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2023년 3월22일(현지시각) 워싱턴DC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날 연준은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높은 4.75~5.00%로 올렸다. 이는 2007년 9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연합뉴스> |
실리콘밸리은행, 시그니처은행, 퍼스트리퍼블릭, 그레디스위스(크레디트스위스), 그리고 찰스슈와브…
예금자들의 예금 인출 사태로 지난 3월10일 당국으로부터 폐쇄 명령을 받은 미국 실리콘밸리은행 사태를 계기로 세계경제가 위기로 다시 출렁이고 있다.
미국의 한 지방 은행의 몰락이 일파만파로 확산되는 모양새이다. 곧 이어 또 다른 미국 지방은행인 시그니처은행이 파산했다.
퍼스트리퍼브릭도 예금 인출 사태로 유동성 위기에 몰려서, 제이피모건체이스 등 11개 월가 대형은행들이 지난 16일 퍼스트리퍼블릭에 300억달러를 예금하는 형식으로 유동성을 투입했으나, 위기가 해소되지 않아 추가적인 지원이 모색 중이다.
위기는 미국을 넘어서 국제적으로 번져서, 신뢰와 안전의 대명사라는 스위스 은행에서 서열 2위인 국제 대형은행 크레디트스위스도 중앙은행의 540억달러 지원에도 예금 인출 사태 등 신뢰 붕괴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실리콘밸리은행이 폐쇄된 지 9일 만에 경쟁 은행인 유비에스(UBS)에 인수됐다.
그리고 이제 월가에도 심상치 않은 파장이 일고 있다.
미국에서 10번째로 큰 은행인 찰스슈와브가 예금인출 사태 및 주가 급락을 겪고 있다. 슈와브는 실리콘밸리은행이 예금인출 사태로 긴급 자본 보충을 발표한 지난 8일 이후 주가가 31%나 급락했다.
특히, 23일에는 5.99%나 떨어져, 주가 급락이 가팔려졌다. 이에 찰스슈와브의 최고경영자 겸 공동회 장 월트 베팅어는 24일자 '월스트리트저널'과 긴급 회견을 갖고 “우리 은행의 예금이 100% 인출되어도 이를 감당할 충분한 유동성이 있을 것이다”며 “단 하나의 주식도 팔지 않아도 된다”고 위기 진화에 나섰다.
찰스슈와브에서 최근 예금 인출 규모가 얼마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지난해 말 기준으로 예금은 3660억 달러였다. 이는 2021년 말에 비해서는 17%가 줄은 것이다. 찰스슈와브의 위기 징후는 시리콘밸리은행 사태와 비슷한 양상이다.
미국 연준의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장기채 투자에서 손실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예금들을 모아서 장기채에 투자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급격한 금리인상으로 큰 손실이 예상된다.
당국과 월가 대형은행들이 긴급 유동성을 투입하고 있다.
찰스슈와브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만기보유채권의 미실현 손실액이 110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됐다. 이는 회사 청산 때 은행이 손실을 얼마나 흡수할지를 보여주는 척도인 유형자기자본 규모인 60억 달러를 넘는 것이다.
찰스슈와브 쪽은 1천억 달러가 넘는 유동성을 현재 확보할 수 있고, 연방주택대출은행(FHLB) 등 금융 당국으로부터도 3천억 달러 이상의 유동성을 공급받을 수 있다고 불안감을 달래고 있다.
찰스슈와브가 당장 폐쇄되는 등의 극단적 사태를 발생할 가능성은 당장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은행 사태로 시작된 금융불안이 번지고 있다는 현실은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현재 상황은 2008년 금융위기와는 다르다고 당국과 월가 등 금융가는 주장하나, 이는 두고봐야 할 일이다.
어쩌면 위기의 확산 속도가 2008년보다도 더 빠른 측면도 있다.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본격화된 전 세계적 금융위기의 전조는 사실 3년 전 2005년 미국 주택모기지 시장에서 드러났다. 집을 사기 위해 비싼 금리의 모기지를 집값의 90% 이상까지 대출받은 사람들과 중개업체들이 파산하는 사태가 시작됐다.
2008년에도 대형 국제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가 3월에 파산위기에 몰려서, 제이피모간체이스에 인수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나서 6개월 뒤에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금융위기가 현실화됐다.
미국의 한 지역에서 금융업의 고향인 스위스로, 그리고 세계 금융의 본 무대인 월가로 위기가 확산하는 데 2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서브프라임 주택모기지 사태가 부른 2008년 금융위기는 과도하게 주택대출을 빌린 개인들의 파산에 이어 대형 은행들도 재무 상태가 극도로 취약해지고 엄청난 손실이 커지면서 발생했다. 개인이나 대형 은행이나 내용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모두 파산에 합당한 상태였다.
