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시 법흥동에 자리한 임청각은 고성 이씨 가문의 종택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이다. <임청각 홈페이지> |
[비즈니스포스트] 낙동강은 우리나라에서 압록강에 이어 두 번째로 긴 강이며 남한에서는 가장 긴 강입니다. 낙동강의 긴 여정은 강원도 태백시에서 시작됩니다.
함백산에서 발원하여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수많은 산줄기에서 흘러내리는 크고 작은 지류들과 합쳐져 경상도를 동서로 가르며 남행하여 남해 바다로 들어갑니다. 그 거리는 525km이며 두만강보다 4km 더 깁니다.
우리나라엔 산이 많습니다. 우리 국토의 약 7할이 산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강들은 산과 산 사이를 지나가느라 굽이굽이 휘어져 흐릅니다.
또, 아름답고 수려한 산봉우리들과 강물이 어우러져 만든 명당복지들이 많습니다. 낙동강과 낙동강의 지류들이 흐르는 곳에도 그렇습니다.
낙동강과 지류들이 만든 명당복지 중에는 명문가들이 터를 잡고 오랫동안 대대로 살아온 곳들이 있습니다.
봉화의 닭실마을, 영주의 무섬마을, 안동의 하회마을과 내앞마을, 임청각 등이 그런 곳입니다. 이들처럼 유명하진 않아도 여러 가문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복지들도 많습니다.
안동시 법흥동에 자리한 임청각은 고성 이씨 가문의 종택으로 조선조 중종 때인 1519년에 이명 선생이 지었습니다. 그 역사가 500년이 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입니다.
원래는 규모가 99칸에 이르는 대저택이었는데, 일제 시대 저택 안으로 중앙선 철도가 지나게 되면서 여러 부속 건물이 헐리고 현재는 70여 칸이 남았습니다.
안동으로 처음 이거한 고성 이씨 가문의 입향조는 이명 선생의 부친 이증 선생이었습니다. 이증 선생은 원래 한양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장인 이희 선생으로 인해 안동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희 선생은 공무로 안동에 왔다가 안동의 객관에서 사망했고 묘소 또한 안동에 있습니다. 이증 선생은 관직에 올라 진해 현감과 영산 현감 등을 역임한 뒤 안동으로 낙향했습니다.
선생은 훌륭한 청백리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칭송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은 선생 뿐 아니라 선생의 부인 또한 특별히 칭송하고 존경했습니다.
선생의 부인은 '무릇 관직에 있으면서 더러운 오명을 얻는 일은 부인 때문에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내 어찌 지아비에게 누를 끼치랴' 하며, 법도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게 하려고 매사에 삼가 조심했다 합니다. 부인은 집안 대소사를 공정하게 처리했고, 또 노복들과 백성들을 존중하고 어질게 대했으며, 어려운 이들에게 많은 인정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안동의 유림 선비 사대부들은 부귀권세보다 대의명분과 덕망을 훨씬 더 중시하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권문세도가보다 의롭고 덕망 있는 이들을 귀히 여기며 그런 이들과 친교를 나누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지역사회의 분위기 덕분에 부부가 다 덕망이 높았던 이증 선생 집안은 타향 객지인 안동 땅에서 크게 환대받았고 편안히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증 선생 일가가 안동에 정착하는 데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장인의 덕이 컸으리라 추측하지만,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선생 내외의 덕망이 높지 않았다면 그렇게 환대받으며 정착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 외롭지 않다. 덕을 쌓은 집안에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증 선생 집안은 지역민들의 환대를 받아 외롭지 않았고, 또 임청각이 지어질 천혜의 명당복지를 얻는 경사까지 맞게 되었습니다.
임청각 터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입니다. 뒤에는 주산인 영남산이 솟아 있고 앞에는 낙동강이 흐릅니다. 낙동강은 발원지인 태백과 봉화 북부지역을 지날 때는 강바닥의 경사가 급한 편이라 좀 빠르게 흐르다가 경사가 차츰 완만해짐에 따라 유속도 조금씩 느려집니다. 안동에 이르러서는 강바닥 경사가 매우 완만해져서 아주 유유히 흐릅니다.
