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 고어 20년 만에 애플 이사회 떠난다, ‘기후변화 대응 모범기업’ 등극에 기여 

▲ 두바이에서 열린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 2023년 12월3일 아랍에미리트 참석해 AP통신과 인터뷰하고 있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1948년생인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고령을 이유로 애플 이사회에서 물러난다. 2003년 애플 이사회에 합류한 뒤 21년 만이다.

세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는 고어 전 부통령은 애플에서도 환경과 기후문제에 주로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1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과 CNN 등 주요 외신들은 75세 나이의 고어 전 부통령이 애플 이사회에서 퇴임한다는 소식을 일제히 전했다. 오는 2월28일 열릴 주주총회에서 안건이 확정되면 공식적으로 자리에서 내려온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애플은 75세 이상의 인물을 이사회 멤버로 재선시키지 않는 회사 정책을 갖고 있다. 

고어 전 부통령은 시가총액 1위인 애플을 기후변화 대응에도 모범기업으로 등극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호평 속에 퇴임을 맞이 한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공식 성명을 통해 “앨 고어 이사는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환경 및 기후문제와 관련한 방대한 지식으로 애플에 상당히 공헌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애플은 고어 전 부통령처럼 75세인 론 슈가 감사위원회 위원장에게는 이사회에 남아 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의 생일은 고작 4개월 차이다. 

이에 고어 전 부통령이 고령 외 다른 이유로 이사회에서 빠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고어 전 부통령은 외부에는 기후변화 대응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투자를 통해선 사익을 추구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 기업윤리 감시단체인 국가법률정책센터(NLPC)는 2023년 2월 애플의 주주들에게 고어 전 부통령의 이사 연임에 반대표를 던질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가 회장직을 맡고 있던 투자회사가 운용자금 264억 달러(약 34조6883억 원) 가운데 절반가량을 온실가스 다배출 업체들에 투자한다는 이유였다. 

고어 전 대통령이 애플의 주식 46만8955주를 들고 있다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자료도 확인된다. 11일 종가 기준 모두 8703만 달러(약 1143억3087만 원) 어치다.

팀 쿡 CEO가 공식성명에서 고어 전 대통령의 기여도를 특별히 강조한 배경도 지난해에 불거졌던 논란을 의식한 것일 수 있다.  
 
앨 고어 20년 만에 애플 이사회 떠난다, ‘기후변화 대응 모범기업’ 등극에 기여 

▲ 중국 쓰촨성에 위치한 태양광 발전설비. 애플에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가 재생에너지로 전력을 충당하기 위해 해당 설비를 구축하고 태양광 발전을 하고 있다. < Apple >

논란과는 무관히 그가 애플의 기후 대응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애플이 기후변화 대응 우수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는 데에는 장기간 이사회에 자리했던 고어 전 부통령의 역할이 컸다. 

그는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가 CEO를 맡고 있던 20여 년 전부터 애플에 환경 중심의 경영활동을 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애플이 재생에너지 활용 비중과 목표, 폐기물 감축과 재활용 등 성과가 전 세계 최고수준으로 꼽히는 이유에는 고어 전 대통령의 조언이 한몫 했다는 평가다. 

애플은 2030년까지 회사가 제조하는 모든 기기에 넷제로(온실가스 순배출량 ‘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2023년 9월 출시된 애플워치 9 시리즈가 넷제로 제품이라고 홍보됐다. 

애플은 협력사의 공급망에까지 넷제로와 RE100(재생에너지 사용량 100%) 목표를 세우도록 설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이자 애플의 최대 협력사인 TSMC도 예외가 아니다. TSMC가 RE100 목표 달성 시기를 기존의 2050년에서 2040년으로 10년 당긴 데에도 애플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추측이 나왔다. 

팀 쿡은 2023년 4월5일 발표한 그린본드 임팩트 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전 세계 파트너들과 함께 글로벌 공급망에 재생 에너지를 더욱 확대하고 차세대 친환경 기술에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에는 아이폰의 카메라 모듈과 모바일용 메모리 반도체 등을 각각 애플에 납품하는 LG이노텍과 SK하이닉스가 친환경 에너지 사용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고어 전 대통령이 애플을 넘어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애플 협력사들에도 환경과 관련한 영향력을 미친 셈이다. 

앨 고어는 1977년 민주당 하원의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상하원에서 모두 6선 의원을 역임한 뒤 1993년부터 2001년까지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부통령직을 수행했다. 

부통령직을 물러난 뒤부터 본격적으로 지구온난화 등 기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가 2006년을 전후로 전 세계에서 1천 회 이상의 순회강연을 돌며 기후위기를 알린 사실은 아직까지 꾸준히 회자될 정도로 파급력이 상당했다. 당시 강연들을 묶어 2006년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환경 운동가로서 노력을 인정받아 2007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애플 이사회에서 퇴임한 뒤에도 그의 환경 노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가 2020년 공동 설립한 ‘클라이밋 트레이스(기후 추적)’라는 비영리단체를 통해서다. 

클라이밋 트레이스는 인공위성을 활용해 철강 및 알루미늄을 제조하는 공장과 발전소 등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집계하는 단체다. 

세계 1위 전기차 기업인 테슬라를 비롯해 GM과 보잉 등 글로벌 기업들이 이 단체와 협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고어 전 부통령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열린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 참석해 “클라이밋 트레이스는 온실효과 배출량을 정확히 집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라고 설명했다. 

애플을 떠나는 그의 행보를 여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이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