로 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잠시 귀국한 막내딸과의 봄나들이를 담았다.
딸이 예약해둔 레스토랑 대신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내 들고, 카페에서는 "안 시켜도 돼, 물이면 돼"를 반복하고, 디저트를 한 입 먹고는 “어우 달다”를 연발한다.
그렇게 하루종일 모녀는 실랑이를 한다. 영상 마지막에 엄마는 말한다. “나는 오늘 우리 딸만 보였어.” 댓글창에는 “우리 엄마인 줄 알았네”가 수없이 달린다.
이 영상이 포착한 장면은 낯설지 않다. 영상에서는 훈훈한 마무리로 끝났지만, 받으려 하지 않고, 받아도 절대로 좋다고 하지 않으면서, 그렇지만 정말로 안 해주면 서운해하는 엄마들은 실재한다.
그 앞에서 어떻게 해도 정답을 모르겠다는 딸들의 이야기가 댓글 성토대회로 이어진 것은 그래서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묻는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엄마로서 수십 년간 주는 역할만 해온 사람에게, 딸에게 무언가를 받는 자리는 낯선 경험이다. 돌보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자아의 중심을 이루고 있을 때, 받는 위치에 서는 순간 어색함과 불안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정말로 싫은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날 저녁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딸이 이런 곳에 데려가줬다고 자랑을 했을지 모른다. 호의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는 밀어내지만, 나중에 다른 이에게 자랑하는 방식으로 뒤늦게 그것을 받는 셈이다. 이것이 많은 이들에게 체화된 호의를 우회하여 수신하는 방식이다.
딸 쪽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안 시켜도 된다”는 말을 믿으면 나중에 서운해하고, 억지로 시켜주면 "어우 달다"가 돌아온다. 엄마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딸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도 정답이 없는 이중 메시지가 된다.
그래서 딸은 현장의 언어 대신 그 이면을 읽어내야 하고, 지금의 반응 대신 나중의 자랑을 미리 계산해야 한다. 이 번역 노동은 때로는 소진을 불러오기도 한다.
댓글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나는 저런 엄마가 싫었는데, 이제 내가 그러네요.” 주는 역할이 오래 지속되면 그것이 자아의 구조가 된다. 받는 것이 불편한 몸이 되고 기쁨을 우회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익숙해지는 일은 나도 모르게 일어날 수 있다.
가정의 달 5월이면 어김없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식사 자리와 선물로 표현되는 감사의 언어들 너머, 실제 가족 사이에서 오가는 것들은 훨씬 복잡하다.
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엄마의 이면을 읽어내고 나중의 자랑을 미리 계산하는 수고를 조금 내려놓아도 된다. 물론 엄마가 끝내 “맛있었어”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날 저녁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랑이 엄마의 방식이라는 걸 이해하는 것과 현장에서의 거절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번역을 계속하고, 이면을 읽어내고, 그래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감각이 쌓이면 딸 안에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생긴다. 그 상태에서 계속 주려 하면, 결국 딸 역시 받는 법을 잃어가게 된다. 그러니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그 누구든 소진되지 않아야, 소중한 사람의 곁에 더 오래 머물 수 있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 석사를 수료했다. 광화문에서 진료하면서, 개인이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책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언니의 상담실', '출근길 심리학'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