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 초석 놓은 강동석과 이재희  
▲ 이재희 전 인천공항공사 사장이 2008년 3월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인천-파리 구간에 대한 정기국제노선 취항식을 열고 있다.<뉴시스>


이채욱 인천국제공항공사 4대 사장이 인천공항이 화려한 시절을 맞이하도록 했다면 그 기틀은 이재희 3대 사장이 닦았다. 인천공항에 화려함을 입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동석 초대 사장은 말 그대로 맨땅에서 인천공항을 만들어 냈다.

◆ 이재희 3대 사장, 인천공항에 화려함을 입히다

이재희 3대 사장은 인천공항공사 최초의 민간기업 출신 사장이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유니레버코리아 회장과 세계적 물류업체 TNT의 동북아 담당 사장을 지낸 이재희 사장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2005년 7월 인천공항공사의 수장이 됐다.

이 사장은 최초의 민간기업 CEO 출신다운 행보를 보였다. 취임 초부터 대규모 구조조정을 실시하며 취임 5개월 만에 조직개편을 마무리했다. 공사 특유의 안이함과 방만한 분위기를 과감하게 없애려 노력했다. 상임이사 5명에게 사표를 받아냈고 기존 조직을 팀장체제로 전환해 효율성을 기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1급 이상 처장 40여 명이 명예퇴직했다. 상여금을 성과급으로 전환했고 임금피크제도 도입하는 등 변화가 끊이지 않았다.

사내에 MBA교육 과정을 도입해 교육기능도 강화했다. 이 사장은 당시 “인천공항의 하드웨어는 세계적 수준인데 운영을 제대로 해낼 인재가 부족해 사내 교육기능을 강화하게 됐다”고 말했다.


인천공항도 점점 더 화려하게 변신했다.


개항 5주년을 맞아 국내 최초로 인천공항을 배경으로 드라마 촬영이 진행됐다. 최지우와 이정재 주연의 ‘에어시티’는 2007년 MBC에서 방영됐다.


2008년 6월 공항 상업시설을 전면적으로 새당장하는 작업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면세점인 '에어스타(AIRSTAR)'를 선보였다. 면세점의 전체 면적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났고 명품 브랜드가 대거 입점했다. 공항 상업시설을 '잠깐 둘러보는 곳'에서 '쇼핑과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는 목적이었다.


2008년 4월부터는 기업인을 위한 VIP룸인 우수 기업인(CIP, Commercially Important Person) 라운지를 만들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대통령, 국회의장, 국회의원 등 고위관료들이 이용하는 의전실만 있었다. 이 사장은 당시 “기업경영을 오랫동안 해 온 입장에서 보면 공항 의전실을 기업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의견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사장 시절 인천공항공사 직원들은 ‘혁신의 피로감’에 몸살을 앓았다.


“무사안일한 공기업 마인드를 버려야 한다. 일정 시점이 지나면 업무보고를 영어로 받겠다.” 이 사장이 취임하면서 한 말이다. 갑작스런 조처에 직원들이 적응하지 못했다. 이 사장은 인사와 경영에서 독단적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취임 직후부터 불어온 칼바람에 직원들은 고초를 겪었다. 끊임없는 자기혁신 요구에 직원들은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장은 퇴임을 앞두고 "어떤 사장으로 기억되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새로운 문화와 질서, 패러다임에 눈뜨게 한 CEO로 기억되고 싶다. 1960년대 국내에 미니스커트를 소개한 가수 윤복희 씨처럼 말이다”라고 대답했다.

◆ 강동석 초대사장 "인천공항은 2001년 3월29일 정상 개항합니다."

  인천공항 초석 놓은 강동석과 이재희  
▲ 강동석 초대 인천공항공사 사장은 2012 여수세계박람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뉴시스>


강동석 초대 사장은 인천공항을 말 그대로 ‘만든’ 사람이다. 강 사장은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교통부 행정사무관으로 공직을 시작했다. 1994년 인천공항의 전신인 수도권신공항건설공단 이사장에 임명되면서 인천공항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됐다. 2002년 3월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인천공항의 건설 과정을 모두 살피며 직접 초석을 놓았다.


강 사장은 주변의 경쟁공항보다 저렴한 공항사용료를 책정해 항공사 신규 취항을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인천공항의 자랑이 된 간소한 출입국 절차 도입, 처음 책정했던 가격보다 반절 가까이 내려간 공항버스 및 리무진버스 요금 등 중요한 사안부터 세세한 부분까지 강 사장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강 사장이 만든 초기의 인천공항은 그 후 13년 동안 인천공항이 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개항을 얼마 앞두고 당시 우리보다 먼저 개항한 홍콩 첵랍콕 신공항은 개항하자마자 화물처리시스템에 큰 문제가 생겨 세계적으로 큰 망신을 당했다. 인천공항이 개항할 즈음 인천공항의 고민도 화물처리 시스템이었다. 언론들은 연일 화물처리 시스템에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개항을 연기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첫 운항을 일주일 앞둔 시기 한 언론사에서 진행했던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84%가 첫 운항을 미뤄야 한다고 대답할 정도였다.


하지만 강 사장은 당시 화물처리 시스템을 비롯한 전체적 공항 운영에 문제가 없다며 정해진 날짜에 공항을 개항했다. 강 사장은 개항 시기에 문제가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 “인천국제공항은 2001년 3월29일 정상 개항한다”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공연한 호기가 아니었다. 강 사장은 스스로 건설현장을 직접 챙기며 몇 년을 지켜봤다. 공항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강 사장은 인천공항을 건설하는 동안 출퇴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공사현장 한 편에 화물용 컨테이너를 설치하고 거기서 부인과 2년 동안 기거하며 지금의 인천공항을 만들어냈다.

강 사장은 퇴임을 앞둔 2002년 3월 “개항과 운영이 비교적 순조로워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강 사장은 2002년 인천공항공사의 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한국전력공사 사장을 거쳐 2003년 제12대 건설교통부 장관에 올랐다. 하지만 처제와 고교 동창의 땅 투기 의혹에 이어 아들의 입사 청탁 의혹까지 받자 2005년 스스로 물러났다.

이 두 사안 모두 인천공항과 관련이 있었다. 그가 인천공항공사 사장으로 있던 1999년 처제와 고교 동창이 사전 정보를 이용해 공항 주변의 땅을 사 큰 시세차익을 봤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또 그의 아들이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의 교육의료팀장에 응시할 당시 채용을 관장하던 한 간부가 면접관들에게 “강 장관의 아들이니 회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합격시킬 것을 지시했던 사실이 확인됐다.

강 사장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인천 세계도시엑스포조직위원회 위원장과 상임고문을 거치며 인천과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