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제54차 파리에어쇼에 지속가능항공유(SAF)를 공급하기 위해 배치된 토탈에너지스 소유 유조차.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미국 정부가 자국에서 발생하는 항공유 수요를 100% 지속가능항공유로 대체한다는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관련 산업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을 항공유 최대 수출국으로 두고 있는 한국 정유사들은 국내법상 지속가능항공유 생산을 할 수 없어 수요에 곧바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20일(현지시각) 로이터에 따르면 핀란드 정유 대기업 네스테는 바이오연료 정제설비 증축에 25억 유로(약 3조5680억 원)를 추가로 투자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네스테는 이번 투자를 통해 2026년까지 연간 680만 톤을 목표로 하던 바이오연료 생산량을 2030년 980만 톤까지 늘리겠다고 밝혔다.
매티 레흐무스 네스테 최고경영자(CEO)는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이번에 증산하는 300만 톤의 바이오연료 가운데 절반은 지속가능항공유 수요 증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속가능항공유는 원유 대신 동물과 식물성 기름, 옥수수 등 바이오연료를 활용해 생산되는 항공유다. 석유 기반 항공유와 비교해 생산 과정에서 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이는 효과가 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항공업계 온실가스 배출 규제로 지속가능항공유 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다.
미국 정부는 2022년 9월 에너지부와 환경보호청 등 정부 기관들이 함께 내놓은 '지속가능항공유 그랜드 챌린지 로드맵'을 통해 2050년까지 자국 항공유 수요의 100%를 지속가능항공유로 대체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런 계획에 따라 2030년까지 자국 내 지속가능항공유 생산량을 연간 30억 갤런(약 1135만 톤)까지 확대하고 2050년까지 350억 갤런(약 1억3천만 톤)으로 늘리기로 했다.
델타항공, 유나이티드항공 등 미국의 메이저 항공사들은 2021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해 2030년까지 자사 항공기 연료 가운데 10%를 지속가능항공유로 대체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세제혜택을 제공하며 에너지기업들의 지속가능항공유 생산 확대를 유도하고 있다.
현재 미국 정부는 석유 기반 항공유와 비교해 생산 과정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을 50% 이상 절감한 지속가능항공유에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감축량 기준을 초과할수록 세액공제 액수도 늘어난다.
현지시각으로 15일부터 에탄올 기반 지속가능항공유도 지원 대상에 새로 포함됐다. 미국 정부가 지속가능항공유 시장을 키우는 과정에서 자국 기업들에 혜택을 주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 11월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 앞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국제공항에서 에어버스 A380-800기 한 대가 지속가능항공유 실증 비행을 준비하고 있다. |
미국이 이처럼 항공유 수요를 자국 내에서 생산된 지속가능항공유로 대체하는 데 속도를 낸다면 한국 정유사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 정유사들의 전체 항공유 수출에서 미국시장 비중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한국석유공사 페트로넷에 따르면 미국은 2022년 한국에서 항공유 약 3145만 배럴을 수입했다. 이는 한국의 전체 항공유 수출량 가운데 약 38%를 차지해 수출대상국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미국의 수요 변화에 대응해 한국 정유사들이 곧바로 지속가능항공유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방안도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현행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사업법에 따라 한국 정유사들이 석유를 원료로 하는 항공유 대신 바이오연료 기반의 지속가능항공유 생산 설비를 갖추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 정유4사는 본격적으로 지속가능항공유 시장 성장에 대응하겠다는 목표를 두고 올해 중순에 규제 샌드박스를 신청한 뒤 법령 개정에 대비해 바이오연료 생산 준비를 갖춰내고 있다.
규제 샌드박스는 사업자가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시장에 정식으로 출시하기 전 시험하고 검증할 수 있도록 현행법에 명시된 규제의 전부나 일부를 적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한국 정유사들이 바이오연료 생산을 본격화할 수 있도록 법 자체를 개정하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11월에 친환경 정제원료 사용 근거 마련과 석유대체연료 범위 확대 등을 골자로 한 석유사업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법령 개정은 내년에 추진된다.
HD현대오일뱅크는 바이오연료 관련법 개정에 대비하며 올해 안에 대산공장에 연산 13만 톤 수준의 바이오디젤 설비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두고 있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해당 설비는 시험 가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올해 연말부터 내년 초 사이 생산을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GS칼텍스는 9월부터 대한항공과 협업해 지속가능항공유 실증 운항을 진행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도 자회사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을 통해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한 뒤 바이오연료 생산 기술을 보유한 대경오앤티 지분을 인수하며 사업화를 준비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바이오연료와 관련한 국내법이 개정되는 대로 신속하게 정유사에 세액공제 등 혜택을 제공할 것이라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이호현 산업부 에너지정책실장은 18일 '2023 석유 컨퍼런스'에 참석해 "정부가 석유사업법령 개정과 신재생연료혼합의무화제도(RFS) 비율 상향과 같은 제도적 지원 및 세액공제 등 인센티브 마련을 통해 친환경 연료 투자를 가속화할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손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