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원자력은 인류에게도, 주식시장의 투자자에게도 난제였다. 환경과 지속 가능성이 효율로 중무장한 자본에 균열을 낸 뒤, 원전(원자력발전)을 대놓고 옹호하긴 어려웠다. 원자력엔 히로시마와 체르노빌의 악몽이 겹친다. 폭탄 투하와 발전소 사고의 후유증은 문명사의 깊은 흠집이다.
원자력을 에너지 대안으로 내밀기엔 찝찝한 구석이 많아, 원전 산업은 추세적 하향의 운명을 감수했다. 기왕의 원전 기업들도 사업의 다변화를 숙명으로 알았다. 그런데 최근 몇 달 새 상황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원전의 효율 외엔 말하지 않는다. 2025년 중반에 원전은 절대 선(善), 원전 관련주는 일단 사고 보는 주식이다.
인공지능(AI)으로 인해 생긴 일이다. AI를 돌리려면 무지막지한 전력이 필요하다. 지금 수준의 친환경 발전 기술론 감당할 수 없다. 석탄을 더 세게 때자고 할 수도 없다. 선진국들이 합의해 자본주의를 지연시키자고 결정할 게 아니라면, 유일한 대안은 원전이다. 원자력의 잠재적 위험에 관한 얘기는 한담이 됐다.
그런 이유로 좌고우면 없이 치솟기만 하는 원전 주가의 근원을 좇아가면 AI가 나타난다.
그런데 현재 수준의 AI를 가능하게 한 게 무엇일까. 지금 우리 곁의 AI는 이세돌과 대결하기 위해 죽어라 바둑 기보를 외던 알파고가 아니다. 최소한의 규칙과 방법만 알려주면 자기들끼리 대국하며 스스로 바둑 신(神)의 경지에 다다르는 게 요즘 AI다. 그런 초인적 AI의 위력을 좇아가면 이번엔 그래픽처리장치(GPU)가 나타난다.
‘고전적’ 컴퓨터의 지능은 GPU가 아니라 중앙처리장치(CPU)가 관장한다. CPU는 몇 개의 머리 좋은 코어(core, 핵심 또는 중추)를 가지고 컴퓨터의 운용과 실행을 ‘중앙’에서 총괄한다.
그런데 그저 그래픽의 질을 높이려고 만들어진 GPU는 그런 초월적 ‘중앙’이 필요하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코어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게 중요했다.
GPU의 코어들엔 중앙과 변방의 위계가 없다. CPU가 지휘자라면, GPU는 오케스트라다. CPU가 셰프라면, GPU는 보조 요리사들이다. CPU가 뇌라면, GPU는 몸 이곳저곳에 흩어진 근육이다.
홀로 똑똑한 지휘자와 셰프와 뇌가 중요한지, 여럿이 열심인 연주자들과 보조 요리사들과 근육들이 중요한지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달리 판단할 일이지만, 최첨단의 인류사 적어도 과학기술사는 ‘여럿이 열심’인 주체들의 손을 들어줬다. 그리고 여럿이 열심인 연주자들과 요리사들이 너무도 열심인 덕에, 문명이 열린 후 최대 수준의 에너지(전력)를 필요로 하게 됐다.
50년 전(정확히는 1976년)에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리좀:서론》이란 기묘한 이름의 논문을 발표했다. 리좀(rhizome)은 식물이 땅속에서 만드는 줄기다. 대나무 같은 일군의 식물들은 땅속에 줄기를 흩어 놓는다.
리좀, 즉 뿌리줄기는 지상의 줄기처럼 식물의 중추를 자처하지 않는다. 무질서하게 땅속을 헤맨다. 그러다 열매 비슷한 걸 맺기도 한다. 생강, 토란이 그런 것들이다.
들리즈(와 가타리)는 중심을 결여한 리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전통적 사유를 전복하려 했다.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코어’ 없는 현대사회의 네트워크를 인문학적으로 예언한 셈도 됐다. 4년 후인 1980년, 두 사람은 이제는 고전이 된 《천 개의 고원》에 리좀 논문을 서론으로 넣으면서 세계를 열광시킨다.