임청각 뒤에는 둥그런 산봉우리가 아담하게 솟아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매우 단아하며 막 피어오른 꽃봉오리 같습니다. 이 꽃은 물가에 피어난 꽃이니 연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낙동강이 임청각 일대를 휘감고 흐른다면 임청각터를 연화부수형(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이라 하겠으나, 임청각 앞에서 그냥 가로질러 흐르니 임청각터는 연화도수형(연꽃이 물에 닿은 형국)입니다.
임청각에서 15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고성 이씨 탑동파 종택이 있습니다. 이 종택 뒤에도 둥그런 봉우리가 솟아있습니다. 이 봉우리도 연꽃이며, 탑동파 종택터 또한 연화도수형의 명당입니다.
임청각의 청룡은 탑동파 종택 옆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인데 짧지만 튼실하게 생겼습니다. 백호는 임청각 바로 옆에 있는 산줄기입니다. 이 백호가 강물이 흘러나가는 방향에 있어 낙동강의 정기를 거둬들이고, 또 그 정기가 흩어져 달아나지 않게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임청각 뒤에 솟아오른 산봉우리는 둥근 금성이며 형상이 매우 단정하고 수려하면서도 중후합니다. 뒤쪽의 주산이 이런 형상이면, 성품이 의롭고 깨끗하면서도 후덕하며, 포용심이 크고 어진 사람들이 나옵니다. 인의와 덕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이 배출됩니다.
또, 이런 터에 살면 재복도 많이 누리게 되는데 앞에 강물까지 흐르니 아주 큰 재복을 누리게 됩니다. 낙동강 뿐 아니라 낙동강의 큰 지류 중 하나인 반변천도 임청각 터에 재복을 가져다줍니다. 멀리 영양 땅에서 흘러온 반변천은 임청각에서 9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낙동강과 합류합니다.
이증 선생이 처음 안동에 이주했을 때는 재산이 아주 많은 부호가 아니었습니다. 좀 넉넉하게 사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덕망 높은 선생과 친교를 나누고자 찾아오는 손님들이 무척 많았다고 합니다.
선생의 부인은 모든 손님들을 정성을 다해 융숭히 접대했는데 손님이 너무 많아 때때로 양식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이증 선생 집안은 세월이 흐르면서 재산이 자꾸 불어나 대부호가 되었습니다. 가세가 흥왕하고 가솔들이 많아짐에 따라 임청각의 규모 또한 자꾸 커져서 99간 대저택이 되었습니다.
임청각 사람들은 대부호가 되었지만 호사스럽게 살지 않고 많은 덕을 베풀었습니다. 권세를 탐하지 않고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으며, 의로운 일에 앞장서고 약자를 잘 도왔습니다. 이런 덕행으로 지역사회의 신망을 크게 받으며 조선조 말엽까지 400여 년 동안 유복하게 또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한 가문이 어느 곳에 정착하여 40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큰 풍파를 겪지 않고 안락하게 지내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드문 일입니다. 자리 잡은 터가 특별한 복지여야 하고, 또 뛰어난 명당에 자리 잡았다 해도, 덕이 부족하다면, 거기서 오래 머물기 어렵습니다.
임청각 일대는 수려한 산봉우리들과 맑은 강물이 어우러져 만든 풍광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옛날에는 반변천과 낙동강 사이에 하얀 백사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더욱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푸른 비단을 깔아놓은 것 같은 강물과 하얀 백사장, 수려한 산봉우리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경을 보면 탄성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이중환 선생은 택리지에서 귀래정, 영호루와 더불어 임청각을 안동지방 최고의 명승지로 꼽았습니다. 조선시대엔 주인들의 훌륭한 덕망과 이 아름다운 풍광에 이끌려 수많은 학자 문인 예술가들이 임청각을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류인학/자유기고가, '문화일보'에 한국의 명산을 답사하며 쓴 글 ‘배달의 산하’, 구도소설 ‘자하도를 찾아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