반면, 실리콘밸리은행 폐쇄로 시작된 이번 상황은 당국이 지적하는 대로 관련된 금융회사들이 자본비율 등에서 건전해서 기술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편이다. 시장에 퍼진 과도한 불안이 문제이기에, 당국이 개입하고 시간이 지나면 진정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비율 등 재무 상태가 파산에 이를 지경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스위스 은행까지 넘어간 사태는 역으로 문제가 더욱 심각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08년 금융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시작된 저금리 사태가 너무나 길어지고, 잊혀졌던 인플레이션이 살아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70년대 말 폴 볼커 당시 연준 의장이 주도하던 금리인상에 이은 역사상 두 번째로 급격한 금리인상의 스트레스가 이번 은행 위기로 드러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소셜미디어의 확산은 이번 사태를 더 부채질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은행의 재무 현황이 표면화되자마자, 고객들이 클릭 한번으로 돈을 이체하면서 은행은 폐쇄될 수밖에 없었다.
당국의 대응도 오락가락하고 있다.
위기가 번지자 재닛 옐런 재무장관 등은 구제금융이나 예금보호 등을 놓고는 계속 갈지자 행보를 하고 있다.
미국 금융당국은 25만달러가 예금보호 상한선인데, 이번 실리콘밸리은행 사태에서는 예외적으로 전액을 보장하기로 했다. 더 나아가 다른 은행에서도 이를 적용하겠다는 시사를 했다.
재닌 옐런 재무장관은 21일 중소은행들이 위기 전염을 조성할 예금 인출사태를 겪는다면, 25만달러 이상의 비보장 예금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날 그는 상원 청문회에서 “예금의 포괄 보험이나 보장”은 고려되거나 논의된 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의회의 승인없이는 모든 예금을 보장할 권한이 없다고 책임을 미뤘다.
은행 주가가 다시 폭락하자, 옐런은 다음날 하원에 출석해 다시 입장을 바꿨다. 그는 “우리는 근거가 있다면 추가적인 대책들을 취할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예금보호를 둘러싼 미국 정부의 갈지자 행보는 이번 위기를 바라보는 시각과 해법의 차이가 커서, 문제 해결이 간단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월가의 시각을 대변하는 '월스트리트저널'은 연일 사설로 정부의 예금전액 보장 구상을 비판했다. 예금을 전액 보장해주면, 은행이나 고객의 도덕적 해이를 부른다는 논지이다.
월가의 이런 시각은 예금 전액 보장을 주장하는 진보적 정치인과 학계 인사와 대비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불평등 문제에 천착한 조지프 스티글리치 컬럼비아대 교수는 '프로젝트 신디게이트'에 ‘예측할 수 있는 또 다른 은행 실패’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이번 사태를 두고 2008년 금융위기 때 만들어진 금융규제법인 도드프랭크법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 완화되면서 중소은행들이 감독과 규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객들은 정부가 인정한 은행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보고 예금이나 투자를 했고 은행의 부실 여부도 알 수 없다며 예금의 전액 보장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대신에 금융 감독과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진보적인 정치인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이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워런 상원의원은 19일 시비에스(CBS)의 ‘페이스 더 네이션’ 프로그램에서 “연준과 그 의장 제롬 파월이 궁극적으로 이 은행들에 대한 감독에 책임이 있다. 그들은 이 은행들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자신들의 일임을 명백히 해왔다. 이제 우리는 그 결과를 보고 있다”고 질타했다.
당국의 무책임이 빚은 사태이니, 예금을 전액보장하고 앞으로는 은행 등 금융회사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자는 주장이다.
월가를 대표하는 월스트리트저널이 예금 전액 보장을 반대하는 것은 예금 전액을 보장할 경우 규제와 감독이 강화되는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신문은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같은 진보적 인사들이 지금 부유한 예금자에 대한 폭넓은 보호를 요구하는데, 이는 더 많은 은행들을 대마불사로 만드는 더 많은 규제를 가하려는 구실로 사용하려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월가의 이런 자유방임적 태도는 이중적이기도 하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사실상 모든 월가 은행들이 당국의 구제금융이 없었다면 망했을 것이다. 당시는 구제금융을 조건으로 도드프랭크법이 입안됐으나, 월가 은행들이 회생하자 곧 입장을 바꿔서 그 법을 무력화했다.
이번 실리콘밸리은행 사태에서 피해자는 미국에서 가장 자유방임적인 입장을 취한 실리콘밸리 사업가나 투자자들이었다.
이들은 평소에 정부의 모든 규제를 반대하는 ‘리버타리안’ 입장을 취하다가, 실리콘밸리은행 사태가 터지자 정부의 개입을 촉구했다.
실리콘밸리의 대표적 리버타리안인 데이비드 색스는 “파월은 어디 있는가? 옐런은 어디 있는가? 이 위기를 당장 중단시켜라. 모든 예금자가 안전할 것이라고 발표하라”고 자신의 소셜미디어 등에서 주장한다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이들의 이중성을 지적했다.
실리콘밸리은행 사태로 번지는 위기는 이제 시작일 뿐일 수 있다. 장기간 저금리 상황으로 해이해진 금융시스템 수술이 필요하다. 월가 등 대형 은행들이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다면, 2008년 금융위기 같은 사태로 진화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참호 안에서 무신론자가 없고, 금융위기 와중에서 리버타리안은 없다”라는 월가 격언이 있다. 정의길/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