《천 개의 고원》이 나오고 10년이 지난 90년대의 초입, 이른바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www)이 등장한다. 들뢰즈가 꺼내든 리좀 개념의 세속적이면서 기술적인 구현이었다. 그런데 리좀의 탄생 후 50년간의 세월을 조망하다보니, 리좀의 확산을 새로운 사유와 네트워크의 창출 또는 발견에만 국한할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월드와이드웹을 먼 근원으로 갖는 스마트폰, 유튜브, 온갖 SNS에 관한 얘기 정도가 아니다. 2008~2009년엔 블록체인이 등장했다. 유일한 족보 같은 게 없어도 다양한 장부(블록)들의 신뢰성이 보장된다. GPU의 숱한 코어들이 그러하듯, 중앙과 변방을 가리지 않는 주체들이 특정 블록을 교차로 인증하니 가능한 일이다.
리좀, 월드와이드웹, 블록체인 그리고 GPU는 대략 50년에 걸쳐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사유와 실천에서 ‘중앙집권’이라 할 만한 것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있는 중이다. 리좀이 철학적 탈중앙화를 꿈꾸었다면, 월드와이드웹은 정보 측면에서, 블록체인은 금융기술 차원에서, GPU는 사유(인공지능)의 전반에 걸쳐 탈중앙화를 확장시켰다.
이들은 구시대의 제국주의와도 같아서, 누구라도 ‘중심’과 ‘중앙’을 주장하는 걸 가만 둘 기세가 아니다.
어찌하다 보니 길어진 장광설을 황급히 매듭짓자면 대강 이런 얘기가 된다. 우리 시대의 GPU는 AI를 거쳐 위기의 원전을 구하고 원전 주가를 격상시킨 것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들을 탈중앙화하려 한단 것이다.
이런 변방의 전성시대, 소외된 것들의 기념비적 복권기(期)에 누구라도 단 하나의 기준, 유일한 원칙, 자기 제일주의를 내세우려 한다면 그건 우매한 폭거일 뿐이겠다. 그런 사람들이 몇몇 있기에 하는 소리다. 이지형 금융증권부장(부국장)
원자력을 에너지 대안으로 내밀기엔 찝찝한 구석이 많아, 원전 산업은 추세적 하향의 운명을 감수했다. 기왕의 원전 기업들도 사업의 다변화를 숙명으로 알았다. 그런데 최근 몇 달 새 상황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원전의 효율 외엔 말하지 않는다. 2025년 중반에 원전은 절대 선(善), 원전 관련주는 일단 사고 보는 주식이다.
![[데스크리포트 6월] GPU, 그래픽처리장치가 바꾸는 세상 풍경](https://www.businesspost.co.kr/news/photo/202506/20250610225043_172527.jpg)
▲ GPU는 세상의 모든 '중앙'을 몰아내려는 듯, AI를 통해 자신의 영토를 넓히는 중이다. 사진은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한 개발자 행사에서 GPU로 구성된 HGX 아키텍처를 소개하고 있는 모습이다. <연합뉴스>
인공지능(AI)으로 인해 생긴 일이다. AI를 돌리려면 무지막지한 전력이 필요하다. 지금 수준의 친환경 발전 기술론 감당할 수 없다. 석탄을 더 세게 때자고 할 수도 없다. 선진국들이 합의해 자본주의를 지연시키자고 결정할 게 아니라면, 유일한 대안은 원전이다. 원자력의 잠재적 위험에 관한 얘기는 한담이 됐다.
그런 이유로 좌고우면 없이 치솟기만 하는 원전 주가의 근원을 좇아가면 AI가 나타난다.
그런데 현재 수준의 AI를 가능하게 한 게 무엇일까. 지금 우리 곁의 AI는 이세돌과 대결하기 위해 죽어라 바둑 기보를 외던 알파고가 아니다. 최소한의 규칙과 방법만 알려주면 자기들끼리 대국하며 스스로 바둑 신(神)의 경지에 다다르는 게 요즘 AI다. 그런 초인적 AI의 위력을 좇아가면 이번엔 그래픽처리장치(GPU)가 나타난다.
