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당선에 성공하면서 반도체지원법(칩스법) 폐지 또는 설비투자 보조금 대폭 축소가 예상되고 있다.
이에 따라 반도체 설비투자 보조금을 받기로 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업계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게다가 차기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반도체 기업 전폭적 지원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는 마이크론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에서는 인텔이 그 대상이 될 전망이다.
대중국 첨단 반도체 규제도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중국 D램 등 레거시 반도체까지 관세를 대폭 인상하는 등 트럼프의 대중국 반도체 규제가 한국 반도체 업계에 반사이익 가져다 줄 수도 있다고 예측하고 있지만, 트럼프의 자국 반도체 기업 살리기 정책방향에 따라 오히려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일본 닛케이아시아는 7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에 미국이 ‘반도체법’에 따라 지급하기로 약속한 설비투자 보조금과 기타 인센티브는 아직 예비 단계일 뿐이며, 트럼프 행정부가 조건을 변경하고 혜택 가운데 일부를 철회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는 칩스법에 부정적이다. 그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칩스법은 아주 나쁜 법”이라며 “(해외 기업의 반도체 공장 건설에 보조금을 주는 대신) 수입 반도체 관세를 인상해 해외 기업들이 스스로 미국에 공장을 짓도록 압력을 가하겠다”고 말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6일(현지시각) 미국 플로리다 팜비치 카운티컨벤션센터에서 지지자들의 호응에 응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 지금까지 미국의 반도체 지원금을 수령한 기업은 미국 ‘폴라 반도체’ 단 한 곳뿐이다. 로이터가 이날 대만의 TSMC와 미국 글로벌파운드리가 지원금 수령의 마지막 문턱을 넘었다고 보도했지만, 미국 상무부 대변인은 “수령이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고 부인했다.
워싱턴의 싱크탱크인 정보기술혁신재단(ITIF) 회장인 롭 앳킨슨은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 지원금을 지급하지 않은 근본적 실수를 저질렀다”며 “차기 정권에 돈을 쓰지 않을 선택권을 줘버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지원금과 세제 혜택을 포함해 총 64억 달러(약 9조 원)를 받기로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텍사스주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고 있으며, 추가 투자도 계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SK하이닉스는 미국 주정부로부터 4억5천만 달러(약 6200억 원)의 보조금을 받기로 했지만, 아직 미국 반도체 공장 투자를 확정하진 않아, 앞으로 트럼프 정부의 정책 변경 내용을 확인한 뒤 투자 철회 등의 입장을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산업연구원 TV 캡쳐>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양사 모두 투자 계획 조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며 “삼성전자는 약속했던 것을 전부 받기는 어려워 보이며, SK하이닉스는 상황을 봐가며 미국 투자를 철회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칩스법 폐지까지는 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의 텍사스주 공장과 TSMC의 애리조나 공장 등 많은 건설투자 프로젝트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주에서 진행되고 있는 데다, 지원금은 이미 의회에서 책정돼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신 지원금 수령 조건을 까다롭게 하고, 지급을 늦추는 방안이 검토될 가능성이 나온다. 앳킨슨 회장은 트럼프가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반도체 지원금 지급을 제한하거나 늦출 것으로 내다봤다.
트럼프가 추진하는 자국 반도체 기업 육성 정책 역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는 SK하이닉스가 선두를 달리고 있는 HBM을 키우기 위해 자국 마이크론, TSMC와 삼성전자가 주도하는 파운드리 산업을 위해선 인텔에 전폭적 자금을 지원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인텔은 ‘미국 기업’으로서 혜택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텔 대변인은 비즈니스인사이더와 통화에서 “최첨단 칩을 설계하고 제조하는 ‘유일한 미국 회사’로서 인텔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트럼프 행정부와 협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인텔은 최근 18A(1.8나노) 파운드리 공정 개발을 내년까지 완료한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TSMC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공정 기술 속도다.
인텔이 선제적으로 18A 기술 개발에 성공해도 수율(완성품 비율)과 상품성 확보 등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반도체 육성을 위해 인텔 지원을 늘릴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에 이어 5세대 HBM, HBM3E의 엔비디아 인증을 완료한 마이크론은 대규모 생산시설 확충에 나섰다. 마이크론은 최근 D램 생산을 늘리기 위해 대만 AUO의 2개 공장을 인수했고, 중국 시안과 미국 뉴욕, 아이다호에 추가로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다.
▲ 트럼프의 대중 반도체 규제 강화로 한국 반도체가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란 주장과 중국의 반도체 원자재 수출 금지 조치로 오히려 피해를 볼 것이란 엇갈린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트럼프는 대중국 반도체 규제도 더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들은 한국의 반사이익 가능성과 오히려 피해를 볼 것이란 엇갈린 관측을 내놓고 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가 중국이 최근 생산을 늘리는 DDR4 등 ‘레거시 D램’ 분야까지 규제를 확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바이든 정부가 첨단 반도체만 제재했던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조치다. 이에 따라 중국 레거시 D램 판매 축소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일부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관측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트럼프 제재에 맞선 중국의 반도체 원자재 수출 금지 조치로 한국 반도체가 ‘새우등’ 터지는 상황에 놓일 것이란 주장도 제기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실리콘, 희토류, 텅스텐, 게르마늄, 형석, 갈륨·인듐 등 반도체 6대 핵심 원자료 가운데 5개를 중국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 특히 실리콘 중국 의존도는 2022년 68.8%에서 2023년 75.4%로, 게르마늄의 의존도는 56.9%에서 74.3%로 급격히 높아졌다.
양주영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향후 중국이 자원을 무기화해 글로벌 공급망이 불안정해진다면, 국내 기업들의 대체 비용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