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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돌 9단이 13일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네번째 대국에서 승리한 뒤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 미디어 중계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뉴시스> |
1989년 9월6일 김포공항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카퍼레이드 행사가 펼쳐졌다. 행사의 주인공은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바둑영웅’ 조훈현 9단이었다.
조 9단은 전날 싱가포르 웨스틴스탠퍼드 호텔에서 벌어진 초대 잉창치배 세계바둑대회 결승 5국에서 불리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을 뒤엎고 중국의 네웨이핑 9단을 145수만에 불계로 제압하며 상금 40만달러를 거머쥐고 금의환향했다.
조 9단은 공항을 가득 메운 환영인파의 물결 속에서 김포공항에서 당시 한국기원이 있던 종로구 관철동까지 꽃다발을 안은 채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세계바둑 대회 우승으로 카퍼레이드를 한 기사는 조 9단이 유일했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2016년 3월. 바둑이 다시 한번 한국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27년 전과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무대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이세돌 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 간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승부가 9일부터 서울 광화문의 포시즌스호텔에서 펼쳐지면서 숱한 이야깃거리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번 대결은 인간과 컴퓨터(기계)의 사실상 첫 대결이라는 점에서 ‘인류’의 관심을 모았다.
대국 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9단이 무난히 이길 것으로 예상했다. 인공지능 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더라도 인간의 창의력과 직관이 무엇보다 중요한 바둑에서 아직은 기계가 인간에게 안 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 9단도 행사 전 “무조건 5대0으로 이길 것”이라며 “만약 내가 한판이라도 진다면 알파고가 승리한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알파고는 기존에 보아온 ‘그저그런’ 인공지능이 아니었다.
알파고는 초당 수천번의 시뮬레이션이 가능한 중앙처리장치(CPU) 1200여대로 무장해 지금까지 바둑계에서 보지 못했던 파격적인 수와 치밀한 계산력을 선보이며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이 9단을 상대로 파죽의 3연승을 올렸다.
이 9단의 '압승'을 예상했던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충격과 경악에 빠졌다.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사회에 대한 어두운 전망까지 아울러 폭포처럼 쏟아졌다.
이세돌바둑연구소의 어린 원생들은 3국에서 ‘스승’의 패배가 확정되자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이 “누가 이기든 이번 대결의 승자는 인류”라고 말했지만 기계에 당했다는 당혹감과 막연한 공포심을 씻어내 주지는 못했다.
이 9단이 마침내 ‘기적’ 같은 1승을 따냈다. 13일 치러진 4국에서 이 9단이 알파고를 상대로 180수만에 ‘항서’를 받아낸 것이다.
프로기사들은 보통 불계를 선언할 때 자신의 돌을 바둑판 위에 올려놓는데 알파고는 승부의 추가 완연히 이 9단쪽으로 기울자 ‘AlphaGo resigns(알파고는 포기한다)’라는 팝업 창을 컴퓨터 화면에 띄워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이 9단의 승리가 확정되자 조금의 과장을 보태자면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진출 때보다 더한 환호가 쏟아졌다.
그가 대국을 끝내고 기자회견장에 들어서자 내외신 기자들이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모두 일어나 “이세돌”을 연호하며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 9단의 승리가 무엇보다 반갑고 귀중한 것은 이번 대결에서 ‘인간 이세돌’의 지칠 줄 모르는 투혼과 도전정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3국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이번 대결은 '알파고의 5대0 승리'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놨다. 내외신 기자들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듯 절반 이상이 빠져 나가 북적대던 기자실은 썰렁하기까지 했다.
이 9단도 이런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 9단은 포기하지 않았다.
게임이 시작되고 내리 세판을 진 사람이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슬러 ‘1승’을 올린다는 것이 승부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몸을 담아본 사람이라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다.
게다가 이 9단은 사상 첫 인공지능과 대결에서 ‘인류대표’라는 무거운 짐까지 함께 짊어져야 했으니 그 부담감과 중압감이 얼마나 컸을까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이 9단의 승리를 ‘기적’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도 이런 모든 악조건을 뚫고서 일궈낸 천금같은 결실이기 때문이다.
이 9단은 4국이 끝난 뒤 “세판을 지고 한판을 이겼는데 이렇게 많은 축하와 격려를 받은 건 처음”이라며 “이기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며 흰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이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은 이제 단 한판만 남았다.
이번 게임은 인간과 인공지능과 대결이라는 승부적인 요소 외에 어느새 성큼 다가온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라는 묵직한 주제도 함께 우리사회에 던져 주었다.
인공지능이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게 될지 아니면 반대로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음울한 미래가 현실화될지 아직까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사람들은 알파고와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 9단의 물러서지 않는 도전을 응원하고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바둑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재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