‘고전적’ 컴퓨터의 지능은 GPU가 아니라 중앙처리장치(CPU)가 관장한다. CPU는 몇 개의 머리 좋은 코어(core, 핵심 또는 중추)를 가지고 컴퓨터의 운용과 실행을 ‘중앙’에서 총괄한다.
그런데 그저 그래픽의 질을 높이려고 만들어진 GPU는 그런 초월적 ‘중앙’이 필요하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코어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게 중요했다.
GPU의 코어들엔 중앙과 변방의 위계가 없다. CPU가 지휘자라면, GPU는 오케스트라다. CPU가 셰프라면, GPU는 보조 요리사들이다. CPU가 뇌라면, GPU는 몸 이곳저곳에 흩어진 근육이다.
홀로 똑똑한 지휘자와 셰프와 뇌가 중요한지, 여럿이 열심인 연주자들과 보조 요리사들과 근육들이 중요한지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달리 판단할 일이지만, 최첨단의 인류사 적어도 과학기술사는 ‘여럿이 열심’인 주체들의 손을 들어줬다. 그리고 여럿이 열심인 연주자들과 요리사들이 너무도 열심인 덕에, 문명이 열린 후 최대 수준의 에너지(전력)를 필요로 하게 됐다.
50년 전(정확히는 1976년)에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리좀:서론》이란 기묘한 이름의 논문을 발표했다. 리좀(rhizome)은 식물이 땅속에서 만드는 줄기다. 대나무 같은 일군의 식물들은 땅속에 줄기를 흩어 놓는다.
리좀, 즉 뿌리줄기는 지상의 줄기처럼 식물의 중추를 자처하지 않는다. 무질서하게 땅속을 헤맨다. 그러다 열매 비슷한 걸 맺기도 한다. 생강, 토란이 그런 것들이다.
들리즈(와 가타리)는 중심을 결여한 리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전통적 사유를 전복하려 했다.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코어’ 없는 현대사회의 네트워크를 인문학적으로 예언한 셈도 됐다. 4년 후인 1980년, 두 사람은 이제는 고전이 된 《천 개의 고원》에 리좀 논문을 서론으로 넣으면서 세계를 열광시킨다.
《천 개의 고원》이 나오고 10년이 지난 90년대의 초입, 이른바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www)이 등장한다. 들뢰즈가 꺼내든 리좀 개념의 세속적이면서 기술적인 구현이었다. 그런데 리좀의 탄생 후 50년간의 세월을 조망하다보니, 리좀의 확산을 새로운 사유와 네트워크의 창출 또는 발견에만 국한할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월드와이드웹을 먼 근원으로 갖는 스마트폰, 유튜브, 온갖 SNS에 관한 얘기 정도가 아니다. 2008~2009년엔 블록체인이 등장했다. 유일한 족보 같은 게 없어도 다양한 장부(블록)들의 신뢰성이 보장된다. GPU의 숱한 코어들이 그러하듯, 중앙과 변방을 가리지 않는 주체들이 특정 블록을 교차로 인증하니 가능한 일이다.
리좀, 월드와이드웹, 블록체인 그리고 GPU는 대략 50년에 걸쳐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사유와 실천에서 ‘중앙집권’이라 할 만한 것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있는 중이다. 리좀이 철학적 탈중앙화를 꿈꾸었다면, 월드와이드웹은 정보 측면에서, 블록체인은 금융기술 차원에서, GPU는 사유(인공지능)의 전반에 걸쳐 탈중앙화를 확장시켰다.
이들은 구시대의 제국주의와도 같아서, 누구라도 ‘중심’과 ‘중앙’을 주장하는 걸 가만 둘 기세가 아니다.
어찌하다 보니 길어진 장광설을 황급히 매듭짓자면 대강 이런 얘기가 된다. 우리 시대의 GPU는 AI를 거쳐 위기의 원전을 구하고 원전 주가를 격상시킨 것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들을 탈중앙화하려 한단 것이다.
이런 변방의 전성시대, 소외된 것들의 기념비적 복권기(期)에 누구라도 단 하나의 기준, 유일한 원칙, 자기 제일주의를 내세우려 한다면 그건 우매한 폭거일 뿐이겠다. 그런 사람들이 몇몇 있기에 하는 소리다. 이지형 금융증권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