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줌인] 유럽 원전 확대는 사다리 걷어차기 준비 시간벌기

▲ 2022년 9월19일 벨기에 도엘(Doel) 원자력발전소 앞 풀밭에서 양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도엘 원전은 3기의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었는데 원전퇴출법에 따라 같은해 9월23일 폐쇄 절차에 들어갔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원전의 단계적 퇴출, 완전한 퇴출.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이 얘기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거론됐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 해 12월, 벨기에 연합내각은 오는 2025년 말까지 자국의 원자력발전을 단계적으로 완전 퇴출시키겠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은 통과 시점에서 불과 4년 만에 전대미문의 대업을 초고속으로 이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연히 유럽 매체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정말 그럴 수 있어?”

이 법안의 실현가능성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매체들의 생각은 단순했다. 원전을 통한 벨기에의 전기생산량은 자국 전체 전기생산량의 절반가량. 이걸 모두 지워버리겠다고? 합리적인 의혹이 성립하는 것이 당연했다.

벨기에는 지난 9월23일 실제로 자국의 도엘-3(Doel-3) 원전에서 그리드를 분리시키는 작업에 돌입하면서, 법안 통과가 실없는 농담이 아니었음을 보여줬다.

도엘-3 원전의 전기생산량은 1006MWe(메가와트 일렉트릭)으로 벨기에 전체 원전 생산량의 절반가량에 달한다. 벨기에 전체 전기생산량의 4분의 1 정도인 셈이다. 부족한 전기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프랑스는 주요 공급국가이다.
 
벨기에의 전기생산에서 도엘-3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가동중단은 중대한 결정임에 분명하다. 2026년 발전소의 실제 해체작업에 이르기까지 소상한 일정표가 이미 공개된 상태다.

조만간 반응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방될 것이고, 157개의 연료 어셈블리들이 분리되어 냉각풀로 옮겨질 것이다. 2023년 이들이 충분이 냉각되고 나면 특별저장소와 운송 컨테이너에 담기기 시작할 것이지만, 냉각풀이 모두 비워지기까지는 4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발전소의 방사능이 99% 이상 제거되는 시기는 2026년에야 가능할 것이고, 이 때부터 발전소 해체 작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확고부동한 일정표가 나온 셈이다.

벨기에 연합정부는 한 발 더 나아가 내년에는 티앙주(Tihange)-2의 가동을 중단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고 나머지 도엘-1, 도엘-3, 도엘-4, 그리고 티앙주-3의 가동을 2025년까지 순차적으로 가동중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혀둔 상태다. 이로써 벨기에의 원전퇴출은 달성될 것이고, 원전 완전퇴출 국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아름다운 이야기 이면에는 뒷이야기가 있게 마련이다. 벨기에의 원전퇴출 계획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3월 벨기에 정부는 프랑스 에너지 기업 앙쥐(Engie)의 벨기에 자회사인 일렉트라벨(Electrabel)과 협의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양쪽은 도엘-4와 티앙주-3의 가동을 연장하는 방안을 두고 협의했다. 원전 발전능력을 2GWe(기가와트 일렉트릭) 정도까지 유지하자는 것이 그 골자였다. 

실제 벨기에 정부와 일렉트라벨은 지난 7월 이들 두 발전소의 가동을 10년 더 연장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협상 진행을 위한 비구속적 상호 의향서에 서명까지 마쳤다. 이쯤 되면 벨기에 원전퇴출 법안은 기괴한 느낌마저 준다.
 
의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도엘-3의 폐쇄는 정말 원전퇴출 계획의 시작일까?

이 원전이 1982년산이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원전퇴출 법안의 순수성에 대한 의구심은 커진다. 늙을 대로 늙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나이의 40살 원전은 퇴출이 아닌 자연사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닐까?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폐쇄 당시 이 원전의 전기생산량은 당초 생산능력의 60% 정도에 불과했다. 

사실은 여기에 원전을 둘러싼 벨기에의 고민이 있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은 원전을 둘러싸고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56개의 원자력 반응로를 보유하고 있는 원전부자인 프랑스만 해도, 한동안 점진적인 탈원전을 꿈꾸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원전의 증설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지난 2월 프랑스의 마크롱 정부는 2035년부터 노후 원자로의 교체를 위해 최소 6기의 차세대 유럽식 가압수형 원자로(Pressurized water reactor)에 520억 유로를 투자한다는 계획안을 내놨다. 이로써 언감생심 원전탈피는 말도 꺼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뿐만 아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의 원전이 40년의 수명을 넘어 50년, 가능하다면 60년까지 지속돼야 한다는 입장까지 표명했다. 

이 정도면 지난 2020년 프랑스 북동부의 페센하임(Fessenheim) 원전 폐쇄를 지지했던 그 마크롱이 맞나 싶을 정도다. 원전 폐쇄 지지발언으로 두고 두고 비난을 받았던 것이 상처가 되었던 탓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원전 퇴출의 분위기 속에서 건설 전문가들이 거의 사라진 탓에, 프랑스는 이제 오히려 원전 건설에 따른 인력부족을 걱정하고 있다.

