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과 신세계그룹은 일찌감치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을 가동하며 스타트업의 발굴과 육성에 힘을 쏟았지만 정 회장은 이런 흐름과 거리를 뒀었다.
정 회장이 스타트업 발굴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남들이 걷는 길을 따라가겠다는 뜻으로도 보이지만 이 가운데서 차별화를 찾아낼지 주목된다.
현대백화점그룹은 7일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창업 지원기업)인 케이스타트업과 손잡고 스타트업의 창업과 성장을 지원하는 ‘체인지엑스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현대백화점그룹이 전문 스타트업 육성 기업과 손잡고 스타트업 지원에 나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은 그동안 스타트업 투자에 소극적이었다.
현대백화점이 그동안 스타트업에 투자한 사례는 지난해 8월 편의점 콘셉트의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소비자 취향에 맞는 상품을 구비해놓고 판매하는 매장)인 나이스웨더에 30억 원을 투자한 1건에 불과하다.
그룹 전체로 봐도 현대백화점그룹의 스타트업 투자 사례는 드물다. 현대백화점그룹 설명에 따르면 계열사들의 누적 투자 건수는 모두 4건이며 금액으로는 180억 원 규모다.
경쟁그룹인 롯데그룹, 신세계그룹 등과 비교하면 매우 신중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롯데쇼핑은 2021년에만 중고나라와 어반플레이 등 스타트업 2곳에 317억 원을 투자했다. 기간을 넓혀 보면 현재까지 모두 스타트업 4곳에 350억 원가량을 썼다.
롯데그룹이 운영하는 기업형 벤처캐피털인 롯데벤처스까지 합하면 규모가 크게 늘어난다. 스타트업 투자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는 더브이씨에 따르면 롯데벤처스는 2016년 설립 이후 현재까지 모두 스타트업 163곳에 613억 원 규모를 투자했다.
신세계그룹도 스타트업 투자에 활발하다.
신세계만 보면 2021년 12월에 서울옥션에 투자한 280억 원이 스타트업 투자의 전부다. 하지만 신세계그룹이 2020년 7월에 출범한 기업형 벤처캐피털 시그나이트파트너스의 투자를 보면 1년 반 동안 스타트업 11곳에 307억 원이 넘는 자금을 쏟아부은 것으로 확인된다.
현대백화점그룹이 올해부터 해마다 2차례씩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한 것은 이런 경쟁그룹의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현대백화점그룹과 협력하기로 한 케이스타트업은 국내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의 원조 격인 회사로 2013년부터 운영됐다.
케이스타트업이 육성에 성공한 대표적 기업으로는 국내 최초 가상화폐 거래소 코빗이 있다. 코빗은 2017년 넥슨에 913억 원에 팔렸다. 그밖에도 여러 스타트업을 성공적으로 지원해 카카오엔터프라이즈나 네이버, CJE&M 등에 인수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정지선 회장이 사업 파트너로 케이스타트업을 선택한 것은 결국 이들의 성공 경험과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정 회장은 최대한 다양한 스타트업을 발굴하기 위해 선발 문턱도 대폭 낮췄다. ‘현대백화점그룹과 협력이 가능한 모든 분야’의 스타트업이라면 누구든 프로그램에 지원할 수 있도록 했으며 선발 대상 기업을 몇 개로 할지도 정하지 않았다.
현대백화점그룹 관계자는 “최대한 많은 스타트업을 선발하기 위한 목적이다”며 “앞으로 스타트업에 얼마를 투자할지도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정 회장이 앞으로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할지는 미지수다.
다만 그동안 정 회장이 보여줬던 경영 기조를 고려해보면 다른 유통기업과 다른 길을 걸어갈 가능성도 높다.
정지선 회장이 이끄는 현대백화점그룹 전략의 중심에는 항상 ‘공간의 차별화’와 ‘경험의 차별화’가 있었다. 오프라인 유통기업만이 줄 수 있는 고유의 가치를 극대화하겠다는 것이다.
더현대서울이 대표적이다.
정 회장은 더현대서울을 ‘미래형 백화점’이라는 콘셉트로 만들었는데 전체 영업 면적의 절반만 매장 면적으로 확보하고 나머지는 고객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채웠다.
백화점 실적과 직결되는 매장 면적을 과감히 줄인 것은 백화점업계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파격적 행보였다. 하지만 더현대서울은 체험의 역할을 극대화함으로써 오픈 1년도 안돼 2021년 기준 국내 백화점 매출 순위 20위 안에 들며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더현대서울이 ‘공간의 차별화’에 중점을 둔다면 현대백화점이 지난해 투자한 나이스웨더는 ‘경험의 차별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이스웨더의 모회사는 CNP컴퍼니인데 이 회사는 이미 서울 강남에서 여러 외식브랜드를 성공시켰다. 아우어베이커리나 도산분식, 대막비스트로, 런드리피자 등은 인스타그램 등 여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기 맛집으로 통용될 정도로 '인증샷 성지'로 자리잡았다.
롯데그룹과 신세계그룹이 각 유통기업의 본업인 패션·푸드·라이프스타일·화장품 관련 산업뿐 아니라 바이오와 헬스케어, 서비스분야와 관련 있는 스타트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것과 비교해 현대백화점그룹의 스타트업 투자는 철저히 '오프라인 경험 차별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의 이런 특성을 감안해보면 정 회장이 앞으로 스타트업을 지원할 때도 오프라인의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회사에 더 관심을 쏟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비즈니스포스트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