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재단 ‘장혜선 체제’ 출범, 18년 만의 행보에 신영자·롯데 OB들 힘 실었다

▲ 롯데재단이 18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서울에서 송년회를 열었다. 왼쪽부터 이철우 전 롯데쇼핑 대표, 신영자 롯데재단 의장, 장혜선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겸 롯데삼동복지재단 이사장, 이종찬 광복회 회장. <비즈니스포스트>

[비즈니스포스트] 12월18일 저녁.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서울 2층 에메랄드홀에서 보기 드문 행사가 열렸다.

롯데재단이 준비한 연말 맞이 송년회 ‘미래와 함께’가 그 주인공이다. 롯데그룹 계열사 전현직 대표들뿐 아니라 재단 파트너 기관인 국내 주요 대학 및 주요 단체 관계자, 해외 대사, 재단의 도움을 받은 국내외 장학생 등이 두루 초청된 자리였다.

롯데재단이 공개적 자리에 언론인까지 불러 송년회를 대대적으로 연 것은 최근 10년 사이 처음 있는 일로 파악된다. 그만큼 내부적으로 많은 준비를 한 행사라는 의미다.

이승훈 롯데재단 이사장이 공을 많이 들여 준비한 행사라는 후문을 운 좋게 들을 수 있었다.

올해 롯데삼동복지재단,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에 연달아 취임한 장혜선 이사장의 새 출발에 힘을 싣기 위해 이 이사장이 이러한 행사를 직접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롯데재단의 한 고문은 말했다. 장 이사장은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의 외손녀이자 신영자 롯데재단 의장의 딸이다.

실제로 롯데재단의 송년회는 장혜선 이사장의 새 출발을 기념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장 이사장은 이날 행사에서 취임사를 했다. 롯데삼동복지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지 약 넉 달,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에 오른 지 약 3주 만이다. 취임 뒤 상당한 시간이 지나 취임사를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날 행사는 사실상 롯데재단이 ‘장혜선 체제’를 본격화한다는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장 이사장은 “경기가 어려운 시기인 만큼 우리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경쟁보다는 격려를 통해 발전하는 사회, 타인의 어려움을 조금 더 이해하는 사회를 꿈꿔본다”고 취임사를 시작했다.

그는 이어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웃을 향한 베풂에 저희가 작은 불씨가 되는 것이다”며 “앞으로도 여러분들도 저와 한 마음으로 같이 해주시기 바라며 저도 함께 현장에서 제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덧붙였다.

장 이사장의 취임사만큼이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신영자 롯데재단 의장이 행사에 참석했다는 사실이었다. 신 의장은 2018년경 롯데복지재단·롯데장학재단·롯데삼동복지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 롯데그룹의 공식 행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신영자 의장의 외부 행보가 잦아지고 있다.

신 의장은 9월 서울 잠실 롯데월드에서 열린 ‘2023년 추석 맞이 다문화가정 및 스리랑카 이주노동자 롯데월드초청’ 행사에 모습을 보였다. 장혜선 이사장이 롯데삼동복지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당시에도 신 의장이 공식 행보에 나선 사실이 주목받았는데 18일 열린 롯데재단 주관 송년행사에까지 직접 참석한 것은 사실상 자신의 딸인 장혜선 이사장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장 이사장은 롯데그룹 오너3세이지만 사실 그동안 롯데그룹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 신영자 의장이 개인적으로 추진한 화장품사업을 담당하는 회사 대표만 맡았을 뿐이다.

2005년을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18년 뒤인 올해가 돼서야 공식 행보를 시작하다보니 롯데그룹 내외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롯데재단이 신영자 의장에게 ‘의장’이라는 직함을 부여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신 의장은 현재 롯데재단 측에서 공식적인 직책을 전혀 맡고 있지 않다.

하지만 과거 롯데재단과 롯데장학재단, 롯데삼동복지재단의 이사장을 오랜 기간 맡았다는 차원에서 롯데재단이 그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의장이라는 직함을 만들었다는 것이 재단 관계자의 얘기다.

롯데재단에서 ‘큰어머니’와 같은 존재감을 가진 신 의장을 예우함으로써 그의 딸인 장혜선 이사장이 입지를 탄탄히 다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모양새다.