프랑스 북부 빵리(Penly) 지역에 계획되고 있는 두 기의 새 원자로 건설에만 약 8천여명의 전문인력이 필요할 것이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새로운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 최소 4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도 여기에 한 몫을 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유럽에서 원전의 증설은 새로운 추세가 되고 있다. 영국은 현재 건설 중인 원전에 또 하나를 추가하기 위해 200억파운드의 투자계획을 밝혔다. 더하여 오는 2050년까지 자국 전기 수요량의 25%에 해당하는 24기가와트까지 원전으로 생산한다는 방침 아래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원전퇴출 노력에 가장 실천적인 국가는 독일이다. 사실 원전퇴출에 관한 한 독일은 우리나라와 벨기에의 대선배격이랄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원전 가동에 나섰던 독일은 이미 지난 2002년 원전 완전퇴출 법안을 통과시켰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당시 메르켈 총리가 올 2022년 연말까지 원전 완전퇴출을 다시 한 번 표방했다. 그리고 독일은 이를 비교적 잘 실천해왔다.
 
그동안 독일은 5개의 원전 중에서 3개를 가동 중단한데 이어 올 연말까지 나머지 두 개를 마저 가동을 중단한다는 계획을 진행시켰으나 최근 이를 번복했다. 적어도 내년 4월까지는 가동을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독일의 가동연장 계획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축소가 이미 실행에 옮겨지고 있는 상황에서 추운 겨울을 날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독일과 벨기에를 논외로 하더라도, 프랑스 영국이 대 놓고 원전을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데에는 러시아의 천연공급 축소가 좋은 구실이 되었음직 하다.

물론 이것만으로 원전 확대의 논리적 근거는 부족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단기적이라면, 이들의 원전 계획은 적어도 20년 이상을 내다보는 장기적 계획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유럽연합 의회는 지난 7월 초 원자력을 청정에너지로 분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프랑스가 찬성했고, 독일이 반대했다.

하지만 50표의 커다란 차이로 원자력은 청정에너지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지난해 개최됐던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6)가 법안 통과에 나름의 명분을 제공했다. 직접적으로 탄소연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 부각됐다.
 
사실 유럽의 속내는 복잡하다. 주요 원전 의존 국가들이 갈짓자(之)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 그 증표다. 귀가 따가운 환경론자들의 반대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원전을 떠나보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지만, 그게 맘대로 될 리가 없다.
 
현대 산업사회에 전기는 식량과 다름 없다. 공급이 수요에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는 순간, 식량의 부족이 누군가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전기의 부족은 사회 전체의 마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생존이 문제되는 마당에 원자력을 친환경이라 우겨서라도 명분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더하여 원자력을 자신들의 독점적 산업경쟁력의 도구로 삼고자 하는 의중을 읽기는 어렵지 않다.

원자력을 청정에너지로 분류하면서 유럽연합 의회는 새 원전을 짓기 위한 조건으로서 △2045년 이전까지 건설허가 △2050년까지 고준위 방사성 폐기장에 대한 운영계획 △핵 연료봉이 녹아내리지 않는 기술의 확보 등을 내걸었다. 모두 쉽지 않은 조건들이다.
 
원전의 친환경 요건 충족 문제는 당연 원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원전을 짓고 말고, 원전수출을 하고 말고, 여기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조만간 상품을 만들 때 사용된 전기에너지가 친환경이었는지의 여부가 상품의 시장진입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측해볼 수 있다.
 
알고보면 유럽은 본격적인 사다리 올라타기 경쟁에 나서고 있는 것이랄 수 있다. 자신들이 먼저 사다리에 다 올라가고 나면 사다리를 치우겠다고 이미 공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원전강국인 프랑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음 단계인 핵융합 발전까지는 아직 날이 멀고, 그렇다고 당장 원전을 피해할 수도 없는 마당에 딱 자신들의 기술력만큼까지만 시장진입 조건으로 수용하겠다는 얘기다.
 
생각해보면 숨이 가쁜 상황이다. 우리가 지금 당장 신발끈을 동여맨다 하더라도, 유럽의회의 요구조건을 맞출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가령 핵 폐기장 확보만 하더라도 현재 정부 계획으로는 빨라야 2058년이다. 2050년에 맞춰 운영계획을 내놓기가 간단치 않은 상황이다.
 
원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탈원전의 노력은 타당하다. 반면, 당장 숨가쁘게 돌아가는 원전기술력 확보 경쟁에서 뒤쳐져서는 우리 산업의 미래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원전을 둘러싼 유럽의 고민은 곧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다. 다만 열쇠를 쥐고 있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유럽 쪽이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완전한 탈원전이라는 이상적 목표까지는 어렵더라도,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그들보다 먼저 사다리에 올라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자칫 우리 산업의 생존문제와 결부될 수도 있다.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놓고 정권마다 서로의 입장에 대한 옳고 그름만을 따지고 있다가는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허송세월하기 딱 좋은 시점이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원전에 관한 국민적 이해를 모으고 서둘러 사다리에 올라타야 할 때다. 사다리의 끝이 탈원전이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사다리 아래서 시시비비만을 따지고 있을 수는 없다.

전기가 식량과 같다면, 여기에는 정파적 이해관계가 끼어들 틈이 없어야 할 것이다. 조광태/칼럼니스트