신 의장은 실제로 송년회 만찬시간 때 각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참석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의 곁에는 대부분 장혜선 이사장이 함께 있었는데 딸의 재단 내 행보를 지지해주고 응원해달라는 뜻으로 읽혔다.

롯데그룹 계열사 대표를 지낸 인물들이 송년회에 모습을 대거 드러냈다는 사실도 눈길을 끌었다.

이철우 롯데쇼핑 전 대표뿐 아니라 김명규 롯데주류 전 대표 등 2000년대 말부터 2010년대 초중반까지 롯데그룹 계열사나 해외법인 대표 등을 지낸 인물 수십 명이 행사에 대거 참석했다. 롯데그룹의 주요 인물들을 초청함으로써 재단의 새 출발에 든든한 우군을 얻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롯데재단 ‘장혜선 체제’ 출범, 18년 만의 행보에 신영자·롯데 OB들 힘 실었다

▲ 장혜선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 18일 저녁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서울에서 열린 롯데재단 송년의밤 행사에서 취임사를 통해 사회공헌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비즈니스포스트>

장 이사장은 취임사에서 “롯데를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귀하신 오비(OB)분들게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돼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저는 앞으로도 오비분들과 함께 나아갈 생각이며 여러분들도 저희를 가족처럼 생각해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철우 전 대표는 롯데재단의 행보를 힘차게 격려했다.

그는 건배사를 통해 “꽃 향기는 백리를 가고 잘 익은 술의 향기는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는데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며 “롯데재단이 인간을 위해서 아름다운 일을 40년간 해오셨고 앞으로도 하실 것이다. 국내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이러한 복지사업과 장학사업이 뜻을 이룰 것으로 저는 믿는다”고 말했다.

이철우 전 대표는 과장 시절부터 40년 가까이 신격호 회장을 보필한 인물이다. 롯데그룹 내에서 오너일가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던 인물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그는 롯데쇼핑뿐 아니라 롯데리아 대표, 롯데마트 대표, 롯데백화점 대표 등 롯데그룹 유통 계열사의 핵심 수장 자리를 여럿 맡았다.

장 이사장의 출발을 응원하는 말은 비단 롯데그룹 출신 경영자들에게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손자로 유명한 이종찬 광복회 회장은 롯데재단이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후원한다는 사실을 높게 평가하며 쿠바에서 있었던 일화를 전했다.

이 회장은 “롯데재단을 통해 쿠바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5천 달러를 지원한 일이 있는데 쿠바에서는 1천 달러도 엄청 많은 돈이라고 했다”며 “그들에게서 차라리 장학금을 2명에게 1천 달러씩 지원하고 나머지 3천 달러를 한인사회를 위해 쓰면 어떻겠냐고 회신이 왔는데 이 의견을 롯데재단에 전달했더니 흔쾌히 그래도 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5천 달러를 쓸모 있게 지원해준 것을 이 자리를 통해 감사드린다”며 “이번에 장혜선 이사장께서 취임하면서 이러한 장학사업을 계속하겠다는 뜻으로 광복회와 업무협약을 체결해준 데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이승훈 이사장은 롯데재단·롯데장학재단·롯데삼동복지재단의 내년 사업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장 이사장 체제에서 앞으로 그룹 내 재단의 역할이 더욱 확대하리라는 것을 보여줬다.

롯데그룹 3개 재단의 내년 사업비는 모두 180억 원으로 책정됐다. 올해 사업비와 비교해 약 20억 원 늘어난 것인데 이 가운데 장 이사장의 의지를 반영해 늘어난 장학사업의 예산만 30억 원이나 된다. 대신 올해 배정됐던 학술사업비는 내년 사업비에서 제외됐다.

장혜선 이사장의 행보는 앞으로도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현재 롯데삼동복지재단과 롯데장학재단 이사장만 맡고 있지만 앞으로 롯데복지재단을 이끌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실제로 과거 장 이사장의 어머니인 신영자 의장도 롯데그룹 복지재단 3곳을 한꺼번에 이끌었다.

장 이사장은 개인적으로도 재단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확대하겠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그는 11월10일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신격호기념관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피하게 하려는 관계자를 제지하면서까지 인터뷰에 스스로 나서며 “현재 경기가 부진하면서 자선사업도 침체된 것 같다”며 “이런 상황에서 롯데그룹이 더 좋은 일을 많이 해 다른 대기업도 복지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